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후금에서 넘어옴)
만주의 역사
고대중세근세근현대
명나라북원
만주족
후금
청나라
청나라러시아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1616년 ~ 현재
1616
~
1912
후금(後金)
다이칭 구룬/대청(大淸)
,태평천국(太平天國),
1912
~
1949
중화민국(中華民國)
중화제국(中華帝國)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
중화민국(中華民國)
왕징웨이 정권(汪精衛政權)
1949
~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중화민국(中華民國)
대청국
大淸國
국기국장

[1]
1616년 ~ 1912년
국가공금구(鞏金甌)
위치만주, 중원, 몽골
위구르, 티베트, 대만[2]
수도혁도아랍(赫圖阿拉)
1616년 – 1621년
요양(遼陽)
1621년 – 1625년
성경(盛京)
1625년 – 1644년
순천부(順天府)
1644년 – 1912년
정치 체제전제군주제
국가 원수황제 /한[3]/ [4]
주요 황제초대 천명제
(1616-1626)
2대 숭덕제
(1626-1636)
4대 강희제 (1661-1722)
5대 옹정제 (1722-1735)
6대 건륭제 (1735-1796)
12대 선통제 (1908-1912)
주요 사건('건국 이후' 문단 참조.)
언어만주어, 한어, 티베트어,
몽골어, 위구르어
민족만주족, 한족. 몽골족
종교불교, 유교, 도교
통화위안(1899년 부터)
성립 이전명나라
멸망 이후중화민국
타이완 민주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홍콩
마카오

[5]

1 개요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이 세운 유목민계 정복 왕조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

유목민계 정복왕조 역사상 최대의 포텐셜(영토ㆍ패권)을 터뜨렸으나 모든 왕조들이 그러하듯 막판엔 최악의 굴욕을 겪은 왕조

강희의 수신제가(修身齊家)[6], 옹정의 치국(治國)[7], 건륭의 평천하(平天下)[8][9]

중국의 통일왕조 중 왕통의 중단 없이 가장 오래동안 존속한 왕조다.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정식 국호는 다이칭 구룬[10](만주어독음)이며 한자로는 대청(大清; 한자병음: Dà Qīng(다칭))이다. 당대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the Great Qing)으로 불렸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한자병음:Qīng Cháo(칭 차오),영어: Qing(Tsing) Dynasty))하고 불리고 있다.

국명이 지명이나 종족명에서 딴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인 이유는,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했다는 의미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1] 17세기 초인 1616년 만주에서 건국되어, 1644년 중국 본토에 입관(入關)했고, 이후 20세기 초인 1912년신해혁명까지 300여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리고 1917년 복벽운동으로 잠시 부활하기도 했다.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물론 음차만 갖다 쓴 것이고 신라와 연관성이 없다.

2 역사

2.1 건국 이전까지

옛날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추장 중 하나였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민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금을 잇는다는 의미로 아마가 아이신 구룬(Amaga Aisin Gurun), 중국식 국호로 후금(後金)이란 나라를 세웠으며, 청이란 이름으로 일어선 건 그 아들인 청태종 때부터다.

사실 임진왜란 때의 많은 대외파병과 썩은 정치, 명 4대 암군의 대활약 등이 있었음에도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도 청나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공성전을 하다가 전사할 정도였으니(…)[12] 명이 멸망한 이유는 청 때문이 아니라 이자성의 반란 때문이다. 사실 타이밍과 운도 정말 좋았다.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명나라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던 상태에서 부패한 명 관료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최신 화기와 신식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13]를 포함해 상당한 숫자의 명군을 운좋게 얻는다. 더구나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14]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력이 상승하기 전에 이자성 등이 개판을 만들어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 북경 점령 과정을 보면 천운[15]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명나라의 경우엔 파업 황제(...) 등의 위기를 무지막지한 제도 개혁과 부유함으로 막아내던 사정인지라(...)[16] 그러나 사실 청도 부유하기는 했다. 만난 적들이 명과 다르게 시대를 앞선 유럽이라서 문제였지.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도 있다. 만주 시조 신화 참조.

2.2 건국 이후

위에서도 말했듯, 운이 꽤 좋은 나라[17]였는데, 청태조에 이어서 청태종, 산해관을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18]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방으로 계속적으로 침략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위구르, 내몽골, 만주와 현재 러시아로 넘어간 투바,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 때였다.[19]

주요사건
1616년 후금 건국
1619년 사르후 전투 발발
1626년 영원성 전투 발발
1636년 대청 선포
1641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전
1644년 중원 통일
1646년 이자성의 난 종결
1658년 나선정벌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발발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발발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발발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6년 –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발발
1858년 아이훈 조약 체결
1884년 – 1885년 청불전쟁 발발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 발발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발발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멸망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청말민초 이래 캐발살내어 지금 중국이 다시금 확보하고 있는 내몽골, 티베트위구르만이 아니라 연해주 즉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타이완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원나라랑 비교해서 어디가 더 넒은지 추가 바람.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한만제국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지역 및 민족마다 청황제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으로, 북방의 몽골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과 남방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위구르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키메라의 제국"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문명을 볼 때 학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제조 금지 등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크게 보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해전에서도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20] 당시 만주인들을 봐도 문명을 이끄는데 아무래도 유목민의 기풍과 문화가 있어서 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21] 사실 세계의 유목민 왕조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경우들이 매우 많다. 일단 정주 국가들의 경우 지배층들이 문명을 주도하며 여러 가지 것들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는데[22], 유목민들은 정작 지배층인 유목민들이 직접 문물 발달에 기여하는 게 적은 편이었다.[23] 보통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교류를 확산시켜 기여를 했다거나 하는 간접적인 식이고 유목민들이 직접 과학기술 혹은 수학과 관련된 서적을 쓰거나 하는 일들은 적었다.[24] 아무래도 지배층들이 문명에 직접 기여하는 것들이 적으면서 밑에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그 열매를 가져가니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잠재력을 깎아먹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온다.[25] 쉽게 설명을 하자면, 싸움을 아주 잘하는 일진이 애들을 다 두들겨 패고 반을 장악해서 이끌어 나간 것과 같은데 실제로 발전을 시켰을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공부를 잘한 반장이 발전시킨 반에 비하여 본인이 한 짓들[26]도 있고 직접 한 게 없다보니 욕을 먹는 거라고 보면 된다.

다중수도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특히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관련 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이하 청-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겼냐 하면, 청-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고, 결국 청-러 조약은 평등조약이 되었다.[27]

즉, 중국적 중화 세계 개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돼 버린 것. 이 때문에 청-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한문 기록이 전무하고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조약의 체결 자체에도 한족 관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청-러 조약이 만주어로 기록되어 전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이는 청조가 청-러 조약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는 '대등'이나 '평등'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나 어휘를 없애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입증된다.[28]

일단 만주족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이며, 초기에 들어왔을 땐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특히 강남쪽에서는 사람이 나날이 잔뜩 죽어 나갔다. 지금의 양저우(楊州)나 쑤저우(蘇州) 등이 있는 지방에서는 수십만 단위로 대학살이 저질러졌다고 한다. 흠좀무. 특히 만주족이 강요한 변발은 19세기 말 조선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켜 강남은 말그대로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양저우 대학살은 양주십일 이라고 하여 김용무협소설 녹정기에서도 나온다. 링크의 3) 항목을 읽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각지에서 어마어마한 인구가 학살당해서 명청교체기 대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중국 인구사와 청나라 시기 인구를 생각하면 5,000만이라는 수치는 매우 과장이 되어 있다. 근거도 빈약하며 주장하는 사람들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으로 솔직히 만주족이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 시대를 능가하는 학살 수준에 한족의 인구의 증감을 봐도 가능성이 별로 없다. 현실에서는 만화나 애니처럼 대규모로 사람을 죽이거나 인공물을 파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쉬웠으면 진작에 온갖 민족과 사료가 사라졌을 것이다. 인구 조사 결과가 적은 것은 건륭제 시기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과 그로 인한 만주족 행정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이 벌어진건 확실하다.

이 모든 저항을 짓밟은 이후 간신히 굴복한 한족에게 융화정책을 펴 한족에 대한 차별을 계속해서 없애나가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였으며, 그 뒤에도 저항이 있긴 했는데 훌륭한 황제들이 나와 당근과 채찍으로 차례차례 강온양면술을 써가며 통치해나갔다. 다만 변발(황비홍 머리(...))만은 철저히 지키게 했다. 이는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의 습관을 인정해줄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묻혀서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29] 비록 언어나 문화면에서는 동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나라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멸청흥한(滅淸興漢,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이니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이니 하는 구호에서도 한족과 청(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3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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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30] 르 프티 주르날, 1898

청은 문자의 옥과 화기의 연구제조 금지 등으로 발전이 거의 없었다. 유럽 문명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는데 청은 유럽 문물을 수입하기 전에 보유한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명나라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이할 정도의 말타기와 활쏘기에 대한 집착 혹은 자체적인 화기 연구 금지[31] 등으로 내부 역량을 떨어뜨렸다.[32]

멸망의 원인은 시기적으로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질만큼 터지고, 빼앗길만큼 뺏기고, 심지어, 무시하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을 당하는 등 외세의 침략이 원인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거의 반쯤 식민지로 전락했는데 이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 이상 과거처럼 통치를 할 수 없게 변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민족 침략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청 왕조는 지방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창을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서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 정부와 체결한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우대조건>
1.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청 황족 대우조건>
1. 청나라 왕공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각족대우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부의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서 행세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사망등 국내외적인 혼란으로인하여 복벽운동으로 1917년 7월 10여일동안 다시생기는 일이있었으나 복벽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북양군벌 정부에 실질적으로 귀속되었다.

그러나 북양군벌 정부는 청실우대조건을 지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부의는 1924년 10월 군벌에 의해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1924년 11월 5일에 청실우대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의는 천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개석은 부의가 천진에 남는다면 청실우대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도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부의는 거절한다. 게다가 북벌군이 북평을 점령한 다음에 군벌 손전영이 벌인 서태후 능 도굴사건을 비롯한 청나라 역대 황족들에 대한 능묘 약탈이 처벌당하긴 커녕 오히려 방조되었고 서태후의 능묘에서 나온 진주들이 송미령의 신발을 장식하게 쓰였단 말에 소문에 부의는 남경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결국 그 달 10일에 부의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그럴리가.

3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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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일반적으로 알려진 청의 강역. 그러나 이 강역은 청의 최대 영토는 아니다. 러시아에게는 연해주, 이리 지역(일리강 유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영국에게 홍콩카슈미르를 상실한 1896년의 지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 제국에게 타이완 섬도 할양하였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 몽골(외몽골)+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을 포함하는 영역으로 현재 중국의 국경선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이것은 중국의 역대 국가들중 두번째로 넒다.[34] 외몽골 및 투바, 티베트, 신강은 건륭제 때 확보한 영역들로 원래 준가르의 영역이었으나 이 준가르를 멸망 시킨 후 차지했다.


이 지도는 청나라가 근대적인 조약을 통해 확정한 영토다. 원본이 올라와있는 사이트로 들어가면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단 사할린[35][36]과 우다[37] [38] 강 주변 등은 신빙성이 낮다.[39] 물론 하바로프스크 등 북만주는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 중국이 차지한것이 맞는 엄연한 청의 영토였다. 연해주의 경우는 원래부터 함경도와 함께 만주족의 발상지라서 후금 시절부터 청나라가 차지해 왔고 봉금 정책으로 인해 외만주라 부르며 한족의 출입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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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이 제외된 강역.

4 문화

이 시대의 문학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이 대표적이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고, 스스로 조상을 신라로 꼽았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뿌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썩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우리식의 성씨본관을 떠올리면 쉽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40]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金, 쇠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참고로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려다 보니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사로=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족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41]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하며, 제국주의 시대 중국이 근대화에 진입하지 못하고 열강들의 능욕을 당한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초기 황제들은 전투민족 답게 우락부락하고 강건하게 생겼지만, 청 후기의 황제들(도광제 부터)은 얄팍하고 비리비리한 체형이 대다수며 심지어 거의 단명했다. 또한 청의 12명의 황제 중 5명[42]이 10살이 되기 전에 황제로 즉위했다.

5 상징

5.1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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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국기. 용이 길가다 쿵해쪄

국기의 이름은 황룡기(黃龍旗)이며 1889년부터 신해혁명(1912년) 때까지 사용되었다.

5.2 국가 (國歌)

국가는 공금구(鞏金甌)로, 견고하게 빛나는 상배라는 뜻이다. 1911년에 제정되었으나 청나라가 1년 후에 망해버렸다(...) 대한제국 애국가도 5년은 쓰였는데...

가사독음의미
鞏金甌(공금구)Gǒng jīn'ōu 궁 진어우국토를 금잔[43]처럼 단단히 하고
承天幬(승천주)Chéng tiānchóu 청 톈처우하늘의 덮임을 받아들이라[44]
民物欣鳧藻(민물흔부조)Mínwù xīn fúzǎo 민우 신 푸짜오만물 백성들은 물 속에서 장난치는 오리들처럼 기뻐하라.
喜同胞(희동포)Xǐ tóngbāo 시 퉁바오동포를 기쁘게 마주하며,
淸時幸遭(청시행조)Qīng shí xìngzāo 칭 스 싱짜오태평성대에 행복하니,
眞熈皞(진희호)Zhēn xī hào 전 시 하오모두가 화목하리.
帝國蒼穹保(제국창궁보)Dìguó cāngqióng bǎo 디궈 창충 바오제국은 하늘의 보우[45]를 입는다.
天高高(천고고)Tiān gāogāo 톈 가오가오하늘을 날로 높아가고,
海滔滔(해도도)Hǎi tāotāo 하이 타오타오바다는 끝없이 세차게 흐른다.

6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제외된다.
  • 시호는 각주로 병기하되 만주식과 중국식의 순서로 한다.
  • 한호는 만주식 군주 칭호, 칸호는 몽골식 군주 칭호이며 연호는 00제로 알려진 중국식을 먼저 쓰고 만주식을 뒤에 쓴다. 세조 때부터는 한호가 연호 + 한(ex : 순치제는 이지슌 다산 한, 강희제는 얼허 타이핀 한)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생략한다.
  • 국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는 생략한다.

6.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대수묘호연호시호한호칸호즉위년일퇴위년일재위기간능호
01태조(太祖)천명(天命, 1616~1626)[46][47][48]-누르하치(努爾合赤)1616.2.171626.9.3010년 225일복릉(福陵)
02태종(太宗)천총(天總, 1627~1636.3)[49][50][51][52]홍타이지(皇太極)1626.10.201636.5.159년 208일소릉(昭陵)

6.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대수묘호연호시호칸호즉위년일퇴위년일재위기간능호
02태종
(太宗)
숭덕(崇德, 1636.4~1643)[53][54][55]홍타이지(皇太極)1636.5.151643.9.217년 129일소릉(昭陵)
섭정성종
(成宗)
-[56]-도르곤(多爾袞)1643165014년-
03세조
(世祖)
순치(順治, 1644~1661)[57][58][59]풀린(福臨)1643.10.81661.2.517년 120일효릉(孝陵)
04성조
(聖祖)
강희(康熙, 1662~1722)[60][61][62]히오완예이(玄燁)1661.2.51722.12.2061년 318일경릉(景陵)
05세종
(世宗)
옹정(雍正, 1723~1735)[63][64][65]인전(胤禛)1722.12.271735.10.812년 285일태릉(泰陵)
06고종
(高宗)
건륭(乾隆, 1735~1795)[66][67][68]훙리(弘曆)1735.10.81796.2.960년 124일유릉(裕陵)
07인종
(仁宗)
가경(嘉慶, 1796~1820)[69][70][71]용얀(顒琰)[72]1795.2.91820.9.224년 206일창릉(昌陵)
08선종
(宣宗)
도광(道光, 1821~1850)[73][74][75]민닝(旻寧)[76]1820.10.31850.2.2529년 145일모릉(慕陵)
09문종
(文宗)
함풍(咸豊, 1851~1861.7)[77][78][79]이주(奕詝)1850.3.91861.8.2211년 166일정릉(定陵)
10목종
(穆宗)
동치(同治, 1862~1874)[80][81][82]자이슌(載淳)1861.11.111875.1.1213년 62일혜릉(惠陵)
11덕종
(德宗)
광서(光緖, 1875~1908)[83][84][85]자이티얀(載湉)1875.2.251908.11.1433년 263일숭릉(崇陵)
--보경(保慶, 1899)--푸쥔(溥儁)1899
(1년 미만)
-
12공종
(恭宗)
선통(宣統, 1908~1912)(1917)[86]-[87][88]푸이(溥儀)[89]1908.12.21912.2.123년 72일없음 [90]

7 종합

대수묘호연호시호칸호즉위년일퇴위년일재위기간능호
시조
(始祖)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조조
(肇祖)
-[91]-먼터무(孟特穆)1405143338년-
--[92]-충샨
(充善)
1433146770년-
--[93]-톨로
(妥羅)
1467148128년-
--[94]-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152243년-
흥조
(興祖)
-[95]-푸만(福滿)1522154224년흥경릉
(興景陵)
경조
(景祖)
-[96]-기오창가
(覺昌安)
1542157133년-
현조
(顯祖)
-[97]-탁시
(塔克世)
1571158314년흥릉(興陵)
01태조
(太祖)
천명
(天命, 1616~1626)[98]
[99][100]누르하치
(努爾合赤)
1616.2.171626.9.3010년 225일복릉(福陵)
02태종
(太宗)
숭덕
(崇德, 1636.4~1643)[101]
[102][103]홍타이지
(皇太極)
1626.9.301643.9.217년 129일소릉(昭陵)
섭정성종
(成宗)
-[104]-도르곤(多爾袞)1643165014년-
03세조
(世祖)
순치
(順治, 1644~1661)[105]
[106][107]풀린(福臨)1643.10.81661.2.517년 120일효릉(孝陵)
04성조
(聖祖)
강희
(康熙, 1662~1722)[108]
[109][110]히오완예이(玄燁)1661.2.51722.12.2061년 318일경릉(景陵)
05세종
(世宗)
옹정
(雍正, 1723~1735)[111]
[112][113]인전(胤禛)1722.12.271735.10.812년 285일태릉(泰陵)
06고종
(高宗)
건륭
(乾隆, 1735~1795)[114]
[115][116]훙리(弘曆)1735.10.81796.2.960년 124일유릉(裕陵)
07인종
(仁宗)
가경
(嘉慶, 1796~1820)[117]
[118][119]용얀(顒琰)[120]1795.2.91820.9.224년 206일창릉(昌陵)
08선종
(宣宗)
도광
(道光, 1821~1850)[121]
[122][123]민닝(旻寧)[124]1820.10.31850.2.2529년 145일모릉(慕陵)
09문종
(文宗)
함풍
(咸豊, 1851~1861.7)[125]
[126][127]이주(奕詝)1850.3.91861.8.2211년 166일정릉(定陵)
10목종
(穆宗)
동치
(同治, 1862~1874)[128]
[129][130]자이슌(載淳)1861.11.111875.1.1213년 62일혜릉(惠陵)
11덕종
(德宗)
광서
(光緖, 1875~1908)[131]
[132][133]자이티얀
(載湉)
1875.2.251908.11.1433년 263일숭릉(崇陵)
임시-보경
(保慶, 1899)
--푸쥔(溥儁)18991899-
12공종
(恭宗)
선통
(宣統, 1908~1912)
(1917)[134]
-[135][136]푸이(溥儀)[137]1908.12.21912.2.123년 72일없음 [138]

7.1 항렬

강희제 시대에 아들 대의 항렬자가 윤(胤: 또는 允)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옹정제의 휘 윤진(胤禛)에서 나타난다. 손자 항렬은 홍(弘: 건륭제), 증손자 항렬은 영(永) 또는 우(顒: 가경제)로 정해졌다. 건륭제 대에 와서 손자대 항렬로 면(綿) 또는 민(旻: 도광제)이, 증손자대 항렬로 혁(奕: 함풍제), 고손자대 항렬로 재(載: 동치제, 광서제)가 정해지고, 도광제 대에 추가로 부(溥: 선통제), 육(毓), 항(恒), 계(啟)가, 함풍제 대에 그에 덧붙여 도(燾), 개(闓), 증(增), 기(祺)가 추가되었다. 1938년에 애신각라씨 족보를 수속(修續)함과 동시에 부의는 경지개서(敬志開瑞),석영원성(錫英源盛),정조무상(正兆懋祥)의 12글자를 더 추가했다.

청나라 종법상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였지만, 청나라 말기에 동치제 다음으로 항렬이 부(傅)인 사람이 황위에 올라야 했지만, 동치제와 항렬이 같은 광서제가 서태후에 의해 동치제 다음 황제로 옹립되면서 이 원칙이 깨지게 된다.

7.2 계보

추존황제
현조 탁시
1.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2.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3. 아이신기오로
풀린
4. 아이신기오로
셴예
5. 아이신기오로
인전
6. 아이신기오로
훙리
7. 아이신기오로
용얀
8. 아이신기오로
민닝
9. 아이신기오로
이주
혁현혁종
10. 아이신기오로
자이슌
11.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재풍재의
12. 아이신기오로
푸이
아이신기오로
푸쥔

7.3 추존 황제

묘호시호이름재위기간[139]능호비고
시조(始祖)-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태조 추숭, 만주족 시조
조조(肇祖)원황제(原皇帝)먼터무(孟特穆)1405~1433-태조 추숭, 태조의 6대조
-순황제(順皇帝)충샨(充善)1433~1467-태조 추숭, 태조의 5대조
-흥황제(興皇帝)톨로(妥羅)1467~1481-태조 추숭, 태조의 4대조
-정황제(正皇帝)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1522-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흥조(興祖)직황제(直皇帝)푸만(福滿)1522~1542-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경조(景祖)익황제(翼皇帝)기오창가(覺昌安)1542~1571-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현조(顯祖)선황제(先皇帝)탁시(塔克世)1571~1583흥릉(興陵)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성종(成宗)무덕수원광업정공안
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
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
(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세조 추숭, 태조의 14자
-보국공(輔國公)푸쥔(溥儁)--서태후에 의해 보경제(保慶帝) 잠칭. 곧 폐위

8 대외관계

8.1 명(明)

명과는 후금 건국 당시부터 줄곧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의 국력이 쇠하고 정정불안이 가속화하자 먼저 조선을 침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명을 압박, 결국 이자성의 난을 계기로 명이 멸망하자 남진하여 명의 영토를 접수하였다. 이후 남명 정권이 토벌되면서 명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청 말기의 쑨원같은 혁명가들이나 반청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마라타 연합이 무굴제국에 독립을 선포하듯이?

8.2 조선

군신관계 하나만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관계로 보자면 좀 다르다.

처음에 이성계가 고려 변경에 살아서 고려인들이 이성계를 여진족 취급한 적도 있지만 정작 조선을 세운 뒤에 제일 먼저한게 여진족 혼내주러 가는거였다.(...) 세종대왕이 원래 여진족의 땅이었던 함경도개척한 적도 있고 수시로 침략예방전쟁[140]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을 돕겠다고 선언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선조는 여진 문제에 있어서는 잘 대처했다

광해군 때는 조선이 등거리 외교노선을 지켜 상대적으로 적대감이 줄어들었으나 뒤이어 인조반정이 발생해 인조가 즉위하고, 숭명, 배청(排淸) 노선을 주장하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여 조선에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서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오수창 교수 등에게 지적되었듯이 청태종의 칭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측에서는 겉으로는 배금을 하는 듯하였으나 웬만한 청의 요구는 상당수 들어주었으며, 조선의 외교보다는 청의 내부적 정세가 전쟁의 원인으로써 꼽힌다. 양팔셔틀

결국 만주지역의 대기근으로 인한 그나마 시도하려했던 농업지역에 대한 대타격과, 50-100만에서 최소 200-250만까지 늘어난 청나라의 인구, 명과의 무역중단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써의 경제적 이유와 몽골족을 굴복시키고 요동지역의 한족 등을 흡수하며 신장된 국력과 홍타이지의 누르하치보다 강경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결국 1627년에 1차로 정묘호란, 1636년에 2차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후에 즉위한 효종이 한때 청을 치겠다는 '북벌론(北伐論)' 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효종이 40대의 짧은 나이로 승하했으며, 북벌의 실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도리어 나선정벌에 보탬이 되기나 했지. 이후엔 명대와 같이 적대감이 희석되고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기회를 틈타 북벌의논 할때도 있었다. 명나라도 초기에 조선과 사이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 쪽은 요동정벌이 무산되어 조선과의 제대로 된 무력충돌이 없었는데... 강희제가 만력제를 기리는 만동묘를 두고도 "조선이 우리가 망해도 또 제사를 지내줄 것 아니냐?"라고 쿨하게 대처한 것도 한 일례.

개화기에 들어서는 메이지 유신 뒤 세력확장을 꾀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을 배척하기 위해 조선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사실상 과거의 조공국을 넘어선 속국, 식민지 취급을 하려고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김옥균 등 개화파와 일본군을 우정국에서 몰아내기도 하였고 그 해 청불전쟁이 터지면서 청나라 군대 일부가 전쟁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군대가 파병되었고, 이를 근거를 일본 역시 자국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에 참패한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1897년 고종대한제국을 수립하며 기존의 조청관계는 끝났다. 이후 1899년 한-청 통상 조약[141]을 체결함으로써 대등한 관계로 전환했고 의화단사건이나 간도문제때문에 말이 많았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의 식민 지배를 약속받자 마침내 공식적으로 조선을 포기. 뒤이어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경술국치, 일제강점기)가 되었고, 청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912년에 멸망하였다.

8.3 일본

일본과는 막부시절 및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계가 없었으나[142], 메이지 유신 뒤 일본이 아시아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며 위협세력으로 떠올랐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섰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양국이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갈등이 폭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전 결과 청은 일본에 타이완을 내주어야 했다.

반면에 극우단체 흑룡회에서 손문의 흥중회,중국혁명동맹회 등 혁명단체를 대륙침략 목적으로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등,결국엔 청이 멸망하여서 티베트,위구르,몽골 등 소수민족들이 분리독립을 시전하였다.결국엔 외몽골은 독립을 성공했지만 내몽골,위구르,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사실 외몽골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케이스이며 몽골인민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1912년 청이 멸망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향한 세력확대에 나선다. 그러나 청의 경우는 나라가 아니라 왕조만 망한 것이어서 바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일본의 팽창을 견제 했고 이후 만주사변으로 이어서 푸이를 끌어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건국케한다.

8.4 그 외

조선은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고 청을 대차게 까다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했다. 그 까닭에 청을 외교적으로는 인정하였지만, 실제 뒷담화를 까는 모습을 보였다.

외몽골의 경우 오이라트의 후신인 준가르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국력차를 이기지 못해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외몽골은 청에 완전히 흡수되어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다시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1년 다시 몽골 인민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적백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련의 속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원의 옥새를 바치며 만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당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초기까지 징집된 병력은 역사적으로 봐도 이웃국들에게 정말 충격적인 수준이었다.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정글이 있던 베트남 정도나 주변 민족들을 침공하던 한족을 막을 수 있었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 팔기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143]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44]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견제를 주고받는 사이였다가 청말 연해주 등의 영토를 거하게 삥뜯겼으며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큰 산맥이 있어서(...)

9 관련 문서

9.1 기타

9.2 사건 (시대순)

9.3 인물 (시대순)

  1. 1765년, 청나라의 강역
  2. 위구르나 티베트 등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원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영토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중원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무슨무슨 자치구", 또는 "무슨무슨 자치주" 전부를 빼고 거기에 만주와 대만도 빼고 티베트의 영역인 칭하이 성과 쓰촨 성 서부, 그밖에 윈난 성과 하이난 섬 정도를 빼면 넓은 의미의 중원이 된다. 좁은 의미는 황하 강 유역. 즉, 허난 성 등이라고 할 수 있다.
  3. 만주식 군호
  4. 몽골식 군호
  5. [1], [2], [3]
  6. 삼번의 난 진압,대만의 정씨왕조 정벌 등으로 중원으로 입성한 청나라의 내부항거세력 정리.
  7. 근면성실한 태도로 내치에 임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관리들의 부정부패 척결.
  8. 십전무공. 오랜 적이었던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여러 원정을 통해 청의 강역을 넓힘.
  9. 이 세 황제의 연달은 재위기간이 청나라의 최고 전성기이며, '삼대의 봄' 이라고 한다.
  10.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독음이다.
  11.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하며, 원래 국명의 뜻은 '전사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12. 물론 자기네들이 기록한 역사에선 병사라고 적어놓긴 했다.
  13. 서광계와 손원화 등은 화기를 발사할 때 필요한 거리측량과 각도정위에 관한 학문을 서구에서 배우고 있었고 총규, 총척 및 구도의의 사용 및 탄약장전기술을 개선한 훈련을 받았다.
  14.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 수 있게 된 정료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전쟁 때 미군보다도 200년 빨랐다.
  15. 실제로 '하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같은 말들이 많이 있고 당시 상황도 그래서 로또로 성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때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4]
  16. 구체적인 내용은 곤경에 빠진 제국 같은 서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명 상황을 대략적으로 보자면 환경 변화와 각종 재해로 쌀값이 7배나 오르는 현상이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고 우수하지 못한 지도자로 인하여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하게 되었다. 수치적으로도 국력이 순식간에 반토막 나고 추락하는 걸 보면 아찔할 정도다. 식량난이 너무 심해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가 심지어 썩은 송장을 먹었던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17.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인 불운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륙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만주족이 영향력을 잃어 동화되었기 때문.
  18. 건륭제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가장 장수(89세)했고, 가장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던(현직 60년+태상황 4년) 사람이다. 현직 황제로서 가장 오래 앉아있던 이는 강희제(61년)였다.
  19. 내몽골은 연합제국의 측면도 있다. 황후들은 원칙적으로 내몽골의 몽골부족에서 선발되었다. 일종의 몽골족 포섭구. 티베트달라이 라마는 황제의 스승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티베트는 단순한 번국이라기엔 굉장히 격이 높았다. 외몽골, 티베트, 신강은 준가르를 멸망 시켜서 차지했다.
  20. [5]
  21. 환빠의 영향이 강할 때 나온 서적의 영향인지 희한하게도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에 대해서 사서에도 쓰여진 단점을 지적하지 않고 장점만 거론되는 경향이 있는데, 제대로 된 근거 자료와 검증 없이 만주족 황제들은 한족 황제들에 비하여 우월했다고 하거나 하는 둥 만주족 황제나 지배층들도 딱히 초인적 존재는 아니라 명백히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구 증감 같은 양적인 것들을 단순하게 비교할 때도 시간 정도는 고려를 해야 한다. 후대는 과거 쌓인 것에서 출발하는만큼 상대적으로는 몰라도 절대적으로 쇠퇴하기는 쉽지가 않다.
  22. 과거에는 지배층들이 보통 지금의 지식인 계층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도 생각보다 영향력이 엄청났고 수학처럼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에 기여한 학자들을 찾아보면 지배층 출신들이 많다. 심지어 가난한(?) 것처럼 묘사되는 그리스 학자들도 자세히 알아보면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불로소득 계층이 많았다.
  23. 물론 공부를 하기 시작한 유목민들도 있었고 그러다 정주민이 되기도 했다.
  24. 단,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건 생각보다 잘한 유목민들도 많았다.
  25. 러시아처럼 자기들을 정복한 유목민들을 보고 고혈을 빨아먹는 거대한 기생충이니 어쩌고 하며 평가가 매우 부정적인 곳들도 있다.
  26. 거의 대부분 유목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의 학자들도 처죽이고 도서관 같은 곳들도 파괴하는 둥 각종 만행들도 많이 저질렀다.
  27. 이는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가 한족 왕조였다 해도(이자성의 순나라가 제대로 성공하여 약 300년 가까이 이어진다든가, 삼번의 난이 성공한다든가, 아예 명나라이자성의 난을 진압하여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등) 마찬가지였을 듯 싶다. 후대의 청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한참 취약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지만 당장 한족 왕조인 북송요나라와의 군사적 충돌 문제 탓에 다른 한족 왕조들에 비해(심지어 만주족의 청나라보다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중화사상을 추구하지 못했으며 명목상 북송의 제후국이었던 고려 또한 여요전쟁을 겪은 후부터는 명목상 북송과 요나라에 이중으로 사대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가 한족 왕조였다면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을 때 대외적으로는 평등조약을 체결하고 대내적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조약이라고 일종의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28. 자세한 내용은『청나라, 키메라의 제국』(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
  29. 신민들이 송나라의 의복과 제도를 사용하는것을 막지 못했던 금나라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남송과 구분이 안될 정도로 정체성을 상실했던 것을 보도록 하자.
  30. 왼쪽부터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 독일 제국빌헬름 2세,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프랑스마리안느, 일본 제국사무라이, 그 뒤엔 청의 이홍장을 묘사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주요 열강들의 이권경쟁을 풍자하고 있는데, 독일이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에 칼을 꽂고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독일을 견제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역시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이홍장이 열강들에게 중국이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다. 미국은 청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이권침탈 경쟁에 이 그림에 묘사된 나라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합류했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1. 다만, 만주족 입장에서 한족이 자력으로 주무기인 화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는 관점도 있다.
  32. 병법이 쓸모가 없다는 핑계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무경총요 같은 것들을 살필 때, 중국 군사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병법가들이 중국의 과학 기술을 군사학에 도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실수다. 실제로 청나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전한 과학기술들도 있었는데 그것들은 청군에 거의 도입이 되지 않고 있었다.
  33.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34. 1위는 원나라
  35.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 참고. 물론 사할린과 북해도들은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들 및 혈통이 같거나 더멀리 여진이나 말갈의 조상이었던 퉁구스족들이 살던 땅이고 만주어로도 이름이 있을정도로 인지도 높은 섬이었다. 당장 사할린과 맞닿은 연해주의 경우 진짜 청나라 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여진족만 살던 땅도 아니고 여진족은 이곳에 사는 여러 민족들 중 가장 적은 인원의 거주 인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라 이것만으론 북해도와 사할린이 청나라의 영토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 공동관리 조약에 아무런 말도 없던것이 청이었다.
  36. 사할린 섬의 만주어 이름은 '사할리얀 울라 앙가 하다' 였다. 이름의 뜻은 사할린 강 하구에 있는 험준한 돌덩어리이란 뜻. 사할리얀 울라의 뜻은 검은 강 이란 뜻이다.지금의 사할린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 물론 만주어 이름만 있는게 아니었다.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란 아이누어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본인들이 사할린을 부르는 명칭인 가라후토가 유래한다.
  37. 발음은 우다이다.
  38. 표기의 출처는 여기를 들어가 주석을 보자. 우다란 강이 부랴티야 공화국에도 있는데, 헷갈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이 우다 강은 하바로프스크 크라이에 있다. '디'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보면 '다'의 모음부분의 키릴문자 표기는 'a'이며, 발음 역시 우리나라의 모음'ㅏ'에 대응될 수 있다. 키릴문자항목 참고. 따라서 우'다'강이 맞는 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도 우'다'라고 한다. 영어권 국가의 발음방법은 구글 지도의 표기를 참고하였다.
  39. 참고로 우다 강 주변은 조약 체결 당시 미결정지로 놔둔 영역이다. 그래도 괜찮았던 이유는 이곳에 오는 사람이 극도로 적어서...이후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면서 망했어요.
  40. 그래서 수수기오로 등의 다른 기오로계 성씨도 있다.
  41. 당연히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 몽골족이 세운 제국도 싫어하는 건 덤이다. 괜히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말이 중국 역덕들 사이에서 도는게 아니다.
  42. 순치제, 강희제. 동치제, 광서제, 선통제. 이 중 광서제와 선통제의 경우 황위 계승 서열이 한참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실권력자인 서태후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즉위한 것이다.
  43. 국토라는 뜻도 있음
  44. 承受로 해석. 帱은 휘장, 장막이라는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다.
  45. 保佑: 보호와 도움.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그것.
  46.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
  47.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48.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49.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
  50. 겅시연 수 황제.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51. 언두링거 한.
  52. 복다 카간.
  53.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
  54. 겅시연 수 황제
  55. 복다 카간.
  56.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
  57.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
  58.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59. 아이비어 자사크 칸.
  60.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
  61.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62. 엔크 암갈란 칸.
  63.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
  64.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65. 나이랄트 토브 칸.
  66.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
  67.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68. 텡게린 테트게센 칸.
  69.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
  70.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71.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72.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
  73.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
  74.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75. 터르 게렐트 칸.
  76.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
  77.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
  78.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79. 투기멜 엘베그트 칸.
  80.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
  81.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82. 부린투 자사그치 칸.
  83.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
  84.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85. 바다라울트 투르 칸.
  86.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
  87.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
  88. 휴브트 요스 칸.
  89.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201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그의 동생 푸런(溥任, 1918.8.17생)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90.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
  91. 원황제(原皇帝)
  92. 순황제(順皇帝)
  93. 흥황제(興皇帝)
  94. 정황제(正皇帝)
  95. 직황제(直皇帝)
  96. 익황제(翼皇帝)
  97. 선황제(宣皇帝)
  98.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
  99.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100.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101.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
  102. 겅시연 수 황제
  103. 복다 카간.
  104.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安民立政誠敬義皇帝)
  105.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
  106.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107. 아이비어 자사크 칸.
  108.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
  109.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110. 엔크 암갈란 칸.
  111.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
  112.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113. 나이랄트 토브 칸.
  114.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
  115.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116. 텡게린 테트게센 칸.
  117.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
  118.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119.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120.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
  121.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
  122.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123. 터르 게렐트 칸.
  124.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
  125.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
  126.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127. 투기멜 엘베그트 칸.
  128.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
  129.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130. 부린투 자사그치 칸.
  131.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
  132.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133. 바다라울트 투르 칸.
  134.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
  135.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
  136. 휴브트 요스 칸.
  137.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201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그의 동생 푸런(溥任, 1918.8.17생)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138.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
  139. 건주위 추장
  140.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심심하면 쳐들어와 여진족들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개박살내서 여자, 노인, 아이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에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쳐들어가서 학살하고 방화하고 개발살냈다.
  141. 당시 청의 상태도 막장이었기에 의외로 대등한 관계였다.
  142. 사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도 입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 청나라가 중국 본토 점령에 올인하는 와중에 흐지부지된듯 하다. 실제로 청나라는 병자호란 직후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는 전혀 관여를 안하는 등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해줄것을 요구하는 등 어느 정도는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어느정도 중계무역을 통해 교역을 하였다. 삼전도의 굴욕 당시 공물로 내기로 한 물건 중에는 일본에서 나는 물건도 많았다.일본은 위치 상 연해주 및 함경도 동해안과 맞닿아서 살던 여진 내지는 만주 부족들이 존재를 모를리가 없고 고려시대에는 도이라고 일종의 해적집단을 만들어 실제로 도호쿠 등에 쳐들어간 적이 있다.
  143.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
  144.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