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기 762년,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려고 했던 일련의 상황들. 그러나 일본의 침공은 무산되었고, 여기에는 발해가 관여되어 있다. 실현되었다면 임진왜란의 800년 전 버전[1][2]
2 배경
삼국시대가 신라의 통일로 마무리된 이후, 일본은 나당연합군이 침공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큐슈에 축성을 하고 수도를 옮길 정도[3]로 극도의 불안감[4]을 보였다.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 프로파간다[5]가 생겨난 것도 이 시기인걸로 본다. 신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부적으로 진구 황후라는 가공의 통치자를 만들어서[6] 신라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드러냈다고 할 정도. 일단 양국은 사신을 왕래하면서 교류를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는 그다지 편치 않았다. 이는 신라와 일본이 모두 스스로를 '황제의 나라'로 여기고 독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외교를 펼친 탓이 컸다. 일본은 율령을 반포하고 헤이안 지역으로 천도한 이후 덴노를 사실상 천자로 규정하고 다른 나라들은 번국으로 취급하는 외교로 나아갔다. 심지어는 발해조차도 번국으로 규정해서 발해가 먼저 사신을 보내야 일본이 답사를 보낼 정도였다. 발해는 아니꼬웠으나[7] 외교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8] 대충 일본의 비위를 맞춰줬다.[9]
그러나 신라는 일본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면서 외교적으로 꿀릴 것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당시 신라는 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으로 이어지며 국력이 강대해져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어 발해보다도 국력이 앞서 있던[10]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로 신라는 일본? 그기 머꼬? 묵는기가? ㅋㅋ라는 입장이었던 것. 한편 이 시기에도 성덕왕 시대에 관문성을 새로 축조하는 등 일본군의 침공 대비는 잊지 않고 계속 하고 있었다.
이런 양측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734년에 일어난 소위 왕성국 사건이다. 성덕왕이 일본의 소소한 침공을 격퇴한 직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동안 써오던 신라라는 나라 이름 대신 왕성국이라는 이름을 국서에 쓰자 일본 쪽이 '이게 뭥미?'라면서 사신을 문전박대했다는 것이다. 왕성국이라는 이름이 한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신라는 서경에 근거하여 신라는 왕성국이고 일본은 번국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 당연히 일본 입장에선 왕성국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신과 국서를 받았다간 이를 인정하는 꼴일 테니 사신을 되돌려 보낼 수밖에.
일본은 이후 2년이 지난 736년에 사신을 보내 관계개선을 시도(혹은, 왕성국에 대해서 따지려고)했던 것으로 보이나 신라는 왕성국 사건에 대해서 사과나 유감 표명을 전혀 하지 않고 결국 일본 사신은 소득없이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보면 일본 사신이 신라가 일전의 예의를 잃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라가 일본 사신을 어떻게 대접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 이런 보고에 일본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신궁에 신라의 무례함을 고하면서 이때부터 '신라를 응징하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짧은 효성왕을 지나 경덕왕대에 이르러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742년,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입국을 불허했고 753년에 일본이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라는 이유로 일본 사신은 경덕왕의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야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일본이 신라에 앙심을 품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신라가 세 번 사신을 보냈으나(738년, 742년, 743년) 갈등이 완화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어갔다. 신라 사신이 선물을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품이 아니라 토산물로 표기한 것에 일본이 반발하기도 했다. 752년에는 스스로 신라 왕자라고 주장하는 김태렴이 대규모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해 일본에 조공하고 복속하겠다고 하여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가져온 물건을 팔고 선물도 잔뜩 받아갔지만 정작 그 다음 해 753년, 일본이 사신을 보내자 경덕왕이 오만하고 불손하다라는 이유로 사신을 돌려보냈는데 정황상 김태렴은 실제 신라 왕자가 아니라 자기 비즈니스를 위해 왕명을 사칭해 사기를 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폭발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3 본격적인 침공 준비
758년, 일본의 정사 오노노 다모리가 발해에 국사로 파견되었다. 보통은 발해가 먼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일본이 답사를 보내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발해와 일본은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이유인즉 752년 파견된 발해 사신이 들고 간 발해 문왕의 국서가 일본 덴노에게 신하로 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일본이 버럭한 탓이었다. 일본의 어이없는 태도에 발해도 우리는 고구려 자손인데 뭐가 어째?라면서 격앙되어 있었고 결국 양 국 사이에는 6년여 간 사신교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먼저 사신을 보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서는 발해의 참여가 절실했다. 발해와 일본이 남북에서 협공하게 되면 아무리 강력한 신라라고 해도 쉽지 않을 상황이었기 때문. 결국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을 판다고 발해에게 신라 침공 계획을 알리면서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 먼저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발해는 이에 대해서 일단 겉으로는 찬동하는 척하면서 비위를 맞춰주었다.
759년, 일본 조정은 갑자기 전국적으로 500척의 배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각 지역별로 구체적으로 만들 배의 척수를 할당했고 완성기한은 3년을 주었다.3년 기다려주지
761년, 일본 조정은 미노와 무사시 지역의 소년들을 선발해 신라어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진구 황후를 모신 신사 향추묘에 762년 신라를 침공하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4 흐지부지된 침공 계획
그러나 정작 일본이 목표로 한 762년,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지 않았다. 배 500척을 만들고 신라어를 익히게 하는 등의 의욕적인 행보와는 달리 우디르급으로 처음부터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일이 싹 사라져 버렸던 것.
일본이 신라를 침공하지 못한 이유는 발해가 신라 침공 계획에 찬성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해가 판단하기에 일본의 신라 침공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겨진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동북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었던 것. 신라가 일본의 이상 징후를 눈치 채고 대비를 하고 있었던 정황들도 발해가 신라 침공 계획에 찬동하지 못하도록 한 원인이 되었다. 경덕왕은 발해의 침공을 대비해서 대곡성(황해도 평산군) 등 6개의 성을 북방에 신축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안록산의 난으로 랴오닝 성 일대가 불안정했던 것도 원인이었다. 자칫 발해가 신라를 침공했을 경우 안록산이 이 빈틈을 타서 발해를 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발해 입장에선 여러모로 이 계획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발해는 시간만 끌었고 일본에서는 신라 침공을 주도하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12]가 결국 실각하면서 일본에서도 신라 침공 계획을 없던 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계획을 주도했던 나카마로 자체가 실제 정벌 의지가 없었고, 단순히 일본 내 여론의 반전을 꾀했다는 주장도 있다.- ↑ 그러나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통일국가는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하면 중국도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했다. 단적으로 인구를 보더라도 한반도 지역 국가들은 인구밀도가 대개 굉장히 높은 축이었으며(비록 휴전선 이남 한정이긴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인구 밀도는 도시국가와 미니국가를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여러 나라들 중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고 나라꼴도 갖춘 동네였다. 실제로 신라나 고려, 조선에 대한 중국 국가들의 대우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다.
- ↑ 이미 약 30년 전인 731년(성덕왕 시절)에 일본이 300척의 군선을 이끌고 신라의 동쪽 해안에 대규모로 침공하였으나 전멸시킨 바 있었다.
- ↑ 일본사가 아스카 시대에서 나라 시대로 넘어가는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아스카 지방을 수도로 삼던 일본이 천도를 통해 나라 지방으로 중심지를 이동시켰다. 이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이 큰 영향을 주었다.
- ↑ 충분히 그럴 만한 것이,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 당시 일본은 신라와 당에 맞섰던, 백제와 고구려의 편에 가담했으며, 백제의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수군 함대를 파견할 정도였다.
물론 백제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죄다 오리온 고래밥행그러나 삼국 통일 전쟁이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당하는 결과로 종결나면서 졸지에 두 동맹국을 잃게 된 일본을 향해 신라군이 원정을 단행할 개연성은 매우 높았다. 일본이 공포에 떠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당대 세계 최강국인 당 제국과 신라 연합군을 방어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 ↑ 라 쓰고 역사왜곡 기록이라 읽는다.
- ↑ 아마 모티브 자체는 사이메이 덴노인것 같지만.
- ↑ 발해도 고구려의 후신임을 강조했고 당연히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계관도 계승했을 테니
- ↑ 발해와 일본은 국제적으로 당과 신라와 대립하는 관계였다는 것은 같고 국력만 따지면 오히려 발해가 일본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라와 바다를 격해 있는 일본과 달리, 발해는 신라와 당 모두와 육로로 샌드위치 되어 있는 처지라서 여차하면 양면전쟁의 위험성까지 존재한다. 불안한 뒤통수인 흑수말갈족까지 고려하면 사면초가의 상황. 그래서 발해가 보다 아쉬울 수밖에 없다.
- ↑ 그러나 발해왕을 고려왕, 혹은 고구려왕으로 칭하는것은 그만두지 않았다. 대충 비위를 맞춰주더라도 발해의 독자성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듯.
- ↑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인구 면에서는 신라가 앞섰다고 평가된다. 사실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은 농사에 부적합해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고, 고대의 GDP는 농업이 그 기준이었다. 당나라가 내린 칭호를 보더라도 신라는 최고위 국왕, 발해는 군왕 대접을 받았다. 또, 그나마 발해 선왕시기에 발해가 크게 영토를 넓히면서(교과서에 나오는 연해주를 포함한 발해의 영토는 이걸 말한다.) 그나마 신라를 능가하네 마네 논란이 있었지만 훗날 국가막장테크를 탐에 따라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 ↑ 서경에서는 왕성(수도 궁성)-왕기(수도)-6복(지방 = 9주 5소경)-번국의 순서로 주종관계를 말한다.
-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800년 전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