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시민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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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시민아파트 (金華市民 Apartment)
위치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로8길 159 (舊 충정로2가 67-105)
규모130동 추가바람 세대
입주[1]1969년 4월 21일
철거[2]2015년 8월 2일

2001년 당시 모습

1 개요

한국 최초의 시민아파트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특별시 김현옥 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시민아파트 사업의 첫 번째 결실이다.

2 세대

130동으로 건설되었으며, 세대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처음 19개 동 완공시 세대수는 850세대였고, 이후 1971년까지의 꾸준한 2차, 3차 입주 등으로 총 세대수는 2천 세대를 넘어갔던 걸로 보인다.

19평형과 14평형 두 종으로 나누어 건설되었다. 근데 도찐개찐인 건 변함없다

3 역사

3.1 시민아파트 시대의 개막

1960년대 이후까지 전후 빈민들로 골치를 앓아왔던 서울특별시에서는 이제까지 서민들이 살아왔던 판자집과 달동네를 밀어내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서민들을 수용하고자 헸다.

그 때문에 시민아파트 계획이 수립되었다. 금화시민아파트는 그 첫 주자격으로, 제일 먼저 완공된 프로토타입 포지션의 시민아파트였다.

금화산 판자촌을 밀어내고 그 위에 지었던지라 공사 때부터 토반이 무너져 내려 아래 판잣집 주민들이 깔려죽는 일도 발생했다. 또한 전망에서 청와대가 잘 보였던지라, 왜 이런 곳에 짓느냐는 간부의 질문에 그 유명한 김현옥"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망했다.

여튼 1969년 4월 21일 1차 완공, 입주를 시작했다. 그해 말 2차 입주가 시작되었고, 130동 전체 완공은 1970년~1971년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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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식.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김현옥 서울시장 등을 모시고 치러진 이 행사에는 많은 관료들이 대동해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3.2 수난과 말로

프로토타입답지 않게 사고가 상당했다. 사실 프로토타입 항목에서 보듯이 프로토타입이 더 안 좋다. 근데 시민아파트는 다 안좋은데

환풍시설이 없어 입주 첫 해부터 입주민들이 보일러로 인한 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1970년에는 통풍이 안된다고 입주민들이 문을 다 열어놓고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이전에도 불안은 엄청났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처음 지었을 때부터 수도시설이 빈약했다. 1971년에는 수도 시설을 갖고 패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으니 뭐...

그리고 지은 지 1년 만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시민아파트의 부실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자, 1970년 4월 20일 첫 철거를 시작으로 2002년 즈음에는 시범단지 2개동(3동/4동)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나머지 2개 동은 철거에 대한 철거 발표와 번복이 엄청나게 있었다. 이전부터 나머지 철거 떡밥은 끊임없이 나돌았으나, 시에서도 철거한다 했지만 이내 보상문제 등으로 번복하기 일쑤였고, 재개발지역에 포함시켜도 재개발 등이 무산되서 철거를 못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2007년, 남은 2개 동은 북아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토지 소유주[3]와의 실랑이 끝에 8년을 끌어 2015년 8월에야 철거되었다. 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회현시민아파트가 유일하게 되었다.

3.3 후일담

1970년대-1980년대 금화시민아파트 일부를 철거하고 남은 땅은 개인주택이 들어섰다(...) 이후 1993년 시민아파트 정리사업으로 대부분이 철거되고 난 후에도 남은 땅에는 개인주택이 들어섰고(...) 1998년 3개 동이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다.

이번 철거가 끝난 후 부지에 생태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콘크리트로 뒤덮여 버린 금화산이 조금이나마 제 모습을 찾을 지 기대된다. 그리고 1년이 되가는 동안 철거 현장 그대로 남아있다
  1. 첫 입주일자 기준
  2. 최종 철거일자 기준
  3. 처음에 시영 부지였는데 나중에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