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

상위항목 : 빨치산,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1 6.25 전쟁기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부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이후 14연대 반란군의 패잔병들이 이현상의 지휘하에 지리산에 은거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국군의 토벌로 거의 전멸하여 정규군 간부급은 남은자가 없었다. 그래도 몇 십명의 남은 병사들은 이후 남부군은 물론 전남도당, 전북도당에서 간부급으로 활약한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하던 조선인민군들은 보급로가 끊기게 되어 후퇴하려 했던 병력중 낙오병,[1] 산으로 후퇴한 좌익세력중에 이현상이 북에서 재편성해서 내려보낸 병력을 규합한다. 이현상은 강원도에서 남로당의 실력자 이승엽과 만나 확대된 권한을 부여 받고 1950년 11월 중순 강원도 후평에서 부대를 재편, 스스로를 ‘남반부 인민유격대’라고 불렀다. 이때는 승리사단 4백명, 혁명지대 60명, 인민여단 1백50명, 사령부 직속부대 150명등 도합 800여명에 달했다.
강원도 후평에서 14일부터 남하하기 시작한지 며칠 안된 동년 12월 초순 월악산 언저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고 자칭하였다. 이름에서도 알수 있다시피 남한내 빨찌산인 ‘조선인민유격대’ 중에서도 남부 6개도 빨치산을 총괄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51년 1월 3일 문경, 제천 부근으로 이동하여 단양을 경유해 2월에는 속리산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5월 27일을 기해 그 유명한 청주시 공격하고 청주 교도소의 좌익 수감자들을 탈출시키는 사건을 벌인다. 전무후무하게 도청 소재지가 빨찌산에게 공격당한 이 일로 전국이 떠들석 하였다.[2]

한때 남부군은 남한의 남부 6개도당을 총지휘하는 사령부격이 되는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한국 산악지형의 특성상[3] 얼마가지 않아 쇠잔하게 되어가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된 것은 1953년 휴전협정 이후였다. 긴 휴전협정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남한의 남부군 유격대를 군인으로 인정해 북송해달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한 측이 빨치산을 귀찮게 생각해 북한에다가 '데려가달라!'고 제안했는데, 북한측은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은 빨치산 유격대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만을 보내왔다.

당시 남부군 유격대원들 대부분이 하나같이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운데다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서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라는 지시에는 인맥이 넓은 일부 간부들 이외에 유격대원들에게는 '하루빨리 죽으라!'는 거나 '그냥 투항하라' 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 결국 대부분이 투항하게 된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남부군은 여전히 활동을 이어갔지만 국군과 경찰 역시 지리산에서 적극적인 토벌전을 수행했으며, 여기서 국군에는 백선엽, 경찰에는 차일혁이 중심 인물이다. 그 결과 1953년 9월말, 남부군 지휘관 이현상이 전사했다. 이후에도 잔존 유격대원들의 산발적인 활동이 있긴 했었으나 그 활동은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대부분은 산을 내려와 '망실공비' 라는 명칭을 받고 군대가 아닌 경찰. 그것도 형사들의 감시 대상이 되어 살아가게 되고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비전향 장기수가 되어 다시 교도소로 보내졌다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풀려났다. 1963년 마지막 빨치산이라는 정순덕이 생포되었고 그 이후 더 이상은 잡히지 않고 있다.

물론 재건시도는 몇 차례 있었는데 북한 측에서 1960년대 말 남한 후방 지역에 제2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울진, 삼척 등지에 무장 병력을 침투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물론 실패했으며 이후에는 무장 빨치산 정책을 사실상 포기.[4]

1.1 시기적 명칭 변화

통칭 남부군으로 결성되었지만 명칭은 여러번 바뀌었으며 토벌대 쪽에서는 그냥 이현상 부대라고 불렀다. 당시 빨찌산은 각 도별로 도당체계로 움직였는데 남부군은 남부 6개도(충남북, 경남북, 전남북)를 총괄할려고 하는 원래의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도당과의 갈등으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는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현상에게 빨치산을 총괄하는 권한은 남로당계 박헌영·이승엽이 부여 한것이지만, 각 도당은 남로당 소속이 아닌 북한정권이 3개월간 인공시절에 임명한 것이며 북한에서는 이현상의 권한을 무시하는 명령을 자주 내렸다. 시기별로 명칭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제2병단
한국전쟁 전 빨치산 총 사령관인 남로당계 리승엽의 지휘 아래 지리산 일대 빨치산인 2병단이 설치 되었다. 산하 4개 연대 체제였고(6,7,8,9 연대) 2병단 사령관을 이현상이 맡았다. 주로 여순사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과, 이들을 따라 입산한 좌익세력들로 구성 되었다. 한국전쟁이전 거의 토벌되었는데 이후 이들이 남부군이 되었다.

2. 남반부 인민유격대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후평에서 붙인 최초의 명칭.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3.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50년 12월 초순 월악산 언저리에서 붙인 명칭. 가장 유명하며 남부지역 빨치산을 통솔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1951년 7월 덕유산 6개도당위원장회의에서 각 도당을 사단 체제로 개편하고 남부군 산하로 들어간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5]
이때 남부군 산하의 부대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비전투 보급부대)으로 개편된다. 다른 도당내의 무장세력 역시 각기 사단체제로 변경된다.

4. 독립 4지대
1951년 4월 북한의 결정에 따라 기존 도당을 해체하고 ‘지대’로 개편하라는 명령서가 산넘고 물건너 51년 10월 도착하였다. 이바람에 지난 7월 결정은 모두 나가리되고, 1951년 11월 14일 자로 남조선 남쪽 지역 빨치산의 최고사령부였던 남부군은 다른 도당과 동일한 위치인 일개 지대로 격하된다.[6] 즉 남로당계가 부여한 빨치산 총사령부의 권한을 북한 정권의 주류에서 부정한 것이다. 다만 연락수단이 없어서 빨치산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현상이 6개 도당을 장악하고 있는지 같은걸 북한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단체제 역시 지리멸멸하게 되어 남부군 직속이였던 81사단은 김지회 부대로[7], 92사단은 박종하 부대[8]

5. 제5지구당
1951년 8월 31일자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미해방지구에 있어 우리당 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결정 제 94호가 채택에 의하면 기존의 지대화 개편 방안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지대개편 명령을 보류하고 몇 개 도당씩 묶어서 지구당으로 개편하게 하였다. 이때 남부군(4지대), 전남(7지대), 전북(6지대), 경남 낙동강 서쪽(8지대), 제주도등 5개 지엮을 묶어서 제5지구당이였다. 남한 빨치산의 지휘부는 인민군 최고사령부 유격지도처에서 신설하는 당 중앙 연락부로 변경 되었다.
이 명령은 인편에 의해 릴레이식으로 전달 되느라 그해 겨울 국군의 1차대공세로 빨치산이 개작살 난 이후 1952년 초가을경에나 도착 하였다. 이를 실철하기 위한 1952년 10월 제5지구당 창설을 위한 6개도당위원장회의가 지리산 뱀사골에서 열렸는데, 문제는 다들 자신의 도당을 해체하기 싫어 했다. 결국 당의 지시에 꼼수를 부려 기존의 ‘지대’를 다시 도당으로 부활 시키고 이들 몇 개의 도당 상위에 지구당을 설치하기로 한다. 5지구당 위원장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맡기로 하고 부위원장을 전남·북 도당 위원장들이 맡았다.
이명령의 결정적인 문제는 이현상에게 가장 충성하는 충·남북 도당(3지구당)과 경북 도당(4지구당)이 제외 되었다. 당의 명령이니 따르기는 하지만 이현상의 힘은 대폭 줄어들었다. 6개도당 총사령부에서 2.5개 도당 사령부로 축소된셈.

6. 5지구당 및 남부군 해산
1952년 12월 북한 노동당은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박헌영·이승엽등 남로당 숙청당하고 빨치산은 1953년 봄에서야 중앙통신을 통해 이 소식을 듣는다. 이에 53년 9월 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확대회의가 지리산 토끼봉 아래 목동골에서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당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이현상등 남로당계를 빨치산 지도부에서 숙청 시키기 위해) 5지구당을 해체한다. 이현상은 모든 당적을 박탈 당하고 평대원으로 내려 앉았으며 이현상의 남부군의 전투 부대인 김지회부대도 전남도당 구례군당의 산하로 들어가고 이름도 995부대로 바뀌는 등 남부군도 사실상 해산 당한다.
또한 5지구당내의 다른 세력들은 과거처럼 도당 체제로 완전히 돌아간다.

2 1의 항목에서 종군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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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출신으로[9] 남부군 사령부 편집지도원[10][11]으로 종군한 이태(본명은 이우태 1922~1997)가 쓴 빨치산 수기. 이태는 남한출신의 좌익인사로 빨치산에 참여했는데[12][13], 이 책 자체는 남부군 활동에 치중을 하고 오히려 남한에서 투쟁중인 빨치산을 나 몰라라 한 북한의 높으신 분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많다.[14]

사실 이태는 빨치산 생활 꼴랑 17개월 한 것이 전부이다. 빨치산 역사를 제주 4.3사건혹은 여순사건부터 시작해서 54년 남도부체포까지로 본다면 약 5년반인데 이태는 그중 정말 일부만 보았다. 게다가 작가가 의도한 이책의 제목도 <남부군>이 아니였다. 왜냐면 작가는 짧은 빨치산 활동중에서도 절반만 남부군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북도당에 있었다. 남부군의 거의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 2권의 주인공인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자에 비하면 체험이 많이 부족하다. 그바람에 이태가 체포된 후 군경의 제2차대토벌작전 같은 빅 이벤트가 빠져 있는등 부족한 부분이 많다.

사실 작가는 9.28 수복으로 북한이 후퇴할때 입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딱히 공산당 지하당 활동을 한 것도 아니다.
소설 <빨찌산의 딸>, <장군의 후예(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 <실록 남도부>의 주인공들은 6.25 이전부터 활동한 구빨치들로 도당 유격대의 확실한 간부들이였다. 그들에 비해 비당원에 하급간부 였던 이태가 접한 정보들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책에도 빨치산에서는 시간 관념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나온다. 초판때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은 개정판이 나오면서 지속적으로 고치고 있으며, 당원/간부와 비당원/평대원의 중간적인 입장에 있던 그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내용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같은 전북도당 유격대에서 활동했던 황의지의 책과 비교해보면 유격대 사령관과 소대장의 입장과 시선 차이가 많이 보이니 비교해보면서 읽는 것도 좋다.[15] 예를들어 이태가 빨치산에 막 들어가자 마자 탈영병 때문에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데, 이태는 이에 매우 충격을 받는다. 황의지의 책에서는 그 탈영병을 지키던 보초가 자신의 부하였고, 형집행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등 자세한 배경 설명이 나와 있다.

이처럼 한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기도 하는 반면에, 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군경에게 쫒길때 700명의 부대를 둘로 쪼개서 300명이 변산 반도쪽으로 갈라져 나가는데 황의지는 작전상 전라북도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서 통제하기 위한다는 지도부의 계획을 써놓았는데 비해, 이태는 상황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도당지휘부와 반대 반향으로 간 부대는 시선끌이용 총알받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위에서 언급한 책들의 주인공인 구빨치 등은 자신들이 여순사건 이후 2년간 거의 대부분이 죽어가면서 빨치산의 맥을 이어 놓다가, 6.25가 터지자 자체적인 조직으로 각 도시, 기관들을 접수하여 인민군을 환영 하였는데 노동당 중앙당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인물들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니 요직을 죄다 차지하게 만드니 충격을 받는다. 이태는 이시점으로 부터 3개월 뒤에 입산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감지만 하고 있었다. 즉, 남부군만 읽고 빨치산에 대해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 이라는 것.
한국전쟁도 학술서 외에 수기류로 조망 할려면 사단장->군단장이였던 백선엽의 <군과 나>를 보아야지, 김용배 대대장->연대장의 일대기인 <세월의 이끼에 가려진 보석>이나 이무호의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 >을 읽어서는 한국전쟁 전체가 제대로 조망되지 않는다. 다만 특정 전투 또는 병사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리얼하게 다가갈 수 있는데, 이태의 <남부군>은 후자에 가깝다.

이태 자신은 1952년 생포되어 처벌후 사상전향하였고, 이후 정계에 입문해서 6대 국회의원도 지내는 등 야당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도 역임했다(…). 전쟁중 틈틈히 쓴 수기와 나중에 가필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일부는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 그대로 수록된다.[16]

87년 민주화 이후 두레출판사에서 초판이 발간되었고 이후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결합해서 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을 낸 후 위에서 언급한 황의지등과 연락이 되면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많이 고칠 수 있었다.(이옥자와는 그녀의 딸인 정지아가 <빨치산의 딸>을 출판한 후에 연락이 된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정순덕, 실록 남도부, 빨치산의 딸 등 빨치산 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고[17] 지리산 등지의 민간인 학살 사건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태는 일관되게 민중운동으로서의 빨치산 활동을 탄압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다. 또한 빨치산을 내팽개친 김일성 정권에 대해서도 매섭게 비판하면서, 이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이태의 이현상 전기는 북한의 이현상 암살설을 심도있게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과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종종 친북적이라고 오인받지만 사실 매우 반북적이고 반김씨일가적인 책이다. 이 책은 해방정국의 우익들의 횡포를 고발하고는 있지만, 지리산 빨치산을 버린자식 취급하여 그들이 남한땅에서 의미없이 죽도록 내버려둔 북한 체제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다. 이태는 만약에 북한측이 이념적 동지애, 아니 휴머니즘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전선 뒤에 남겨졌던 빨치산들도 귀환시킬 방법을 간구했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대부분 죽음으로 끝장난 이들과, 이를 토벌하기 위한 남한 군경의 전몰자를 고려한다면 김씨일가나 북한체제는 천하의 개쌍놈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책에 등정하는 이현상이나 남한출신 빨치산은 매우 영웅적이고 지사적으로 나오지만, 북한출신의 빨치산들은 마치 정복자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사상성도 매우 낮으며, 토벌전이 가열되자 제일먼저 투항하는 비겁자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코 종북주의자들이 좋게 볼 수 없는 책이다.[18]

초판 발행 1988년 7월 11일
개정증보판 발행 1990년 3월 15일[19]
상하합본판 발행 1993년 4월 26일
재편집증보판 발행 2003년 3월 29일(지도만 추가. 내용 추가X)
재편집증보 개정판 2014년 9월 20일[20]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항목에는 이책과 다른 빨치산 문학과의 비교가 되어 있다.

3 2의 항목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남부군(영화) 항목으로.

  1. 각지의 빨찌산들은 낙오병을 모와 유격대를 편성할려고 했지만, 대부분 강원도로 집결하여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거부하고 북상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빨찌산에서는 정규군 출신이 매우 드믈었다.
  2. 마침 일요일이라고 도경찰국장과 도경 주요간부들, 청주경찰서장들이 부강으로 야유회를 갔다. 어째 6월 25일의 한국군 수뇌부 같다.
  3. 높은 인구밀도로인해 근거지 마련이 불가능 한점, 근거지 마련이 불가능하므로 보급을 약탈로 대신해야 하는점, 약탈로 인해 주민들과 관계가 악화되어 지원을 받을 수 없는점 등등
  4. 물론 이후에도 무장 남파공작원은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이들 부대는 빨치산화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남한에 침투. 주요 군사시설 등을 정찰하거나 사보타주한 뒤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표적인 게 강릉 잠수함 사건.
  5. 다만 전남, 경북도당회의는 참석했지만 사단체제 개편 및 남부군 산하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 한다.
  6. 이전 버전에는 독립 4지대가 남부군의 원래의 명칭이라고 나와 있었지만 명칭은 시기적으로 변화 하였다.
  7. 여순사건의 주역인 14연대 반란군 장교
  8. 전남 구례 깡패출신으로 일본 해군 복무중 장교를 두둘겨 패고 탈영하였다. 좌익활동을 하다가 여순사건때 휩쓸려 입산한다. 지리산 호랑이
  9. 북한 국영통신의 보도과장이었으니 그럭저럭 높은 지위였다.
  10. 전지에서 군사신문(신문 이름은 모든 빨치산이 통일하기로 해서 전북만 빼고 전부 "~승리의 길"(~는 해당 지역명)이란 이름이었다.)을 쓰는것을 업으로 하는 정치부 소속 대원. 정치위원 보다는 세계단쯤 아래이다. 편집지도원도 좋게 불러줘서 그렇지 그냥 정치부 소속 기자로 일종의 간부대우이다. 지리산지부(=남부군)는 실질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11. 남부군에선 간부의 신원파악을 어렵게 하기 위해 일반 전투원들에겐 이름이나 직위를 제대로 말안했는데, 그래서 많은 병사들이 간부들의 이름이나 직위를 헷갈려 했다(정치부원을 사령부 참모로 알고 있다든지). 심지어 어떤 도 위원장은 아무도 본명을 모르기도 했다.(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의 본명) 결말부분에서 정치부의 정치위원인 그를 사령부 참모라고 착각하는 교도대원(최근에 복귀한 부상자들의 부대)이 나온다.
  12. 그래서 처음에는 소대장이였다. 중간에 사단 정치위원 이봉각이 편집지도원으로 임명. 북한 출신과 남한 출신과의 대우가 꽤 달랐다.
  13. 이것은 빨치산의 계보를 이해해야 한다.빨치산은 1948년 이전에 이미 입산해서 활동하던 구빨치와 1950년 인천상륙작전이후 낙오한 인민군들이 입산한 신빨치로 나뉜다. 이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구빨치는 대부분 사라지고 북한출신 신빨치들이 주축이던 시절이다. 더구나 이북 정권에서 남로당 계열이 몰락한 것이 남한내 빨치산의 역학구도에도 영향을 주엇다.
  14. 2년간의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은 빨치산 문제를 단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빨치산의 상당수가 낙오한 인민군으로 이북의 지시에 따라 전투부대로 재편돼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지금도 북한에서 빨치산을 제2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남로당계열 게릴라들로 남한에서 테러 및 약탈을 가하던 자들이라고 격하하며 그들은 우리랑 상관없다는 투로 주장하면서 교과서로 대충 가르친다. 때문에 탈북자들도 남한에 와서야 빨치산을 제대로 알게 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15. 남부군 초판에서는 이태는 황의지의 이름을 모르고 땅끄병단장 '학소' 동무로 알고 있었다. 책 출판후 황의지에게 연락이 와서 개정판 부터 본명이 나온다. 이태는 7개 병단중 하나인 독수리 병단 예하 4중대 2소대장이였으니 신분상 차이가 많이 난다. 황의지의 책에는 하급간부였던 이태에 대해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지 안나온다.
  16. 이 부분은 두 사람의 말이 다른데 이태의 경우는 자신의 수기가 이병주에 의해서 도난, 표절되었다고 하고 이병주는 이태로부터 그것을 허락받고 받아서 일부 발췌했다고 한다. 사실 관계는 당사자들이 알겠지만 이병주의 소설에서는 엄연히 이태의 수기라고 출처가 명시되어 있고 이태 자신도 비중있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다만 작중에서 이태는 좀 찌질하게 나왔다는게 문제.
  17. 물론 그 전에도 가끔 이런 수기가 나왔지만 대부분 반공물내지는 의도적인 하렘물(…)인 경우가 많았다.
  18. 이와 완전히 대비되는 책이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은 해당항목은 빨치산을 영웅적인 관념에서 이해 했는데, 북한 출신과 남한 출신 빨치산이 잠깐 다툼 했다가 공평한 처벌을 받고 스스로 늬우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화해한다. 이래서 태백산맥을 소설쓴다고 한다.
  19. 초판 발행이후 여러 생존 빨치산에게 연락이와 책의 오류를 지적해주어 여러군데를 수정하였다. 이때 연락온 대표적인 사람이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와 외팔이 부대장 최태환
  20. 위의 사진은 이책의 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