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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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ustrial revolution, 産業革命

1 개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근대의 시작이 되는 사건. 인류의 본격적인 과학기술 개발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좋은 의미로나, 로나, 전 세계에 격변을 가져다 준 혁명

일반적으로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난 산업의 발전과 그것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변화를 말한다. 보통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북미로 확산되었다고 여겨진다.

백 여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인만큼 전개 과정과 시기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에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1차 산업혁명으로 분류되고,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시작된 것은 2차 산업혁명으로 분류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쉽게 합의나 동의를 얻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한데, 뚜렷하게 변화의 계기나 시작점을 찾을 수 있는 정치분야에 비해서 오랜 세월이 걸리는 산업 경제 분야이기 때문. 일반적인 기준인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증기기관 등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나눈것이라고 여기는 역사가들도 있다. 또한 후술하듯 16~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다양한 진보를 '조기 산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구분도 존재한다.

모든 역사가들이 세계가 전근대랑 영 딴판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현대의 많은 성취와 문제들은 전부 이 산업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쉽게 실감나지 않는 말이지만, 정말로 현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거의 모든 것이 산업 혁명 시기에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배경

2.1 기술과 발명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혁명은 철과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과 증기 기관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나 역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보통 산업 혁명은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기반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좀 더 정확히는 그동안 발전해왔던 과학이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며 기술에 직접 적용되기 시작했다고 봐야한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진보는 숙련공 발명가들의 시행착오와 오랜 경험의 산물이었고, 산업혁명 초기에 과학 이론이 산업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찾아보기 다소 힘들다.


2.1.1 농업 혁명

16세기부터 벨기에플랑드르 지방에서 중세시대의 농경법인 삼포제를 대체하는 4윤작법이 개발된다. 밭을 3분해서 3년마다 한 번씩 밭을 묵히는 삼포제와 달리 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으로, 클로버와 순무가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사료로 사용되어 밭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없는 삼포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농법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찰스 타운센드 자작[1]이 노퍽 지방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보급되며, 이 농업은 노퍽 농업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렇게 혁명적으로 발전한 농업은 후에 영국의 급속한 도시화로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된다. 통상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의 가격이 증가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하는 편이나 당시의 영국은 식량가격이 안정화된 가운데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다. 이른바 맬서스 트랩으로부터 벗어난다.

사족으로 곡물 생산이 늘어 곡물가가 떨어지자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지주들이 18세기 중반 곡물을 진(술)을 생산하는데 투입하는 바람에 영국에는 알콜 중독자가 급증했다. 참고로 곡물 수입을 막는 법인 곡물법을 의회에 압력을 넣어 통과시킨 것은 1815년이었다.


2.1.2 면직물 공업 기계화

영국의 산업을 변화시키는 첫 발걸음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일단 제일 먼저 존 케이가 1733년 '나는 북(Flying shuttle )'을 발명하게 된다. 베틀의 북을 스프링을 이용해 자동화해서 한 번에 짤 수 있는 면포의 너비가 2배 가량 늘어나고 속도 또한 훨씬 빨라지게 된다.[2]

그러자 이번에는 천을 짜기위한 위한 생사가 부족해진다. 그러자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1767년, 한 번에 8개의 실을 자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3]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동력으로 수차를 이용하는 수력 방적기를 발명한다[4]. 또 새뮤얼 크롬프턴은 이 둘을 합친 뮬 방적기를 만들어낸다. 이 셋이 산업 혁명 출발기에 면직물 공업의 혁신을 일으킨 이들로 보통 화자되지만, 사실 토머스 하이즈, 폴, 와이아트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가들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물건을 발명했다. 특히 토머스 하이즈는 아크라이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표절했다고 소송, 승소했다. 게다가 제니 방적기도 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제니라는 이름도 그의 딸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그 덕에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무효가 되어 기계를 마음껏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전국 각지에 수 많은 방직 공장이 설립된다. 참고로, 이 발명들이 있기 전 방적기는 한 번에 한 가닥의 실 밖에 잣지 못했고 수력이 아닌 인력 혹은 축력으로 가동되었다.

어쨌든 방적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이번엔 또 직조능력이 방적을 따라가지 못해 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1785년, 에드먼트 카트라이트가 동력으로 자동으로 천을 짜는 방직기인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 이것을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 연결함으로서 직조능력이 방적능력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방직산업은 자동화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대적인 공장이 처음 나오게 되며, 이때의 공장은 증기기관을 차용하며 물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많아지자 강 주변에 지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량의 목화를 공급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큰 골칫덩이로 목화와 실을 분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이를 빨리 분리시켜줄 수 있던 계면기[5]를 발명했으며 이 기계는 2마력의 수력으로 5000파운드의 솜을 처리해 1000명분의 일을 하게 만들어줬다. [6]


2.1.3 증기기관과 교통수단

1765년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제임스 와트[7]구린 뉴커먼의 기관을 개량해 연료가 적게 들면서 강가나 석탄산지와 먼 곳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증기기관을 발명하였고, 1774년 매튜 볼턴이라는 운명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사업가였던 그는 증기기관의 파워를 한눈에 알아봤고, 특허를 출원하곤 슬슬 관심이 없어지던 와트에게 개량을 종용하고 볼턴앤와트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그 후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이 회사에 증기기관을 주문했고, 이를 이용해 클레몬트란 증기선을 개발했고, 1807년 성공적으로 운행을 완료했다. 클레몬트는 후에 뉴욕 허드슨 강의 승객을 나르게 된다. 이 발전된 수상교통은 영국의 운하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운송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은 증기 기관차의 시운전에 성공하며 내기에도 이겨 몇천 파운드를 땄다. 이를 보고 영국의 기술자들은 트레비식의 것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1825년 요크셔의 석탄광에서부터 스톡턴의 항구를 오가는 43 km짜리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화물철도를 깔았고 이 뉴스는 신속하게 영국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톡턴-달링턴 철도이다. 사업가들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레일로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1830년에는 최초의 여객/화물 겸용 철도인 리버풀 - 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며 철도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8]


2.1.4 제철 공업의 발전

영국은 15~17세기에 이미 해상 강국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나무를 소모해서 16세기 즈음에는 전 브리튼 섬의 산림이 소실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료로 쓸 나무도 부족해져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해와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코크스는 심지어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9]은 탄소함량이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10]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88~18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특히 1779년에는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의 제철 공업의 발전을 증명하는 이정표가 된다.


2.2 사회적 배경

2.2.1 넓은 시장

당시 영국이 밀고 있던 산업은 모직 산업이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특성을 갖춘 직물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었고, 무역에도 적합해 넓은 잠재 시장[11]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시작되려니까 인도에서 수출하는 저렴한 캘리코(Calico) 면직물이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이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시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쓰기 편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갔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수 등을 통해 들어온 캘리코의 인기는 높았다. 즉, 일단 면직물 시장이라는 시장이 생기니, 수요를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영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면직물 산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원면을 마구 거둬들였고, 가격이 저렴해진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여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 발달도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또, 영국은 당시 이미 산업화의 포텐이 터질 만한 큰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곧 산업화라는 새로운 기조에 대해 흥미로워하던 사업가들이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그 성장의 수요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커지게 되었다. [12]


2.2.2 안정적인 국가

이미 전에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등의 혼란을 겪고 명예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은 뒤, 영국의 정치는 매우 안정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해군력은 당시 유럽에서 나폴레옹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고 솔직히 본토 방위에는 해군력 밖에 필요가 없었다. 이에 반해, 유럽은 당장 프랑스 혁명이란 다른 의미의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지주계급 역시 약하지 않았고. 거기다 마지막엔 나폴레옹까지 물리치게 되면서 유럽의 주도권을 쟁취하게 되었다.


2.2.3 지주 계급

농업 혁명에 한발 앞서 장원제가 몰락하고 소작제도가 성행하고 지주ㆍ소작계약을 근간으로한 지주계층이 새로운 유력계층으로 대두되었다.

농업 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농업은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작을 통해 연속경작이 가능하자, 자신의 밭을 지력이 회복될때까지 묵혀둘 필요가 없던 농민들은 차츰 자신의 경작지에서 독립적으로 농사짓는것을 선호하였으며, 대경작지를 지주 본인이 직접 경영하는 것보다 경영 전문가인 차지농에게 임대해주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다.

분업과 직업구성률의 변화가 아직 미미하여 농업이 경제의 근간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주의 권력은 아주 막강한 것이었다. 또한 개중에서 청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관료, 정치인, 학자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위를 얻을 수 없어 상업에 종사하여 중산층 계급으로 발전해 있었다. 농촌 대지주들인 젠트리gentry들은 경제력을 통해 높은 교육 수준과 함께 지역에 따라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세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중상주의를 거쳐 상품 작물과 양모무역을 통해 지주들이 막대한 경제적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의 권한이 왕권보다 강력한 입헌군주정 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높아져만 갔다.


2.2.3.1 인클로저 운동

상세한 내용은 인클로저 운동 참고

소작제도가 대두되고, 농민에 의한 직접경작이 활성화되자 자기 토지를 가지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났다. 장원제 시대에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쓰는 들이나 숲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토지로 두었는데,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자, 이들 땅은 각각의 다른 소유주에게 분할되었다. 분할된 공유지는 모직을 만들기 위해 목축지로 전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농경지로 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공유지의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나자 식량생산량이 증가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더불어 소작의 대두이후 농민층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균일화되었으나, 이후 시장을 잘 활용하냐 못하냐에 따라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차지농인 부농 요먼(Yeoman)이 대두되고, 많은 수의 영세농민들이 이 요먼과의 시장경쟁에서 밀려나 농작을 포기하고 농촌의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생겨났고, 이들은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농촌의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등 농촌 지역의 직업분화를 촉진하였다.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 인구증가, 특히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도시 인구의 증가를 뒷받침했고,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 분화를 통해 직업분화를 촉진시켰다.


2.3 자연적 조건

영국에는 풍부한 노천 탄광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쉽게 석탄 채굴이 가능한 환경은 산업혁명에 있어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다. 게다가 섬나라라는 이점과 더불어 운하 붐이 일어나 어디에서나 바다에 접근하기가 쉬웠다는 점도 크다.

좀 더 이것저것 더 붙인다면,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기술이 발달되지 못한 예전 석탄은 발열량만큼은 목재보다 우수하지만, 불완전연소 때문에 가스도 많이 생기고, 먼지가 묻고, 제련에 사용할 경우 황이 섞여 들어가 질이 떨어지는 철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연로로써 가치가 떨어졌다. 한참 동안 석탄은 산지를 제외하면 런던에서나 쓰던 것인데, 이전부터 산업이 발달하고, 배를 만들어내야 했던 영국이 국내의 목재 자원이 고갈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석탄을 이용하게 된 것.

그런데 석탄은 채굴에 필요한 에너지 투하량이 높고, 영국은 지리적 특성상 갱도에 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다. 요컨대 석탄의 채굴이 어렵기 때문에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이다.[13]

하지만 고질적인 석탄의 문제점인 오염 문제는 화학의 발전으로 코크스를 만듦으로써 해결되어, 목탄의 부족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제철 등 타 산업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게 된다.


3 전개

산업이 왕성히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인구도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도시거주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 보다는 구매를 하거나 공급받는 측이었고 때문에 이들의 인구가 늘수록 농업부양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 무렵 영국은 식량수출국에서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식량 수입대금은 무역흑자로 축적된 무역수지로 지불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면화 수요량이나 수출대금으로 내야할 식량의 수입량에 비해서 면화 생산량이 지지부진하거나 감당못할 수준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였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의 수작업 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구할 수 있게되었다.

이로서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들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14]

특히, 중국에 의해 면직물 산업이 일찌감치 붕괴하고 만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 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다.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3.1 노동 계급 탄생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 농지들이 지주나 차지농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타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 주다 땅크기가 점점 줄어 들었으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도 대토지소유에 한몫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의 대두로 그들과의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농민층은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고 빈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자기 땅의 경작을 포기하고 차지농인 yeoman밑에서 임금을 받고 일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도시에서는 일찍이 도제제도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근로계약이 정립되었다.


3.1.1 노동자들의 고통

이 초기 산업 혁명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 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데 비해, 당시 출산율이 폭증하고 노동 공급은 과도하게 증가하자 노동자의 임금은 기대한 것보다 느리게 증가하였다.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어 관련법 제정이 미비했기에,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특히 여성 노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어린이들도 만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죽곤 했다. 물론 전근대 농촌 사회에서는 걸어다닐 어린 나이부터 일에 동원되는 것이 다반사였던 것이 전통사회였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를 규제하는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었으나,[15][16] 이후 30~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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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사]

미성년 노동자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 하고, 매일 10시간씩 건강을 해쳐가면서 일을 하였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쓰러지면 본인의 과실이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심하면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산업혁명을 겪은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자의 평균 근로시간이 50~60시간이었다.

1760~1830년대 1인당 GDP의 성장률은 상당히 느렸기에[18] 실제 경제성장은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19]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

유럽권의 산업 혁명 뿐 아니라 사실 각국의 산업화/근대화에선 독재정권,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이런 노동자의 고통이 거의 예외 없이 동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개발독재는 워낙 유명하며,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제3공화국 등으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국민들은 항상 힘들었다. 유럽의 근대화에서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갔고, 일본은 근대화 시기에 중금속 오염과 관련된 질병에 걸린 수천 명의 일본인이 죽어갔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한강과 낙동강 등 주요 하천이 오염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수인성 질병으로 죽어갔다.


4 결과 및 의의

위 항목을 잘 읽어봤다면, 산업혁명은 어떤 기계나 기술의 발명으로 뿅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수 백년 간 차곡차곡 쌓여온 기술과 사회적 조건이 모여 어떤 임계점을 기점으로 경제/사회적으로 급속도의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단 맬서스 트랩이 끝장났다.[20]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식량과 재화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으므로 인구가 늘어날수록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후 인구와 함께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도 물가는 안정적이었다.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영국을 본떠 농업 -> 산업 중심의 경제라는 테크 트리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에서 특히 근대 과학의 급속한 발달이 시작되었다. 한편 노동 계급의 대두로 인해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이 발발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서양이 비서양를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산업화 되지 않은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이었다. 유럽의 여러 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성장한 우수한 군사력을 이용해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이미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문명권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우위에 설 수는 있어도 일방적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무굴 제국이나 청나라는 통일된 제국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적인 약세를 양적 우위로 보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로 훨씬 강력해진 유럽은 중세 이래 유지되어 오던 유라시아의 파워 밸런스를 급격히 해체시켜 유럽은 아시아의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세력, 인도세력, 중국세력을 연달아 제압하여 세계의 지배자로 떠올라 빅토리안 시대와 벨 에포크 시대를 열게 된다.
  1. 순무 재배를 너무 열심히 권장한 나머지 '순무 타운센드'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2. 참고로 이걸 발명한 존 케이는 방직공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습격,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어 현재 그의 고향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있다.
  3. 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어 이름은 Spinning Jenny(!)
  4. 이 사람도 방적공들에게 일자리 없어졌다고 공장이 습격당했다.(...)
  5. cotton gin
  6. 그러나 정작 휘트니는 특허를 출원해놓고 소송에 휘말려 이익을 올리지 못하다가, 1798년 소총으로 업종을 전환, 호환식 생산법으로 대량 생산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만악의 근원
  7. 제임스 와트는 원래 수학기구를 만들던 사람이다.
  8. 기묘한 우연으로, 두 도시는 100년보다 조금 더 지난 20세기 후반에 거의 동시에 몰락했다 축구 빼고 하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9. = 선철. 탄소 함량이 2.5~4% 인 철.
  10. 탄소 함량이 0.01% 이하인 철. 유연성이 높아 무르고 잘 부서지 않는다.
  11. 라틴 아메리카 및 인도 등의 영국 식민지.
  12. 이 당시에 영국명예혁명 이래 정치사회가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넓은 해외시장을 확보하였고, 천연자원도 풍부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풍부한 노동력이 확보되었었다.
  13. 그런데 이렇게 초기에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증기기관의 사용으로 늘어난 석탄 채굴량과 증기기관이 소모하는 석탄의 양이 거의 동일했다는 낭설도 있을 정도다. 물론 정말 그랬다면 증기기관은 일찌감치 폐기되었겠지만. 결국 보다 못한 광산 소유주인 제임스 와트가 효율이 좋은 증기기관을 발명해버리고 만 것이다.
  14. 우연인지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역시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본에 지원을 받았다.
  15. 그나마도 최저 연령이 9세로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제한한 정도지만 점점 나아지기는 했다.
  16.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각국에서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법률들이 성립되었는데 개중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은 그 입안과정이 특이했다. 프로이센의 아동노동금지법은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이 국왕에게 건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참모총장 왈 "폐하 제발 아동노동을 금지해주십시오. 애들이 어렸을때부터 하도 부려먹히다 보니 자라질 못해 징집을 해도 애들 몸에 맞는 군복도 없고 총도 못 가눠서 픽픽 쓰러집니다!"(...)
  17. 이와 같은 현상은 180년이 지난 현재에도 개발 도상국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18. 1830년 이전에는 1인당 성장률은 고작 0.3%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1830년 이후 1차대전까지는 1%씩 성장했고, 2차대전 후에는 2%씩 성장했다.
  19. 물론 자본가의 지대추구나 효율임금, 노동시장구조 등에 따른 여러 변수가 있긴 하다.
  20. 사실 맬서스 트랩 항목에 서술된대로 맬서스가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잘못 잡아두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