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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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달라보인다면 기분 탓이다.[1]

1 개요

를 일단 다른 곳에서 키운 뒤, 봄이 되면 벼를 논에 옮겨 심는 것. 이걸 '이앙법'이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그냥 볍씨부터 논에서 키우는 방법은 '직파법'이라고 한다.

2 역사

우리나라에서 벼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백제 다루왕 6년의 일로 서기 1세기부터 남아있다. 물론 그렇다고 서기 1세기부터 지었다는 것은 아니고, 김포에서는 기원전 2100년 경의 자포니카(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쌀 품종) 볍씨가 발견되었고, 고양시에서는 기원전 2300년경의 자포니카 볍씨가 발견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원군에서는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무려 기원전 1만 3000년 ~ 1만 7000년의 고대 볍씨가 발견되기도 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못해도 신석기시대부터 벼농사를 지었던 것이 유력하다.[2]

한편, 이앙법의 역사는 고려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조선 중기 이후가 되어서였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고려사공민왕시절부터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 물을 대지 않고 다른 작물을 키울수 있어서[3]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량 증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 직파법에 비해서 잡초 제거가 쉬우며 병충해가 적고 벼를 고르게 심을 수 있어 생산량 자체도 더 늘릴 수 있었다. 이러한 개선 효과 덕택에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게 된 원인중에 하나로 보기도 한다.

쉽게 전파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노동력이 많아야 하고 관개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모내기를 하는 시점에 물이 잘 들어찬 논이 없으면 그 해 논농사는 망한다. 벼라는 게 물을 많이 먹어서 직파법도 마찬가지로 물이 많이 필요하기는 한데 모내기의 경우에는 특정 시점에 물이 없으면 그대로 망하는지라 훨씬 더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 조선 영/정조 대에 모내기를 허가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상술한대로 모내기 기술 자체는 고려 말기부터 있었지만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영/정조 이전까지는 모내기를 범죄로 보고 처벌했다. 따라서 관개수로가 없는 곳에서는 섣불리 도입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봄에 강수량이 부족한 한반도 기후상 이앙법의 실패는 결국 세금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앙법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데, 이는 삼정의 문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삼정의 문란은 각종 제도나 개혁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못했는데, 이는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4]조선 후기로 가면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도망가던지 아니면 다른 돌파구를 찾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돌파구는 결국 전체 총 생산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특히 겨울농사를 통해 수확한 보리는 세금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지주 또한 소작료를 요구하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농민들에게 이앙법은 크게 환영받게 된다.

그리고 모내기 행위자체가 꽤나 노동 집약적이다. 전체적인 총투입량으로 따지면 직파법보다 일손이 덜 들어가는게 맞는데 모내기 시점에 집중적인 노동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두레등의 마을공동체가 조선 후기에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5]

그러나 이앙법의 단점은 너무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이앙법의 보급으로 생산량은 4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지주들은 이것을 보면서 땅 많은 놈이 장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지주전호제가 확산되기에 이른다.[6] 이때부터 우리 역사에 천석꾼, 만석꾼 같은 대지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지주들은 소작농에게 주는 몫도 아깝게 느끼면서, 노비와 머슴을 이용한 직접 경영이 크게 강화되게 된다. 결국 대다수의 농민들은 빈농으로 전락하게 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임노동자로 전락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양반 역시 이런 대격변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몰락한 잔반들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시기도 이 무렵이다. 결국 이앙법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축으로 볼 수 있다.

3 기타

예전에는 인력이 많이드는 노동력의 산물인 농사법으로 여겨졌지만 요새는 이앙기를 이용하여 진행하기도 한다. 그래도 일손이 많이 가 농촌에서는 다시 직파법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초창기 때 렉이 심해 몹들의 시체를 루팅하려던 캐릭터들이 그 자세로 굳어진 적이 잦았는데, 이 모습이 모내기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모내기렉이라 불렸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에선 어떤 용이 이걸 시전한다.
  1. 참고로 그림에 나오듯이 줄을 대고 일렬로 모내기하는 방식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도입된 방법이다.
  2. 벼의 원산지는 히말라야 부근이고, 아시아의 벼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므로 인간이 일부러 가져와서 재배하지 않았다면 자생적으로 한반도에서 볍씨가 발견될리가 없다.
  3. 주로 겨울에 보리를 심었다.
  4. 당장 균역법이 시행되자 초기에는 지주들의 부담이 증가하고 농민의 부담이 감소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주들이 그 부담을 농민에게 도로 전가시키는 행태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5. 고려~조선 초기에도 엄연히 향도나 두레 같은 조직은 존재하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들 조직이 한동안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6. 광작의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