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34대 효성왕 김승경 | ← | 35대 경덕왕 김헌영 | → | 36대 혜공왕 김건운 |
시호 | 경덕왕(景德王) | |
성 | 김(金) | |
휘 | 헌영(憲英) | |
생몰년도 | 음력 | ?[1] ~ 765년 6월[2] (42세 ~ 44세) |
재위기간 | 음력 | 742년 ~ 765년 6월 (23년) |
1 개요
신라의 35대 왕이자, 신라사(史) 마지막 명군. 원성왕 曰 응, 그럼 나는?
2 생애
제33대 성덕왕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34대인 효성왕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아우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이다. 743년(경덕왕 2)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당나라에 상당한 조공을 바쳤으며, 제도 ·지명 ·관직 등을 당나라 식으로 개편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펼치고, 당나라와 교역을 활발히 하여 산업발전에 힘써서 신라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 때부터 신라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 원인은 전제왕권 구축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가 전성시대였다는 것은 742년 10월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등 알 수 있다. 혹은 친일본(=반당)파와 친당파와의 오랜 싸움에서 친당파가 승리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후 일본은 신라 침략 계획을 세우고 500여척의 배를 동원하는 등의 준비를 하지만 최종 책임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사망한 이후 흐지무지하게 되었다. 일본이 침공을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발해가 동의하지 않아서였다. 발해는 대충 일본의 비위만 맞춰 주면서 신라침공계획에는 차일피일 미루는 식으로 회피해버렸던것.(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참조)
3 한화 정책
경덕왕 시대에 펼쳐진 한화#s-3 정책은 말 그대로 중국화 정책이다. 757년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 식으로 바꾸어 한자화했고, 759년 중앙 관직명도 한자화한다. 집사부 중시를 시중으로, 국학을 태학으로 명칭을 바꾸는 등 꽤나 많이 바뀌었다. 이 때 처음 시도되었던 지명 한화 정책은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현재까지 내려오는 한자어 지명의 기초가 되었다.[3]
현재 신라를 까는 이들은 이 정책에 의해 우리 고유의 문화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혜공왕 때 귀족들의 반발로 도로 원상복귀 된 경우도 있고, 안 바뀐 지명 또한 훈독으로 읽혔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곰나루라는 도시가 있었다.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는 웅진(熊津)이라고 표기하고 '곰나루'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이름은 '웅주'로 개편된다. 하지만 이를 웅주라고 읽지 않고 熊을 훈인 '곰'으로 읽어 곰주라고 불렀다.
이 정책은 녹봉제와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해 시작된 경덕왕의 야심찬 정책이었지만 결국 지명과 제도, 관직이 바뀌어도 귀족 세력의 약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위 내내 버라이어티한 자연재해가 일어났고,[4] 이를 핑계삼아 귀족들이 한화 정책을 추진하는 왕을 까기도 했다. 무엇보다 757년, 녹읍제가 부활한다.
4 진골 귀족의 압박에 끌려다닌 왕?
흔히 경덕왕은 귀족들 세력 견제에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4.1 녹읍의 부활
일반적으로 이는 경덕왕이 진골 귀족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부활시킨 것으로 이해되지만, 정작 이후의 《삼국사기》 경덕왕조를 보면 경덕왕은 이후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정치를 펼치고 있다. 지방 행정 한화 정책이나 관직 한화 정책은 모두 녹읍제를 부활시킨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녹읍 부활은 757년 3월이고 지방행정 한화 개편은 그 해 12월부터 시작했으며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편한 것은 759년 정월부터다. 만약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수행된 것이라면 경덕왕이 이런 정책들을 펼칠 수 있었을 리 없다. 오히려 이는 경덕왕의 왕권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경덕왕 대에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났고, 그 이전 왕들 대부터 자연재해가 끊임 없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국가재정이 말이 아닌 것은 당연지사. 신문왕 대에 제정된 녹봉제가 확실히 진골 귀족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녹봉제는 국가에서 일일이 그 지급에 신경을 써야 하니 그 관리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족한 국가 재정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경덕왕도 유지 비용이 덜 드는 녹읍제를 시행한 것이다.
녹읍 부활이 진골 귀족에게 이익인 것은 경덕왕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경덕왕이 자신의 정책을 계속 시행했던 것으로 보아 경덕왕의 왕권은 충분히 강력했고, 이로 볼때 녹읍제를 실시해도 왕권이 강력하므로 자신이 관리를 잘 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다가 상술된 국가 재정 문제까지 합쳐져서 녹읍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어쩐지 정조 삘. 유교적 군주를 지향한 것도 그렇고.
또한 758년 2월에 경덕왕은 "중앙관리나 지방관이 휴가를 청한 것이 만 60일이 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참고로 동시대 당나라는 관리가 1년을 기준으로 약 100일까지 휴가를 쓸 수 있었고, 후대의 고려시대에는 관리가 받았던 공식적인 휴가일만 60일이었으며 개인이 임의로 쉴 수 있는 날까지 합치면 1년에 100일에서 120일 정도였다.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녹읍제와 관련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당나라는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급여가 반 정도로 축소 지급되었다.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공식 휴가기간을 빠듯할 정도로 줄여서 녹읍을 포함한 보수를 줄여 국가 재정을 절약하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라고 해석하고 있다. 오늘날 직장생활로 비유하자면 회사가 허용하는 휴가 일자가 절반이나 줄었으며, 휴가 신청횟수가 줄어든 허용 일자를 넘어가면 자동으로 회사에서 잘라버린(…) 거라고 볼 수 있는 셈인데 귀족이나 관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 것은 당연했겠지만 이런 불만을 안고도 경덕왕은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만큼 왕권이 강했다는 것이다.
4.2 귀족들의 압박?
그리고 상대등 김사인이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귀족들이 경덕왕을 압박한 사례로 거론되는데, 사실 김사인은 태종 무열왕의 3남인 김문왕의 증손자로 성덕왕 때 이찬을 지냈으며 김사인의 아들인 김유정 역시 경덕왕에게 중용되며 중시를 지냈다. 즉 김사인은 왕을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왕의 친위세력이다. 이날의 기록을 보면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자 왕이 씹은 게 아니라 가납(간언을 받아들임)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곧 경덕왕이 비판을 수용하는 유교적 군주상을 지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김사인이 상소를 올리고 이듬해 병으로 물러났다는 것도 그가 성덕왕 때부터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연로해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대등 김신충과 시중 김옹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으로 물러났다는 것 역시 잘못된 설명이다. 김신충은 앞서 언급된 김사인의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으며 선왕 효성왕의 측근이었던 인물이고 김옹의 경우는 경덕왕의 첫 장인인 김순정의 손자다. 본래 상대등은 시중과 달리 매우 길게 재임할 수 있었고 종신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신충은 6년째 재임중이었고 김옹은 3년째 재임중이었다. 그런 관직이 교체된 것은 오히려 왕이 이런 관직들까지 교체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그 후임으로 김양상을 시중으로 임명한 것도 이상하게 볼 것 없는게, 김양상이 내물왕계의 인물이라지만 김양상의 외할아버지가 성덕왕이다. 그래서 경덕왕에게 김양상은 외조카 뻘이 된다. 이전에 김양상은 제6위 아찬이었는데 신라에서 시중은 제5위 대아찬 이상부터 임명될 수 있었던 관직이다. 김양상을 시중에 임명한 것도 경덕왕의 정치적 안배.
이로 볼 때 경덕왕이 진골 귀족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으며 견제에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골 귀족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책을 그대로 수행해 성사시킨 것을 보면 오히려 그는 통일신라의 국왕 중 신문왕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국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계자를 너무 늦게 본 것이 컸다. 이것도 어쩐지 정조 삘.
5 경덕왕 대의 사회와 문화
국력이 강대했고 이 때 실질적으로 신라는 옛 고구려 남부 패서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황해도는 나당전쟁 승리와 성덕왕 시대에 당나라에 영유권을 인정받은 뒤 느슨한 형태로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있었는데 경덕왕 시대에 들어 여러 성을 새로 쌓고 많은 군현을 설치한다. 외교 관계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유지되었던 시대였다.[5] 아직까지는. 하지만 그의 치세는 신라의 전성기의 마지막 시대이자 쇠망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한편 성덕대왕신종의 건립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으나, 이는 계속 실패했고 다음왕인 혜공왕 재위 때인 771년 완성되었다(…).[6] 하지만 그 외에도 754년 황룡사 종(皇龍寺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 ·불상의 제작에 힘쓰는 등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편 경덕왕은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랑들을 지도하던 승려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했는데 이 때 향가가 발전하기도 했다. 월명사,충담사가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6 후계자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 쪽은 표훈대덕 참조. 여하간 아들을 늦게 낳은 탓에 후계자인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쇠퇴의 원인 제공자. 이 설화에 의하면 경덕왕의 음경 크기가 8촌(약 20cm~21cm)[7]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덕왕을 비롯한 몇몇 왕의 거대한(!) 음경 크기에 대한 기록은 그 왕들의 권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는 왕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남성다움이나 건장한 육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래서 강력한 왕권을 이룬 왕에 대해 실제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음경 크기를 과장하는 방법으로 그 왕을 추앙하는 경향이 었었다는 것이다.
자식으로는 혜공왕만 있었는데 그 혜공왕이 젊은 나이에 피살되면서 그의 대는 끊기고 신라도 쇠락기로 접어든다.
《속일본기》에는 신라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등장하는데 경덕왕의 아들인지는 알수가 없다.
752년 윤 3월 22일, 신라 왕자 대아찬(大阿飡)김태렴과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호송하는 김필언(金弼言)등 700여인이 일곱 척의 배를 타고 와서 하카타[8]에 입항했다.6월 14일 신라 왕자 김태렴이 신라 국왕의 사명을 받들어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다. -《속일본기》
7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경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일본국의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二年春三月 소가 한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다
二年春三月 당에서 효성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하다
二年春三月 당에서 경덕왕을 책봉하고 전왕의 관작을 잇게 하다
二年春三月 당 황제가 직접 풀이한 효경을 1부 주다
二年夏四月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
二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二月 왕의 아우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二年冬十二月 당이 신라 사신에게 관직과 관복을 주다
三年春一月 유정을 중시로 삼다
三年春閏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夏四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다
三年 요사스러운 별이 나타났다가 열흘 만에 사라지다
四年春一月 김사인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四年夏五月 날이 가물다
四年夏五月 대정을 중시로 삼다
四年秋七月 동궁을 수리하다
四年秋七月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을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年夏四月 죄수들을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五年夏四月 150명에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다
六年春一月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다
六年春一月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다
六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 진평왕릉에 벼락이 치다
六年 날이 가물다
六年 눈이 오지 않다
六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퍼지다
七年春一月 천구가 땅에 떨어지다
七年秋八月 태후가 영명신궁으로 거처를 옮기다
七年秋八月 정찰 1인을 두다
七年秋八月 북쪽 변경을 검찰하게 하고 14개 군현을 두다
八年春二月 폭풍이 불다
八年春三月 천문박사와 누각박사를 두다
九年春一月 시중 대정이 물러나고, 조량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春二月 어룡성에 봉어를 두다
十一年春三月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다
十一年秋八月 동궁아관을 두다
十一年冬十月 창부에 사 3인을 더 두다
十二年秋八月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접견하지 않다
十二年秋八月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치다
十三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五月 성덕왕비를 세우다
十三年夏五月 우두주에서 지초를 바치다
十三年秋七月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다
十三年秋八月 가물고 누리가 있다
十三年秋八月 시중 조량이 물러나다
十四年 웅천주 향덕의 효행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다
十四年 망덕사탑이 흔들리다
十四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四年秋七月 죄수를 사면하고 노약자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다
十四年秋七月 김기를 시중으로 삼다
十五年春一月 상대등 김사인의 간언을 받아들이다
十五年春一月 당 현종에게 조공하니 시를 지어 주다
十五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五年夏四月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치니 벼슬을 주다
十六年春一月 신충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六年春三月 녹봉을 없애고 녹읍을 주다
十六年秋七月 영창궁을 다시 수리하다
十六年秋八月 조부에 사 2인을 더 두다
十六年冬十二月 9주의 이름을 고치고 군현을 소속시키다
十七年春一月 염상을 시중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휴가가 만 60일이 된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다
十七年夏四月 의학에 뛰어난 사람을 내공봉에 임명하고, 율령박사를 두다
十七年秋七月 왕자가 태어나다
十七年秋八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八年春一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二月 관직명을 고치다
十八年春三月 혜성이 3월에 나타났다가 가을에 사라지다
十九年春一月 도성 동쪽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다
十九年春一月 궁궐 안에 큰 못을 파다
十九年春一月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다
十九年夏四月 김옹을 시중으로 삼다
十九年秋七月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책봉하다
二十年春一月 하늘에 이상현상이 나타나다
二十年夏四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一年夏五月 여섯 성을 쌓고 태수를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二年秋七月 서울에 큰 바람이 불다
二十二年秋八月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다시 피다
二十二年秋八月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관직에서 물러나다
二十二年秋八月 이순이 경덕왕에게 간언하다
二十三年春一月 만종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양상을 시중으로 삼다
二十三年春一月 살별이 나타나고, 용이 나타났다 사라지다
二十三年冬十二月十一日 많은 유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四年夏五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벼슬을 주다
二十四年夏六月 유성이 별을 범하다
一年夏六月 경덕왕이 죽다
- ↑ 추측 시기는 722~724년이다. 생모 소덕왕후가 부왕인 성덕왕과 함께 산 기간은 720년 3월에 혼인해서 724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다. 형 효성왕이 721년~722년 사이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경덕왕은 722년~72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 《삼국사기》에 각주로 "옛 기록(古記)에는 765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767년에 죽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중국쪽 기록이 잘못 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되어 있다.
- ↑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국가 답게 신라는 토착적인 문화를 하대까지도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에 반해 새롭게 신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고려는 토착문화 대신 당대의 최신 시스템이었던 당제(唐制)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운용해야 했고, 따라서 한화정책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지금까지 전해진 관직명만 살펴봐도 삼국과 고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발해의 경우도 고려와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비슷한 관제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한 두 나라는 당제를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 ↑ 대략 이상기후나 이상현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 해가 없는 해보다 적은 정도로, 천구성이나 혜성과 초신성, 폭풍우와 벼락, 지진, 가뭄 등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 ↑ 다만 일본과의 관계는 의전 문제로 투닥투닥
- ↑ 아버지 성덕왕이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를 기리는 종의 주조 역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 ↑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24cm 정도 되지만 옛날의 길이 단위는 오늘날 단위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 ↑ 현재의 후쿠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