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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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화랑

官昌, 645~660

황산벌 전투에서 죽음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화랑.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백제계백과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면서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자 신라군 사령부는 화랑을 돌격시켜 전의를 끌어올리는 작전을 선택한다.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 반굴은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용감히 싸운 끝에 전사했고, 그 다음으로 장군 김품일은 아들 관창에게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겠느냐?"라고 말하며 16살인 어린 아들을 적진으로 보냈다.

관창은 창을 들고 백제군을 향해 진격한 후 분전하였으나 수적 열세로 사로잡혀 계백 앞으로 끌려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기게 한 후 얼굴을 보고 놀라면서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인 병사들이야!"라고 말하며 죽이지 않고 신라 진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본진으로 귀환한 관창은 "내가 적지 가운데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겠다."라고 말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가 사로잡히니, 계백은 할 수 없이 관창의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냈다. 목만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 품일은 소매로 피를 닦으며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는 없다."라고 하였다.

결국 신라군이 이를 보고 용기백배하여 백제군은 마지막 다섯 번째 교전에서 패하며 황산벌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백제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고 만다.

다만,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공격을 가능하게 한 김유신의 위상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유신은 본인이 낭비성 전투에서 단기로 고구려 군에 돌격하여 "적장 물리쳤다!"를 해낸 사람이라는 점에서 군사령관으로서나 무용으로나 그만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요즘은 관창이나 반굴이 막연히 혼자 돌격한게 아니라 일종의 별동대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최소한 혼자 돌격하진 않았다.

개그콘서트 초창기에 이를 소재로 한 코너인 '화랑관창'이 잠깐 존재했었다. 화랑전사 마루에서는 주인공 마루가 관창의 정기를 이어받은 아이로 나온다.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1 영화 황산벌에서

영화 황산벌에서도 반굴과 관창의 활약상이 재해석 되어 나오는데,익히 알려져 있는 전개와 거의 같으나,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치뤘던 4번의 전투가 첫번째는 신라와 백제의 기마장군들의 2:2활싸움, 2번째는 욕싸움, 3번째는 각 장군들의 1:1 맞짱, 4번째는 김유신계백의 1:1장기 한판[1]으로 재해석 되었다.

그리고 반굴은 혼자 백제 진영으로 돌진하여 계백이 나와라!!하고 난리를 치다가 무명의 백제병사가 던진 창에 허무하게 맞아 전사하는 것으로 재현되었고, 관창의 경우도 똑같이 돌진하여 난리를 치다 때마침 그 장소에 나와본 계백의 저놈은 절대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라는 명령으로 사로잡힌다.

여기서 또 다른점은 원래는 계백이 관창의 활약상에 감탄하여 놓아주며 보내는 것이 익히 역사에 알려진 점이나, 여기서는 계백이 속으로 생각하길,"김유신...네 뜻대로 쉽게 핥아줄순 없제.[2] 이놈을 죽이면 작전에 말려드는 것이여. 고렇겐 안돼제.." 하고 생각을 정리 한 후, "이놈은 보내버려라!" 하고 관창을 되돌려 보냈다는 차이가 있다.

되돌아온 관창은 아버지인 김품일 장군에게 보내지나, 김품일은 "네가 화랑이가...네가 화랑이냐꼬!!"하고 성을 내며 관창의 뺨을 때린다. 그러자 관창은 "아버지가 한번 가봐라!글마들이 죽이라 캐도 안죽이는데 우야라꼬!!!"하고 대들지만,김품일은 "죽지도 몬하고 온게..뭐라꼬!!!"하며 칼을 뽑아들고 성을 낸다.그걸 보고 관창은 "알았다카이!가서 확 디져뿔면 되는거 아잉교!"하고 우물물을 얼굴에 끼얹은 후 다시 돌진했다.

그 후 또 다시 포획당해 백제의 진영으로 끌려가고, 계백은 이번에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관창이 계백에게 '넌 누가 시켜서 처자식을 죽이냐?'라는 도발을 해 신경을 제대로 긁어버리고, 이 말을 들은 계백은 "좋아..김유신...핥아주지."라는 독백과 함께 목을 치라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목이 베어진 관창은 말에 매어져서 신라군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것이 아니었고, 김유신은 더 확실하게 사기를 올리기 위해 화랑을 몇명 더 보내 반자이 어택을 시켜버렸다. 당연히 단독으로 돌진한 화랑들은 죄다 끔살.

이것이 역사에 흔히 알려진 점과 영화 황산벌에서의 재해석 된 이야기의 차이이다.

2 손잡이

봉, 장대 혹은 호스 같은 것에 쓰이는 손잡이의 한 형태.

본래는 창자루에 끼우는 것으로(그래서 관창이다. 관창을 쓴 창 이름도 관창이다.) 모양은 짧은 파이프와 같다. 창날 쪽 잡는 손(보통 왼손)으로 관창을 잡는 식으로 사용한다. 창으로 찌르기를 할 때 오른손으로 밀면서 왼손은 창대 위에서 미끄러지게 되는데, 관창을 쓰면 마찰열도 막아주고 나무에 가시가 일어나는 것도 막아서 맨손으로 창을 잡을 때보다 빠른 찌르기를 할 수 있다. 단점은 관창을 통해 잡아서 창을 섬세하게 다룰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호스의 끝에 붙는 물건들을 이렇게 부르며, 영어로는 노즐(Nozzle)이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소방용 호스에 끼우는 것. 주변에 호스가 들어있는 소화전을 유심히 보면 안내문에 관창이라는 단어가 적힌 것을 볼 수 있다. 소방호스에 쓰는 관창도 형태는 무기 관창과 기본적으로 같으나(파이프 구조로 되어 파이프를 손잡이로 쓰는 것) 목적은 조금 다르다. 이쪽은 물줄기를 제어하기 위한 용도.[3]

3 觀漲

홍수가 난 것을 구경하는 것. 홍수가 나 마을이 쓸려가는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비 때문에 불어난 강물을 보는 것이다. 즉, 크게 범람하지 않은 강을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심육(1685~1753)이 지은 觀漲이라는 시.

朝來觀水上層臺
一雨暝暝晩不開
高浪忽翻掀小島
大聲如吼轉狂雷
行人立馬愁難渡
漁子移舟力未回
城下兒童爭設餌
細鱗容易柳穿來
조래관수상층대
일우명명만불개
고랑홀번흔소도
대성여후전광뢰
행인입마수난도
어자이주역미회
성하아동쟁설이
세린용이유천래
아침이 되어 물을 보러 누각에 올랐더니
비는 내려 어둑어둑 늦어서도 아니 갠다
높은 물결 덮쳐와서 작은 섬을 뒤흔들고
포효하는 물소리는 미친 우레 구르는 듯
행인은 말 세우고 강 건너기 걱정하고
어부는 배 옮기나 힘에 부쳐 고생한다
성 밑으로 아이들은 앞을 다퉈 낚시하여
작은 붕어 어렵잖게 버들가지에 꿰어 간다
  1. 여기에 곁들여서 각 진영의 인간 장기 병사들도 배치하여 말을 하나씩 딸때마다 서로 그 자리에 배치된 병사들을 실제로 죽인다(!)
  2. 4번째 양측간 싸움인 계백과 김유신의 1:1 장기에서 김유신이 패배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계백에게 "계백아.인간은 지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입으로 지 팔꿈치도 핥지 못하는 존재데이." 하고 돌아간 것을,계백이 이를 듣고 자신의 부하 장수들에게 자신의 팔꿈치들을 핥아보라고 하여 부하들도 모두 핥지 못하자 "이 영감탱이가 시방 나보고 지 팔꿈치를 핥아달라는거여 뭐여?" 하고 고민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3. 만일 호스로만 주수를 하게 된다면, 방수구가 너무 넓어 물줄기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며, 밸브가 없기 때문에 방수를 중단할 수도 없고 호스를 제어하기도 힘들다. 수도꼭지에 물리는 가느다란 고무호스라면 모를까, 이건 수압이나 유량이 무지막지한 소방용 호스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