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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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一赫(1920~1958.8.9).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경찰 공무원.

1920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일본인 경찰을 폭행한 사건으로 처벌을 피하기 위해 1930년대 중반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 활동을 벌였다. 다른 팔로군 출신들과는 달리 북한이 아닌 남한으로 귀국한 차일혁은 경찰계에 투신하여 6.25 전쟁 당시 반공 유격대를 결성하여[1]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반공산당 활동을 펼치다가 전투경찰대 2연대장에 보임되어 빨치산 소탕작전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휴전 후인 1953년 9월,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는 대공을 세웠다.[2]

그러나 차일혁은 무력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빨치산들을 감성적으로 설득하여 귀순시키는 방향을 택했고 덕분에 많은 빨치산들이 차일혁의 인간적인 태도에 감화되어 순순히 전향하면서 목숨을 건졌다.[3] 그리고 사살당한 이현상의 시신도 차일혁이 수습하여 화장한 뼈를 직접 철모에 넣고 M1 개머리판으로 빻은 유골을 하동의 소나무 숲에 뿌려 수목장 시켜줬다고 한다.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차일혁의 부대에 태극무공훈장이 세 개나 상신 되었으나, 정작 부대장인 차일혁은 한 개도 못 받았다고.

그리고 한창 교전중인 1951년 5월, 상부에서 지리산 내의 사찰과 암자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는 녹음기 때 빨치산들이 은거할 만한 장소를 사전에 아예 없애 버리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화엄사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맡고 있던 8사단 대대장 방득윤 중령은 화엄사를 불태워 버린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고, 이에 같이 화엄사 지역을 방어하던 차일혁이 해결책을 내놓았으니 그것은 화엄사 내 대웅전을 포함한 건물의 문짝만 뜯어 불태운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이 명령을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여 문짝만 뜯어내 소각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의견에 방득윤 대대장도 찬성하여 화엄사는 문짝만 제외하고 전부 불타 없어지는 횡액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외 화엄사 인근의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에 대한 사찰이나 문화재도 폭격이나 소각을 피하는 쪽을 택했고, 그 덕분에(?) 차일혁은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 등의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4]

휴전 후 차일혁은 1954년 충주 경찰서장 재직 시 충주직업소년학교를 세워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지역 밀착적인 정책으로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정작 높으신 분들에게 찍힐대로 찍혀 있던 차일혁은 일제시대 그가 복무했던 조선의용대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같이 활동한 부대였고, 빨치산 토벌시 온정적인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빌미로 좌익 용공분자로 몰려 코렁탕 취식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현상 사살등의 공로를 감안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5]

아무튼 이런저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차일혁은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떠돌게 되었고, 공주 경찰서장으로 재임중이던 1958년 8월 9일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익사했으니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6] 대한민국 경찰의 귀감으로 남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차일혁 총경이 토벌작전 당시 사용하던 유품의 일부가 경찰 박물관에 있으며 사이버 박물관도 있다. 사이버 박물관 주소는 이곳이다.

차일혁은 2011년에야 6.25때 공적을 인정받아 뒤늦게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화엄사 등 사찰과 문화재를 보존하는데 힘쓴 공로로 조계종(1958년)과 문화재청(2008년)의 감사장을 받았으며, 1998년에는 화엄사 경내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차일혁 총경의 자사전 및 빨치산 토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참고

그의 아들인 차길진은 불교 법사와 역술인, 생명 컨설턴트 나쁘게 말하면 점쟁이로 일하며[7] 아버지를 기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차길진의 아들, 즉 차일혁의 손자인 차현석은 연극 연출가로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오페라를 만들어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김성모 화백의 대본소 만화 빨치산이 바로 이 사람의 전기 만화라고 할 수 있다. 개나리 스텝으로 이현상을 개발살내는 차일혁 그저 그런 대본소 만화는 아니고 극화된 면이 있고 어시의 솜씨가 많지만 김화백의 타 괴작들에 비하면 나름 준수한 편. 그래서인지 오히려 묻힌 감이 있다.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인 장하림과도 비슷한데, 장하림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OSS에서 복무한 부분은 장준하나 박순동[8]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015년 6월에 차일혁을 비롯한 한국전쟁의 영웅을 기리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우표 발행 안내 페이지

  1. 팔로군 출신으로 반공 인사가 되는게 이상할지 몰라도 의외로 그런 케이스가 아주 없지는 않다. 후일 법학자로 유명한 신상초의 경우도 학도병 탈영 → 팔로군 활동의 길을 걸었지만 여생은 반공 인사로 살았다. 신상초는 특히 해방 후 팔로군을 탈주하여 귀국한 혐의로 북한 정권에 체포된 적도 있었다.
  2. 단 이 공로의 문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이전에 국군에 사살당한 이현상의 목만 잘라갔다는 설, 북한에서 처리한걸 시체만 주워 왔다는 설 등등. 차일혁 본인도 수기에서 이현상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이현상 항목 참조.
  3.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전에서 경찰과 빨치산 간의 관계는 상호간에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특히 양측의 포로 대우는 뭐 효수 내지 참수는 기본이고 인육 취식의 도시전설도 있을 정도니. 백선엽이 이끄는 정규군이 참여 하면서 관대한 처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는데, 차일혁은 경찰임에도 빨치산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방침을 고수했다.
  4. 에밀레 종으로 유명한 오대산 상원사의 경우도 흡사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한국전쟁 당시 70세가 넘은 방한암 스님이 홀로 절을 지키며, 절을 태우러 온 군인들에게 "당신은 장군의 부하요,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나는 부처님을 따를 테니 당신은 장군을 따르시오."라고 했다. 이에 군인들은 그냥 법당의 문짝을 떼어 불사르고 떠났다고 하는데 당시 비슷한 일화가 다수 있었던 것 같다.
  5. 전후에 이런 혐의가 걸리면 중형을 받는건 거의 떼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 여러 논란이 있지만 경찰 고위간부였던 최능진이 처형된 것이 대표적인 사실이다.
  6. 차일혁의 아들인 차길진씨의 증언에 따르면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강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19시간 뒤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평소 차일혁이 수영을 잘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자살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7. 그밖에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을 맡고 있기도 하다.
  8. 태백산맥의 조정래의 인척. 미얀마 전선 → 탈영 → OSS 복무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김범우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김범우나 장하림과는 달리 해방후 정치와 무관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