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렴

金泰廉

1 개요

기록상 신라왕자로, 왕자가 맞다면 시기상 경덕왕의 아들.
그러나 살짝 거리가 먼 왕족이거나 혹은 아예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2 기록

한국의 기록에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고, 일본 측 기록 '속일본기(続日本紀)'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752년 3월 일본 큐슈의 다자이후에 신라 사절단이 도착했는데 역사상 유례가 없는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으며 대표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이었다. 3개월 후 신라 사절단은 당시 일본의 수도 나라로 가서 덴노를 알현했는데 김태렴이 덴노에게 코가 땅에 닿을 듯 큰 절을 하고서는 신라 국왕(시기상 경덕왕)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올린다고 말했다.

"일본의 천황에게 삼가 아룁니다. 신라국은 예로부터 대대로 일본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번에 제가(경덕왕) 몸소 가서 조공하고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국왕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질까 염려되어, 저를 대신하여 왕자 한아찬 태렴을 우두머리로 하여 370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입조(入朝)하게 하고 겸하여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치고 삼가 아뢰게 합니다."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 당시 일본은 백제와 한 편이었고 백강 전투에서 처참하게 깨진 뒤 신라와는 약간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 왔는데 특히 734년의 왕성국 사건을 기준으로 양측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불거진 상태였다. 이후 신라가 보낸 사신은 수도 나라까지 못 들어가고 다자이후에서 되돌려졌으며 742년에는 일본 측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입국조차 불허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신라 측에서 먼저 왕자를 보낸데다 스스로 고개를 숙여 대놓고 조공을 하겠다고 하니 일본 측에서는 대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김태렴은 고켄 덴노를 당나라 황제와 동격의 위상으로 떠받들고 아부했고 덴노는 기분이 좋아져 3일 후 조당(朝堂)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김태렴을 만난 다음날인 6월 15일부터 7월 8일까지 김태렴이 가져온 물건들을 구입하기를 원하는 5위 관등 이상 귀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품목,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하여 문서로 제출하게 했는데 이 문서가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다.[1] 김태렴은 스스로 일본의 신하를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일행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의 비용은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일본 정부에서 짊어져야만 했다. 김태렴은 6월 22일 도다이지(東大寺)를 방문해 예불을 올리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김태렴은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가져간 물건들을 다 팔아치우고, 7월 24일 귀국했다. 고켄덴노는 김태렴에게 사신을 보내 명주와 베, 술과 안주를 보내주었다.

3 왕자인가 장사꾼인가?

김태렴은 자신이 신라의 왕자이자 외교사절이라고 말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우선 그는 왕이 직접 서명한 정식 외교문서를 가져오지 않고 단지 말로만 덴노를 칭송했던 것이다. 고켄덴노는 마지막 만찬에서 당부를 하였다.

오늘 이후로 신라 국왕이 직접 일본 조정을 방문하도록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

그러나 신라 왕은 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조급해진 덴노는 이듬해인 753년 2월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753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만나주지 않았다.

경덕왕은 일본 사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작 반 년 전의 김태렴의 태도가 신라 조정의 입장과 같았다면 경덕왕이 저렇게 반응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에 일본 조정은 폭발했고 이 즈음부터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된다.

4 기타

관련 링크
  1. 도다이지 정창원에서 이면지로 쓰이고 있던 것을 19세기에 우연히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