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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냉전과 오일쇼크" 격동의 시대
서기 1970년 ~ 1979년까지를 이르는 연대시기. 1960년대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발전기에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1945년부터 시작되었던 동서냉전 체제가 계속되었던 시기였고 중동전쟁 등 석유파동(오일쇼크)까지 겹쳤던 격랑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탕트 등의 긍정적인 사례도 존재했다. 아타리 2600 등의 게임기를 통해 본격적인 게임의 시대가 도래한 년대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40대 중반~30대 후반이다. [1]
2 정치
2.1 세계
New York City 1970s Part 1 - www.NBCUniversalArchives.com |
미국과 소련의 양강 대결이 이 연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1975년 멸망하는 등 일시적 쇠퇴를 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대 후반에도 오일쇼크와 경제위기, 지미 카터 시절의 이란 이슬람 혁명(호메이니 집권), 이란 대사관 사건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우려하게 했다. 리더십 측면에서도 닉슨의 사임 이래 포드와 카터가 모두 재선에 실패했다. 영국 역시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오일쇼크를 바탕으로 브레즈네프 정권이 그나마 안정된 경제사정을 유지하는 등 일시적으로 호시절을 보낸다. 80년대의 서구(영미)권의 신보수(+신자유주의) 우위와 공산권 붕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달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에게 손을 벌리며 데탕트(화해)를 기획한다. 1971년에 대만(중화민국)을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 때부터 상임이사국으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2년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닉슨이 중공을 방문하고, 중공과 일본 국교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시망
한편 중공은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잇달아 죽고 화궈펑에 의해 4인방이 축출되고 덩샤오핑이 복권되면서 개방의 물결이 시작되게 된다. 대만에서는 장개석이 비슷한 시기(1975년)에 죽고 옌자간에 거쳐 아들 장징궈가 뒤를 잇는다.
포르투갈에서는 철권 독재 정치를 펼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전 총리가 1970년 사망하고 1974년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 전쟁에 참전했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살라자르의 뒤를 이어 독재정치를 펼치던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축출되면서 오랜 극우 독재정권이 붕괴되었고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페인 역시 이듬해인 1975년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고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가 국왕이 되어 왕정이 부활하면서 남유럽의 독재체제가 종식되었다.
반면 칠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군부 쿠데타와 군부 독재와 같은 군부의 정치 개입이 가중화되었고 브라질은 군정이 계속되었다.
1972년 당시 옛 서독에서 열렸던 1972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을 노렸던 범죄사건 검은 구월단 사건이 터져서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이는 여러차례의 중동전쟁으로 표면화 되고, 이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캐나다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친선경기를 벌였던 뉴질랜드의 참가를 허용하자 이에 범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여 불참하는 등 정치적 성향을 거부하고 있던 올림픽 정신이 정치색깔과 인종차별 색깔 등으로 물들게 되는 계기를 낳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 전쟁이 된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헬게이트에 빠진다.
Japan in the seventies (2) 70年代の日本 |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이어서 좌파 투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70년대 일본의 좌파 운동은 내분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고, 그 가운데 적군파처럼 과격한 무장 투쟁으로 대중들의 호응을 스스로 버리고 만다. 한편 경제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좌파 운동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갔다. 경제도 망하고 정치도 우익 일변도인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라고 할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산당이 전성기를 맞고 자민당이 록히드 사건과 오일쇼크로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이 시기였다.(하지만 야권의 분열과 오히라 마사요시의 죽음로 정권을 계속 유지했다.)
2.2 한국
격동의 유신정권 시대, 개발의 시대
사실상 이때부터 남북분단이 완전히 굳어졌다고 봐도 된다. 남북한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된 뒤 태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상 유년기만 보낸 1940~1950년대생들이 이 시기부터 사회 주류가 되었는데 이들의 조국은 1948년에 수립된 단독 정부 대한민국이지 과거의 조선이나 식민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통일에 대한 회의론적인 입장이 증가한 것도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 1990년대 초반부터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1963년부터 집권해온 박정희 정부가 계속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꺾고 3선을 달성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유신헌법 개헌투표에 붙여 91.5% 통과로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본격적인 박정희 정권, 즉 유신의 시대이다.
스포츠에서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북한에 밀려 부진했으나,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에서 처음으로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대한민국에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주었으며 이 때에 들어서 한국 스포츠가 성장기를 거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 게임)를 1970년에 열기로 하였으나 북한의 위협 문제와 경제문제 등으로 반납하게 되었고,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6.25 전쟁의 폐허와 수난 속에서 태어났거나 그 이전에 태어났어도 이 시기 유년기를 보낸 초기 베이비부머, 즉 1940년대생과 1950년대생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온 몸으로 겪었던 1930년대 및 그 이전 세대들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해방, 전후 세대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당시 기성세대들(1910~30년대생)의 기대가 특별히 컸던 편이었고, 이들부터 1960년대 초반생까지를 황금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2]
북한은 김일성 집권기였기 때문에 이 때까지도 남북이 대결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1973년 7.4 남북 공동 성명("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과 적십자 회담을 통해 통해 남북한 UN동시가입까지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성사된 것은 20년 후인 199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직후 1974년까지 북한에서는 주석제와 주체사상이,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이 확립된다. 그리고 1976년 미군 장교들을 살해한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터져서 미군이 출동하고 전쟁 직전사태까지 험악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격랑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김정일로의 세습(계승)이 확정된 것도 이 때.
3 경제
3.1 세계
3.2 한국
1960년대의 경공업 위주에서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점차 변화가 되어갔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를 겪어온 1910년대~1950년대 초반년생들 기성세대들이나 경제계 등에서는 이 때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태동의 시기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경제계 거물인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등의 경제적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여서 이들의 존재가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외채가 급증하고 물가 상승으로 물가 성장이 60년대에 비해 둔화되는 효과를 보였다.
실제로도 당시 경제는 연간 7~8% 이상씩 성장했으며 잘나가는 해에는 12%까지도 성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쉽과 깨어 있는 기업인들과 국민들의 변화 노력등이 가장 컸다. 지금은 사망해서 몇분 남지 않은 당시 기성 세대였던 1900~1930년대생들의 반이기주의 특성도 한몫을 했다.
노동데모가 많이 일어나는 시대였으며, 외노자와 화교들이 급격히 줄어들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초반만해도 200만명이나 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1973년엔 4만명 안팎까지 줄어들었다. 이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노동자들의 점진적인 임금 상승과 내수 경제 활성화 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에도 꾸준한 노동집회와 국민들도 참여하는 정치 집회들로 인해 1980년대에는 국민들의 삶의 질이 더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에는 식량에서도 식량 자급 자족율이 100%를 넘어서 식량에서도 근대화를 일으켰으며, 북한과 1인당 국민 소득도 2배 이상으로 따돌렸다. 1960년대중반만해도 한국보다 잘 살던 북한이었는데, 1973년에 1인당 국민 소득에서 이미 한국과는 비교할 가치가 없는 상대로 된 것이다. 1976년 세계 19위권의 무역국이 되었으며, 78년에는 17위까지 올라가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은 일시적으로 1천 달러를 기록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다시 900 이하로 떨어졌다.(지금 PPP로 따지면 이것도 장난 아닌 수치다. 곱하기 15~20은 차이나니) 한강의 기적 항목 참조. 중화학 중복 투자와 8.3 사채 동결조치 등의 정부주도적인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국가 부도 위기등을 야기하며 큰 한계를 보였지만, 결국 부가세 문제와 함께 신민당이 득표 1당이 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만다. 하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1980년대초에는 세계 10위권대 무역국이 되었으며, 국민들의 삶이 질이 최상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원자력 발전 정책으로 인해 1978년 고리 원자력 발전소이 첫 가동되는 성과가 나타났다. KAIST의 성립 등 과학기술, 공업의 집중 투자가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또한 컴퓨터와 금융권 전자화가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4 문화
4.1 음악
비틀즈가 1970년 해체하게 되면서 영미권 팝음악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비틀즈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한 롤링 스톤즈와 더 후는 60년대에 이어 큰 인기를 기록하게 되고, 핑크 플로이드 역시 70년대 들어 음악이 성숙하면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나 <The Wall>같은 역작을 탄생시켜냈다. 60년대 말에 데뷔한 레드 제플린이 70년대의 슈퍼 밴드로 부상하게 되고, 프로그레시브 록과 하드록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다. 블랙 사바스나 딥퍼플과 같은 밴드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한편 70년대 후반이 되면 실질적으로 하드 록과 함께 록의 큰 흐름을 양분하는 펑크 록이 섹스 피스톨즈 등에 의하여 화려하게 등장한다. 엘튼 존은 70년대 당시 대표하던 뮤지션 중 하나로 1976년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었다.[3] 70년대 말에는 디스코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일렉트로니카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 시대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등의 전자음악을 실험한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크라프트베르크 등의 테크노의 조상 뻘 되는 크라우트록 그룹들이 등장하였으며,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앰비언트가 태동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7080 세대들의 노래가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 들어서 나훈아-남진의 라이벌 구도와 태진아 등의 트로트 가수들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국민가수이자 가왕 조용필이 이 시기에 데뷔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크게 히트시켰고 그는 그렇게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전설이 되었다.
한편, 한국에서도 신중현에 의해 록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음악을 한 것으로 칭송받는 산울림이 전설로 남은 초기작들을 발매하였다.
중화민국에서는 외성인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등려군이 가수로서 주가를 올려가고 있었다.
4.2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를 필두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다. 1977년 <스타워즈>가 개봉하면서 20세기 가장 히트한 영화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4.3 방송
코미디언 이주일이 이 연대들어서 처음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외에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송해, 한무 등 역대 원로 코미디언들의 활동도 왕성했던 시기였다. 동시에 TV가 널리 보급되어 라디오의 지위를 추월한 것도 이 시기였다.
동쪽의 섬나라 일본에선 코미디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전국구를 나와바리로 삼았던 최고의 전성 시대다. 도쿄발 버라이어티 방송이 전국을 장악했던 시대이기도 하며 이것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도리후. 당시 오사카와 요시모토 흥업은 쪽도 못썼다
서쪽의 섬나라 영국에선 몬티 파이톤이 시대를 초월한 병맛개그를 시전하고 있었다.
5 대중문화 속의 70년대
시대적으로 마루코는 아홉살의 배경이기도 하다. 사실 60년대 후반의 배경인검정고무신이 컨셉이나 그림체를 따다왔으나 두 나라의 경제적 차이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