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20세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 좌파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장기간 생활한 시민, 자생적 게릴라, 조선인민군 포로와 남파 간첩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대다수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로 7년 이상의 형을 살고 복역한 뒤 사상을 전향하지 않은 채 장기복역을 한 사람들이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일부 간첩 등의 케이스[1] 를 제외하고는 전원 풀려났다가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재수감되었다가 이후 사회안전법이 폐지된 1989년을 전후해 거의 풀려났으나 이후에도 50여명의 장기수들이 여전히 석방되지 못하였고, 1991년에 33년을 수감한 왕영안씨가 석방된 이후에도 공론화되지 않다가 민가협의 목요집회에서 장기수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1995년에 최장기 장기수인 김선명(45년)이 석방되었고, 20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12월 31일에 신광수와 손성모가 석방된 것을 끝으로 비전향 장기수는 전부 석방되었다.
다시 말해 1988~1989년까지 출옥한 대다수는 평균 31년 정도 교도소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89년에 사회안전법에서 보안관찰법으로 바뀌면서 보안관찰 대상자로 한동안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98년 7월에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하고 준법서약제도로 바뀐 만큼 비전향이란 표현과 용어는 부적절하며 또 더 이상 수감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수란 표현도 적절치 않다는 논리로, 출소간첩 등 공안사범이란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을 권장하였지만,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에는 합의문에 표기된 대로 비전향 장기수라는 표현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2]이 송환되었을 때 북한 사회는 환영 행사로 떠들썩했다. 감옥에서 34년 간 살면서도 전향서를 쓰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으니 주민들에게 ‘충성심의 표상’으로 선전하기가 딱 좋았다. 북한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까지 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어떠한 수감시설이든 그 안에서 30년 이상을 살아남는다는 건 물론 폐인이 되지도 않고 나온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남조선의 감옥에서는 3끼 밥을 여러 종류의 국과 반찬과 함께 꼬박꼬박 주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 ‘단식투쟁’까지 할 수 있으며, 아프면 치료도 해 주고, 어느 정도는 자유까지 보장받는다니.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경비대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안명철 씨의 수기에는 이러한 주민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이인모가 이송된 후에 만들어진 북한의 현재 최고의 영화 「민족과 운명」의 속편 12~14부 이인모 편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이인모의 감옥살이를 담은 이 영화는 이인모가 감옥 안에서 혹독한 굶주림과 뭇매로 인해 다리가 불구가 되고 폐인이 되었고 배고픔에 쥐를 잡아먹는 장면을 담았다. 이것을 보던 경비대원 모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4년간 옥살이를 했으면 응당 시체가 되어야 할 사람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는 34년은 고사하고 3개월 간 구류장 생활을 하고 나면 사람은 완전 폐인이 되어 출소 후 5∼6개월 이내에 죽고 만다. 그리고 배고픔에 쥐를 잡아먹는 장면은 사람이 연기를 하면서 쥐를 먹는데 사람이 배가 고프면 연기는 고사하고 닥치는 대로 입안에 넣기 바쁜데 우습기 그지없었다." (안명철, 그들이 울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과거 남한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에게 저지른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북한의 수용소가 역사적으로도, 전세계적으로도 유별나게 잔혹한 것일 뿐 남한 교도소 역시 1990년대까지 인권을 무시한 처우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라 이후 인권위에서 조사에 나섰을 정도다. 수형자처우분류규칙에 따라 5등급으로 분류되어 수용자들에게 밥을 제대로 주지 않고 치료도 아예 제공해주지 않고 서적 소유와 접견, 서신, 운동을 제한/금지한 것은 물론이요, 이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는 강제 전향을 목적으로 이뤄진 가혹행위가 꽤 많았는데 전향 공작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교회사를 비롯하여 교도관들은 물론이요, 조폭이나 양아치 출신 강력범-일명 '떡봉이'들을 동원한 일방적인 구타는 예사였고, 0.75평의 비좁은 방에 화장실조차 갖춰지지 않은 곳에 가둬 두다가 풀어 주기도 했다. 단식투쟁을 하면 강제로 밥을 먹였으며 이 과정에서 숱한 희생자가 발생했고 일부는 강제 전향을 중단하라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도 했다. 당시 사회가 사상 문제로 격화되어 있다고는 해도 이는 분명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이다. 남파간첩이야 그렇다 쳐도 단순히 사회주의를 믿는 것만으로도 끌려오는 경우도 있었으니까......다만 남한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겪은 수감 생활조차 인도주의적으로 보일 정도로 북한이 너무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인모가 1989년경부터 <월간 말>지에 연재한 수기를 모은 수기집 <이인모 :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1992, 월간 말)>에서 나온다.
이인모가 송환된 이후 7년만인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자는 합의에 따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을 송환시키기도 했다. 빨갱이들 북한으로 올려 보내자고 하면서 김대중을 까는데 이분도 빨갱이를 북으로 올려 보내셨다.
여담으로 배우 문근영의 외조부인 류낙진은 과거 남로당 빨치산의 일원으로 비전향 장기수로 오래 복역하다가 출소 후 사망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인 권오석(1921)도 양민학살범이자 비전향 장기수였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루거나 등장하는 남한 영화로는 송환 (다큐멘터리), 선택 (극영화), 친절한 금자씨[3]가 있다. 그 외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씨의 자서전으로 '역사는 나를 한번도 비껴가지 않았다'와 이를 만화화한 '나는 공산주의다' 1, 2가 있다.
이 후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한측은 철저히 이용했다. 실제로 이인모의 송환은 당시 북한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고 그가 남한에 겪은 일들은 노동신문에 사설로 게시되어 호기심을 느껴 애독한 주민이 상당히 많았다 한다. 북한 당국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전사' 들이라며 연일 이들을 메스컴에 띄웠고 엄청난 혜택과 보상이 뒤따랐는데 실례로 여자와 결혼까지 시켜주었으며 (정력이 좋은 송환수 몇 인은 자식까지 낳았음) 평양에 거주할 수 있는 특권이 있어 좋은 집에 거주하며 북한에 있던 가족들 전원에게 영웅칭호를 주는 등 비전향 장기수와 관련된 주변의 친인척은 이미 당의 특권층을 형성했다.(참고로 북한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임 과거활동 이력을 철저히 따져 신분을 나누어 사회에서 배재하기도 이처럼 중용하기도 한다. ) 한 장기수는 북한의 3대세습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발표했고 장기수들은 매년 북한에서 결혼한 부인과 함께 집회를 가지고 찬양가를 부르는 등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있다. 최근 이들은 아직까지 남한에 억류되있는 장기수를 빨리 소환해달라는 인터뷰를 했다.
- ↑ 당시의 간첩은 제대로 간첩질을 하다가 잡히면 당연히 사형. 그 전에 잡히거나 남파 당시 발각되어 잡히는 등의 경우에도 무기징역이 기본으로 선고되었다. 그리고 무기징역은 원래 10년을 복역하면 가석방 자격이 주어지는 거지 필요하면 영원히 안 풀어줘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수십년 간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던 것이다.
-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종군기자로 활약함. 전쟁 말기인 1952년에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광주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걸 시작으로 대전교도소(1952~1958/1961~1968/1975~1978)-부산형무소(1958~1959)-광주교도소(1968~1975)-청주보안감호소(1978~1988)를 거치면서 36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출소 후 보안관찰 대상자로 살면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3년에 북한으로 송환된 뒤 2007년에 사망했다.
- ↑ 주인공인 금자씨가 복역했던 여자 교도소의 최고참이자 무기수인 비전향 장기수의 수발을 들어 주었고, 그 친절함에 자신이 죽기 전 유품으로 총 설계도를 넘기고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