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악의 선구자로, 일본으로부터 철도창가를 수입해와 학도가를 작사했으며,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애국가 1절을 작사했다고도 한다.
평안북도 강서 출생으로 평양 숭덕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896년 무렵에 개신교 예배당에 다니면서 창가(唱歌)류를 부르면서 서양 음악을 알게 되었고,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6세 때 선교사 부인 헌트(Hunt)와 당시 정의여학교 교장인 스눅(Snook)에게 성악을 배웠다. 그 뒤 선교사 그람리에게 코넷을 배우는 한편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사게된 김인식은 자기 나름대로 조율하고서 사흘 만에 찬송가 곡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05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평양 서문 밖 소학교에서 연합운동회가 열렸을 때 <학도가>를 작사한 바 있는데, 이 노래는 한국 창작 창가의 효시가 되었다. 이 때 숭실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오르간을 치다가 쫓겨나기도 했는데 김인식과 친구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오르간을 쳤으나 주위의 눈총 때문에 다들 그만두고 김인식 혼자만 치게 되었고 오르간을 독차지한 그는 밤이고 낮이고 시간만 나면 오르간을 치다 결국 공동시설인 기숙사의 다른 학생들이 진정을 내어 쫓겨났다.
22세 때인 1907년 서울로 올라와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중학부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본격적으로 후진을 양성하여 홍난파, 이상준 등과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홍난파는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한다. 그 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합창을 지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결성하였다.
1908년 기호학교 음악교원을 지내고 1909년 관현 휘문의숙 창가교사, 1910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 풍금교사를 지냈고, 계속해서 기호학교(畿湖學校 : 중앙중, 중앙고등학교의 전신), 진명, 오성, 경신, 배재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밖에 헨델의 <메시아>의 번역을 위시하여 많은 찬송가의 가사를 번역하였으며, 1913년 <영산회상>, <여민락> 등 전통음악을 오선보로 채보하였고, <애국가>, <전진가>, <국기가> 등을 작곡하였다. 1940년 은퇴, 1963년 피난지 대구에 있는 아들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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