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작

1 개요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농민들이 넓은 토지에 농사를 짓는 현상. 넓을 廣을 써서 광작(廣作)이다.

이앙법 즉 모내기법은 이른시기에 알려졌지만, 농업 용수 확보 등의 문제로 국가에서 장려하지 않았다. 가끔씩 남부 지방에만 시험차 해보는 것이 전부.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정부의 간섭이 약해지고 모내기법은 대대적인 유행을 탄다.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많은 황무지가 개발되었고, 중국으로부터 여러가지 기술 등이 건너온 상황에서,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이것을 빠르게 이용하여 큰 이익을 보았고 이를 통해 부농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주가 아닌 소작인이어도 부농이 되어 광작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에 들어서 상품경제가 덩달아 발전하고 기타 여러 요인으로, 소작인과 지주의 소득 분배가 소작인에게 유리하게 바뀌었기 때문. 과거에는 수확량을 % 형식으로 나눴다면, 조선 후기에는 소작인이 지주에게 딱 할당량만 건네주면 됐기 때문에 자신의 몫을 남겨 이익을 보기가 쉬워졌다. 열심히 일하면 본인의 재산이 늘어나는 것.

이런 추세에 적응하여, 비교적 적은 노동력으로 대지를 경작할 수 있게 되자. 적응하지 못한 소작인이나 영세 농민 대부분이 농업에서 쫒겨나게 된다. 이렇게 쫒겨난 광산이나, 건설지역, 상단 등으로 흘러가 임노동자가 된다. 농민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분화된 셈.

광작으로 일부 농민들은 강한 자본력으로, 물건을 합리적으로 사고 파는 등. 조선 후기의 경제를 촉진시키는데 어느정도 기여하였음은 물론, 이렇게 부유해진 농민들의 입지가 올라가서 신분제가 서서히 동요되고, 지주와 소작농민. 양반과 농민 사이를 신분적, 계급적 관계에서 경제적, 사무적 관계로 바꾸었다.

2 의의

광작의 등장은 꽤나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이러한 근대화와 민주화의 기초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서 일반적인 근대화 루트가 농민이나 하층민이 부를 축적할 계기 마련 → 사유 재산의 개념이 강화 → 시장과 상업의 발달 → 잉여 노동력의 공업지역 이동 → 공업이 발달 → 신분제 동요와 신흥신분의 개혁요구 → 혁명 혹은 온건적 방법으로 지위 상승과 사회 발전.

영국산업혁명을 이룬 과정, 프랑스대혁명을 이룬 과정과 거의 비슷하다. 그 말인 즉슨, 조선 후기에도 시민들의 역량이 꾸준히 쌓이고 있단 얘기가 된다. 보통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답이 없지는 않았다. 다시말해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 주류 한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조선 내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사회상으로 제기되는 현상이 바로 광작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하고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