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약조

己酉約條

1 개요

광해군 1년이던 1609년에 임진왜란 이후 10년 동안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선 조정과 쓰시마 다이묘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

2 배경

임진왜란 이후 정권을 잡은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1]는 외교적 고립 타파 및 자신의 권위 확립을 이루기 위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재개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관계 재개를 위해 이에야스가 물밑작업을 맡긴 것은 일본 내에서 누구보다도 조선에 대해 잘 아는 쓰시마의 영주. 당연히 일본의 외교 관계 재수립 요청에 대하여 조선 조정이 보인 반응은 처음엔 냉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새로 실력자로 등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과, 명나라가 몰락해가고 후금의 비상이라는 국제질서의 재수립 속에서 조선도 맹목적으로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해나가기는 곤란했고, 치열한 찬반논란 끝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재수립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던 만큼 전제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①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② 왜란 중 조선의 왕릉을 도굴한 일본인들을 압송할 것, ③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2]를 송환할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조건에 비상이 걸린 것은 쓰시마 측. 특히 1번과 2번 항목이 문제였는데, 1번 항목의 경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에 대한 사죄를 도쿠가와 가문이 하겠는가(...) 그렇다고 천황에게 사과문 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2번 항목의 경우 전쟁이 끝난 지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 범인을 어디서 찾겠는가(...) 그렇지만 국교 재개가 실패하면 경제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쓰시마였기 때문에 쓰시마 영주는 어떻게는 이 난관을 돌파해야 했고 이런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주작(...) 막부의 도장을 조작하여 국서를 맘대로 바꿔치는가 하면, 잡범을 도굴범으로 둔갑시켜 조선에 송환하는 패기는 실로 흠좀무.[3] 특히 도장 조작을 통한 국서 바꿔치기의 경우 일회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해야하는 악순환의 시작점이었다.[4][5] 위조된 문서와 도장이 현재 이즈하라 항 부근에 있는 대마도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어쨌든 쓰시마의 기지(?) 덕분에 조약은 순조롭게 체결된다.

3 내용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약 체결에 대해 포괄적으로 평가하고 세견선만 밝히고 있으며, 조약의 내용이 수록된 문헌으로는 《통문관지 通文館志》·《증정교린지 增正交隣志》·《변례집요 邊例集要》·《고사촬요 攷事撮要》·《접대왜인사례》·《대마도문서 對馬島文書》 등이 있는데 명칭과 내용 등이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쓰시마 번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2. 쓰시마 번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3. 일본인으로써 조선 조정에게 관직을 제수 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한다.
4.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5. 쓰시마 번주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6.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7.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

이러한 조약의 내용은 세종대왕 시기 체결된 계해약조와 비교하면 일본측의 권한이 축소된 편이었다. 또한 이후[6]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에도로 파견되기 시작한다.[7]
  1. 물론 당시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이기는 했지만 실권은 이에야스가 아직 쥐고 있었다.
  2. 이들을 한국에서는 납치되었다는 의미에서 피로인이라고 부른다. 반면 일본은 그들의 자발적 귀순의지를 강조하는 도래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3. 도굴범 송환의 경우 불과 6개월만에 이루어져 송환을 요청한 당사자인 조선 조정 조차도 '이렇게 빨리 잡았어?'라며 놀랄 정도였다. 이 잡범들의 운명이 참으로 고약한데 도주가 조선에 가서 잘 말하면 니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겠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 무지막지한 고문과 혹형을 당하고 억울하다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기록이 실록에 그대로 남아있을정도다. 조정에서도 이들이 도굴범이 아니라는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려주기도 그렇고 어차피 왜적이면 조선의 적이니 참하라는 명령에 모두 참수당한다. 안습(...)
  4. 에도 막부의 국교 재개 요청에 대해 조선 조정이 답장을 보낼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답장의 내용을 보면 쓰시마가 장난을 친 게 밝혀질 테니 조선 조정의 답장도 쓰시마가 주작해야 하는 것은 필수(...)
  5.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결국 숙종 때에 이르면 이런 주작질이 걸린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과 에도 막부 모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적당히 하급 실무자 몇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눈감고 넘어가준다.
  6. 정확히는 광해군 때부터 순조 때까지.
  7. 조선만 통신사를 파견한 것을 가지고 조선이 사죄와 배상으로 조공을 하러왔다라는 주장을 하지만 조공을 위한 사신이었으면 처음 통신사가 파견됐을 당시 '상장군(오고쇼)'라는 경칭으로 불리면서 여전히 실권을 유지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몇 백 km를 달려나와 통신사 일행을 마중했겠는가..심지어 통신사 일행에게는 그 당시 일반인들은 통행이 금지되고 오로지 쇼군만이 쓸 수 있던 길을 통해 에도로 갈 수 있는 특권까지 주어졌다. 조선만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어디까지나 임진왜란 직전 해에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들이 각종 염탐행위를 해서 이것에 데인 조선 정부가 스스로 일본 사신들을 거부한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