倭館.
1 경상북도 칠곡군의 지명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현재 칠곡군청 소재지이며 지천면, 석적읍,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과 접한다. 2에서 나온 지명으로, 본래 왜관이 약목면 관호리에 설치됐는데 1904년에 경부선 철도가 설치되고 왜관역이 건설되면서 점점 이 일대를 왜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4년에 파미면과 노곡면을 합쳐 왜관면으로 개편하였고, 1949년에 왜관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석적면 아곡리를 편입하였다.
조선시대 왜관은 지금의 왜관읍 맞은편인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다고 한다.
2 조선시대 국내 일본인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설치된 행정 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요새로 치면 상공회의소와 대사관을 합쳐 놓은 개념이다.[1]
고려 말기에 왜구가 날뛰자 정부는 유화책으로 오늘날의 진해[2]와 울산[3], 부산[4] 근처의 항구를 개항해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왜관을 두어 행정 사무 등을 처리하게 하였다. 삼포왜란 이후에는 진해에만 왜관을 두었고 1541년에 조선의 포졸들과 쓰시마인들이 싸움을 벌이자 진해의 일본인을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1678년이 되면 부산포에서 초량[5]으로 왜관을 이전했다. 왜관 주변엔 돌담을 쌓고 거류민들의 주택과 시장, 창고, 관청 등이 위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가면 교역량이 감소한다. 양국 모두 쇄국정책을 쓰게 되고, 그 뒤 일본은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조선 초기 왜관의 규모는 부산포왜관이 1494년에 일본인 450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진해에 위치한 내이포왜관이 가장 컸는데 1494년에 2,500명 정도가 살았다. 울산에 위치한 염포왜관은 150명 정도 수준. 한양에도 조선을 방문한 다이묘나 상인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상설은 아니었고 동평관(東平館)이란 이름이었다. 현재의 충무로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에도 막부와 관계가 복원되면서 왜관은 다시 나타난다. 1607년 현재의 부산 동구 좌천동 부근에 1만평 규모의 왜관이 위치했는데 술집과 일본식 주택이 지어졌다. 건설을 추진한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주였다. 당시에 이 부근이 교통이 불편한 탓에 쓰시마 번주는 계속 이전을 요청했고 1673년 허가가 나서 1678년에 현재의 중구 남포동 용두산타워 근처의 초량왜관으로 옮긴다. 규모는 약 10만평 수준이었다고 한다. 신왜관(新倭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신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려 온 유학생이나 한의학을 배우러 온 일본인도 있었다. 1727년 쓰시마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6]가 한국어를 배우는 기관을 세웠는데, 우수한 학생은 왜관으로 보내 공부시켰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화. 이 사람은 중화사상에 빠져서 툭하면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옷차림만 봐도 일본인의 복식이 아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