동아일보

대한민국의 10대 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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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기준은 창간일자 순.
정식명칭(주)동아일보사
영문/한자명칭THE DONG-A ILBO / 東亞日報社
설립일1920년 4월 1일(1940년 폐간, 1945년 복간)
창업주인촌 김성수
대표자김재호(동아일보 발행인)
업종명신문의 발행 및 판매, 도서 잡지의 출판 및 판매
상장유무비상장기업
기업규모중견기업
본사 소재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홈페이지[1]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1 개요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1926년 동아일보 전면 기사, 이완용의 사망 2일 후

東亞日報, Dong-A Ilbo

한국의 조간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자세한 건 이곳을 참고.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며 3대 보수지라고 불린다. 대한민국 언론 삼대장

전라도 지역의 만석꾼인 김성수[2]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 본다"는 말도 있었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2 사옥


사진은 종로 미디어센터 사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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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적으로는 동아일보 빌딩 옆에는 1921년에 지어진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구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사옥은 없고 신사옥만 번듯한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3]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충정로 사옥이 있다.

3 역사

1920년 4월 1일에 전라도 지역의 만석꾼의 아들인 김성수가 설립하였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발행되었던 신문들 중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문이라 한국에서 발행된 신문들 중에서 역사가 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던 신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조선일보와 사이좋게 서로 친일신문이라고 싸웠다. 결국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씨가 반협박 비슷하게 중재하면서 일단락.

일제강점기의 손기정일장기 말소사건은 (원문) 교과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사건이며,[4]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 운동[5]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博文寺, 現 장충동 신라호텔 면세점 부지)에서 일제는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만행을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 언론에 별 관심없는 사람들은 동아일보에 대해 무척 호의적인 첫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정론지라고 주장하지만... 사장 송진우는 '소수 기자들의 실수였으며 이는 사측의 입장과 무관하다.'라며 정간을 해제해달라고 사정하였고, 속간이 되면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라며 일장기 말소에 대해 사과하였다. 이 패턴은 29만원 정권의 기자 해고 사건에서도 같았다.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채 칩거생활을 지냈다. 1937년 속간된 이후의 동아일보는 친일 어용 기관지로 전락했다. 이를테면 학도병 권유문도 올렸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와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자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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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이런 거 몰라도 동아일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면 첫인상이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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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39년 1면에 내보낸 사설에서 일제의 중국 침략을 중국 측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왜곡했으며, 조선인들의 충성을 당부했다.

오늘 7일은 지나사변 발발 제2주년 기념일이다... 돌아보면 재작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에서 발단한 지나사변이 오늘과 같이 진전되었으니 이것은 결코 우연적인 사실이 아니었고 지나(중국)측의 무모한 항일용공(抗日容共)의 도전적 태도에 대한 부득이한 거사였던 것이다. 그동안 충용한 황군은 ... 광휘 있는 일장기가 번창하게 되었고 그 작전의 규모가 크고 또는 전투의 성과가 큰 것은 인류의 전쟁사상에 실로 공전의 기록이었다. 이것은 오직 황공하옵신 폐하에 보국진충을 다한 출전장병의 무훈이 혁혁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 끝으로 총친화의 대도에 내선일체의 구현으로써 사변목적 달성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광복 직후에 다시 재간되었다. 1945년 12월 말에 동아일보에서 대서특필로 다룬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였다.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워 결국 찬탁하는 북한과 반탁하는 남한으로 분단되게 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로 시인했고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이전에, 김일성이 일으킨 보천보 전투를 대대적으로 호외보도하는 바람[6]에 민중들 사이에 김일성 신화가 생기게 만들어 윗동네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나중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씁슬한 흑역사가 있다.(...)[7][8]

또한 유신정권 시절에는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9],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건이 벌어진다(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기자들은 해직되고 회사도 친 정권적 성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해직된 기자들은 전두환이 물러나 민주화가 된 시점인 1988년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이 주로 북한같은 안보문제를 다루고, 중앙이 경제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동아는 문화 방면을 더 다룬다. 창간 당시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검열이 심하니까 민족주의, 민주주의보다는 문화주의가 강조되어 발행되었다. 딱히 큰 공연 없이도 항상 2면 이상을 문화면에 할애한다. 오오 문화 창달의 선봉장이시여... 그러나 대신에 조선 중앙에 비해 안티도 적으면서 팬도 적다.(...)

아예 노선이 확고한 조선일보나 기업들 입장을 대변하는 중앙일보와는 달리 이렇다 할 노선이 없어서 기회주의적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4 보수신문 동아일보

다만 1974년 기자 해고 사건 이후 성향이 꽤 딱딱해지긴 했어도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리즈시절에는 유시민이 동아일보에 기고하기도 했었고, 진보성향의 대표적인 대학교수로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도 역시 10여년 동안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한겨레 신문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신문 중에서는 가장 정권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유신정권기때 동아일보 소속으로 가장 격렬하게 반 독재 성향을 주도한 기자가 바로 송건호.

한겨레 창간 이후에도 현재의 경향신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고,[10] 심지어 당시 진보적인 신문 기자 지망생들 중에는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다른 신문사의 논조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전국적인 영향력 면에서 동아일보만한 신문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동아일보는 영향력이 방대한 진보적 논조의 신문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신문 순위를 매기면 동아일보- 한국일보 - 중앙일보 - 조선일보 순이었을 정도였다. 다만 1990년대에도 동아일보는 북한 관련 소식이나 노동조합 소식에는 조선일보에 버금가는 수구적 논조를 보였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살육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박종철 사건 당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다.

한편 동아일보는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주었으며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었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자 고려대를 인수한 김성수를 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주면서 그 고대생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었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라고 말했으며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하였다.

하지만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11]과 이를 비관한 당시 회장 부인의 투신자살 사건(한국어 위키백과 참조)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과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로 틀어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진보색채가 완전히 사라서 완전한 보수로 돌아섰고,[12] 뉴라이트의 등장 때에도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노선이 상당 부분 강조되고, 노골적인 친 정부 성향을 보이는 등의 횡보로 인해 최근에는 조선일보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론 굉장히 안좋은 의미로. 이 때문에 최근에는 조중동 대신에 '동조문중'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문화일보 추가). 그리고 2012년 기사나 사설의 동향을 보면 본격 정부 어용지로 전직한 모양이다. 안철수가 후보 사퇴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는 아무 평도 하지 않았고 중앙일보는 칭찬하기 까지 했는데 깎아내리는 것을 보면...

동아일보의 우경화의 배경으로 꼽히는 또 다른 이유는 삼성과의 관계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삼성생명으로 부터 자금을 끌어온 것부터 시작했고, 결정타는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김성수의 장손)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 그 김재열은 이후 그 제일모직의 사장,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의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그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으로부터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

항간에선 만년 조선일보에 밀려 콩라인을 못 벗어나자 자폭 + 흑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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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종편방송 <채널A>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저 따위로 다뤘다. 이젠 답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와 5.18 역사왜곡/채널A 문서로.

그런데 같은 방송국의 프로그램인 박종진의 쾌도난마에서는 5.18 당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던 인요한씨를 출연시켜서 북한군 개입설이 터무니없다는 방송을 내보냈고 5월 18일과 5월 20일에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하는 기사를 내보내 아리송한 행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기묘한 행보는 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자 역풍을 피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다. 거기에다가 동아일보 자체가 호남지방에서 한겨레신문과 1, 2위를 다툴정도로 구독자수가 많다보니 매출감소를 염려한 영향도 있다. 한겨레신문이 지지정당 성향상 압도적인 1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이 신문 영향력도 건재하다. 웬만해서는 동아 다음이 한겨레. 반대의 사례로 충청북도 옥천군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조선일보가 영 힘을 못쓰는 곳인데도 새누리당 계열의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애당초 이럴거면 그 따위 짓을 하지나 말던지 조선일보가 북한군 개입설로 인한 여론의 역풍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재빠른 행보이긴 하다. 이 신문이 이렇게 사태파악이 빠를리가...

어쨌든, 채널A의 이런 보도행태로 2013년 6월 10일, 광주시민들이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 조선일보 사옥 두 곳에 계란, 밀가루를 투척했다.

5 로고 및 심벌마크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東(동녘 동)을 두 겹으로 변형한 형태의 심벌마크로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심벌마크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각각 C자형 로고J자 로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서 조중동 중 유일하게 심벌마크를 폐기하거나 변경한 적이 없는 사례를 가지고 있다.[13]

여담으로, 동해상사고속의 CI도 동아일보의 CI와 너무 유사하다. 차이점이래봐야 바깥 원에 끊어진 부분이 있느냐(동아일보) 없느냐(동해상사고속) 정도일 뿐.

6 기타

1926년 이완용 사망 2일 후,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라는 명대사를 남긴 적이 있었다.

마라톤 대회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자매언론인 신동아가 최근 미네르바 낚시사건을 저질러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편,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동아방송(DBS)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서울 지하철 1호선시청역~종각역 사이의 드리프트(…)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서울 지하철 1호선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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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경의 사옥 모습. 바로 뒷쪽 큰 건물은 당시의 광화문 우체국이다. 왼쪽에 건물이 헐린 곳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이다.

사실 동아일보 사옥이 헐릴 뻔한게 이때 한번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상 앞부터 시청 뒤편까지 광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때는 정부로부터 여의도 부지를 받아서 이전할 뻔했다. 물론 계획이 사라지면서 안 헐렸지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심사위원이 예심에서 떨어진 응모작을 표절하여 작품을 써 발표한 희대의 막장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건 동아일보의 문제라기 보단 문단의 문제인데, 문단에선 특유의 친목질, 쉴드를 가동해서 결국 표절한 조경란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조선일보에서 주최하고 이문열, 신경숙 등의 빵빵한 작가들이 심사하는 동인 문학상까지 받았다. 이런 식의 주장이 2008년 프레시안, 한겨레 등의 좌파 언론에서 나와 한동안 소란스러웠으나 결국 2년이 지난 2010년까지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두 소설을 모두 읽어본 사람들은 표절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니 한 쪽만의 주장만 듣고 다른 쪽을 '표절' 운운하며 비방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90년대 특종 기사 중 하나를 꼽자면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날려버린 여자화장실 몰카 설치 폭로가 있다. 몰카에 대한 인식을 확립시켜 준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잘나가던 백화점 하나를 그렇게 순식간에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대단했다. 이후 외환위기와 겹쳐 좆망 테크를 탔고, 지금은 현대백화점 신촌점이 되었다.

딱 수능날이던 2010년 11월 18일엔 위키백과를 디스했는데, 위키백과에 북한군들이 주민번호를 도용해서 가입한 뒤 편집한다는 추측[14]을 A5면(!)에 싣는 병크를 저질렀다가 신나게 까였다.

그리고 2011년 7월 16일에 또 위키피디아를 디스했다. 제목은 北 편들고 南 깎아내리는 위키피디아. 게다가 이번에는 조선일보도 가세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전국 경영학도를 대상으로 DBR(Donga Business Review)을 무료배포하고 있다. 한 권에 12,000원이나 하는 책이니 많이 이용하자(...). 경영학 실제 케이스와 연구분석사례들이 나와 있다. 대학에 있는 경영학과 건물에서 배포하는 듯.[15]

페이스북#이 보통 일간지 페이스북과는 컨셉이 조금 다르다. 어설프지만 개드립(...)을 구사해보려고 하는 듯.

대대손손 4대에 걸쳐 회사의 대표이사직을 이어받고 있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 김상만의 장남 김병관,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16]

7 관련 회사

8 관련 문서

  1. 현재 동아일보 홈페이지가 잘 접속되지 않는다. 이점 주의할것. 이에따라 주성하기자의 남북이야기 블로그도 접속이 안되고 있다. 채널A는 잘 되는데 동아일보 홈피만 계속 상태가 오락가락 하며 레이아웃다깨지는 이유 좀 추가바람
  2.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이승만 정부시절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지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민주국민당 의원을 지내기도 하다. (엄밀히는 보성학원을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한 것이지만.) 때문에,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그렇게 서로 밀어주고 당겨줬기 때문에 이 둘의 커넥션은 끈끈한 편.
  3. 다만, 현재 조중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홍진기 교수의 중앙일보는 중앙일보빌딩(흑갈색건물로 개국 초기 JTBC의 사옥으로도 쓰였던 그 건물) 옆에 구 사옥이 존치중이며, JTBC빌딩(DMCC 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 구 사옥에 임시로 중앙일보가 세들어 사는 케이스는 있긴 있었다.
  4.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일으킨 신문은 여운형조선중앙일보였다.
  5. 브 나로드란 '민중속으로' 정도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다. narod는 영어로 치면 people정도의 의미로, 현 러시아의 유명 웹호스팅 서비스인 나로드 러시아(http://narod.ru)의 이름이기도 하다.
  6. 이 보도 나고 당연히 일제에 의해 정간당했다. 그리고 김성수가 조선총독부로 달려가 굽신굽신해서 돈을 상납해서 다시 복간.
  7. 물론 이건 당시 동아일보 탓이라긴 보다 해방 직후의 정치권 탓이겠지만.(물론 당연히 김일성도 포함.)
  8. 심지어 남북 교류가 활성화 됐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
  9.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종각드리프트. 만약 원안대로 추진했으면 아예 철거되어 몇년씩 정간당하는 사태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 윤전기가 진동에 약했는데 지하철을 그대로 지으면 윤전기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당시 정권이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충분한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 반면, 당시 경향신문은 친정부, 극우 성향이 강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정국과 1990년 한화그룹 합병이 주 계기가 되어 극우성향을 벗어던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신문시장 경쟁격화와 외환위기로 인한 경영난으로 인해 독립하면서 현재의 성향을 가지게 된다.
  11. 사실 이게 사건씩이나 된 것은 대단히 웃긴 이야기다. 사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공소시효 관계로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의 군사정부와 김대중 정부 이후의 모든 정부를 막론한 일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한 것이 딱히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문제는 딱 한번 이 정기적인 세무조사가 멈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김영삼 정부 시기, 정확하게는 최초의 문민정부 시기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세무조사라는 조세행정이 군사정부의 언론길들이기로 이해 될 수 있고, 문민정부가 되면서는 그게 중단되었다고 인식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김영삼 정부 시기를 거치고, 김대중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부활시키게 되자 바로 조중동과 김대중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가 두드러지면서 조중동을 다스리려고 한다는 인식과 결부되게 된다. 특히 동아일보는 김대중과의 관계 때문에 자기들은 특별히 잘 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특히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우그룹과 김우중의 경우와 대단히 유사하다.
  12. 덕분에 지역주의에 기댄 기사를 써서 욕을 실컷 먹기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대구, 부산 시민들 입을 빌려 김대중 정부가 IMF를 기회삼아 대구, 부산 경제를 죽이고 광주와 전라도 경제만 살리려 한다.라는건데... 그러나 기사에 포함된 표를 보면 추석이 없다는 대구, 부산보다 추석이 있는 광주가 실업율과 기업 부도율이 더 높았다. 뭥미...

  13. 파일:Chosun old logo.gif
    과거 조선일보는 사명(社名)의 머리글자를 본떠서 만든 로고를 사용했으며, 로고를 자세히 보면 '조선'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20년부터 2010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2010년 창간 90주년에 즈음하여 바뀌었다.
    파일:Joongang old logo.jpg
    중앙일보 역시 사명의 머리글자를 본뜬 로고를 사용했는데, 한자 中(가운데 중)자가 삼각형으로 모인 형태였다. 이 로고도 자세히 보면 '中央(중앙)'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65년부터 1995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1995년 창간 30주년에 즈음하여 바뀐 것으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겠다.'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인데, 주황색 원은 눈과 입, 알파벳 J자는 귀를 뜻한다.
  14. 위키백과는 실명제가 아니기에 주민번호는 커녕 휴대전화 인증도 필요 없다.
  15. 배포처 :건국대학교 - 경영관 2층 경영학과 사무실 앞. 고려대학교 - LG-POSCO 경영관 3층 수당학술정보관. 서울대학교 SK경영관 (58동) 1층. 성균관대학교 - 경영관 4층 경영경제대 행정실. 연세대학교 - 신경영관 4층 경영대학 행정실 앞. 서울시립대학교 - 미래관 5층 경영대학 행정실 내. 간혹 미래관 3층 경영경제전문도서관 대출데스크에 비치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즘은 최신호를 잘 안가져다가 놓는듯. 포항공과대학교 - 무은재 기념관 101호 앞, 충남대학교 - 경영학부 사무실(경상관 233호) 앞. 한국외국어대학교 - 경영학부장실 앞. 전국에 있는 경영학도들의 열렬한 추가바람.
  16. 동생인 김재열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차녀인 이서현과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