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오대십국시대)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907 ~ 1279오대십국(五代十國)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당항(黨項)
송(宋)
,대리국(大理國),
북송(北宋)백고대하/서하(西夏)
남송(南宋)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십국(十國)
마초(馬楚)오(吳)오월(吳越)전촉(前蜀)민(閔)남평(南平)남한(南漢)후촉(後蜀)남당(南唐)북한(北漢)

南漢
909년 ~ 971년

1 개요

중국 오대십국시대 10국 중 하나로, 당나라 멸망 후 지금의 광둥 성과 광시 지역을 지배한 국가.

건국자 유은(劉隱)의 선조는 후난성에 있다가 조부의 대에 복건으로 이주하여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아버지 유겸(劉謙) 때 광저우로 옮겨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우고, 봉주[1]자사가 되었다. 유은의 선조는 아랍계라는 설도 있다.

유겸이 사망한 후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사가 된 유은은 정해군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904년 정해군절도사가 되었다. 그후 광동 전지역과 광서의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다. 거기에 남해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원의 세력이었던 후량은 909년 그를 남평왕에, 911년 남해왕에 임명했다.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뒤를 계승한 동생 유엄(劉龑)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 전한, 후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한(漢)이라고 고쳤다. 남한의 이름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가 명명한 것이다.

전란의 시대라 압도적으로 군인주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오대십국 시대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문관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지방관은 전부 문관이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당나라 시대 중앙에서 권력다툼에서 패한 관료들의 좌천지역으로 선택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었고, 거기에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한 이들도 많아, 이런 사람들이 남한 세력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유은 자신도 이러한 문관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 지역을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궁정은 크게 윤택하였다.

그러나 942년 유엄의 사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다. 즉 유엄의 3남 유분[2]이 뒤를 잇자, 그를 동생 유성[3]이 살해하고스카?, 자신이 즉위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제위를 안정시킨 뒤, 이윽고 북쪽의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출병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원정의 성공 후 자만한 유성은 동생들의 아내를 후궁으로 들이는 등 품행이 불량한 행동을 일삼고, 이윽고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면서 내부는 부패하였다.

유성은 958년에 죽고 장남 유창[4]이 계승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매우 강해 문관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모두 환관으로 메우면서 유창의 조정을 거의 환관이 독점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창이 등용하려는 인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세를 해야만 등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태로 민심은 떠나고, 971년 송나라의 침공에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유창은 재물을 갖고 도망치려 했으나 신임하던 환관에 의해 붙잡혀 송나라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영토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유창을 시작으로 일족은 카이펑으로 옮겨져 왕족으로서 대우받았다. 유창은 송나라의 좌천우위대장군이 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에 추봉되었다.

2 역대 군주

대수묘호시호재위 기간비고
(추존)열조(烈祖)양황제(襄皇帝)유은(劉隱)874년 - 911년
1고조(高祖)천황대제(天皇大帝)유엄(劉龑)917년 - 942년
2상제(殤帝)유분(劉玢)942년 - 943년원래의 이름은 홍도.
3중종(中宗)문무광성명효황제(文武光聖明孝皇帝)유성(劉晟)943년 - 958년원래의 이름은 홍희.
4후주(後主)유창(劉鋹)958년 - 971년원래의 이름은 계흥.
눈치챘겠지만 이상하게도 황제들이 가명쓰길 좋아한다.
  1. 지금의 광동지방
  2. 본명은 유홍도
  3. 본명은 유홍희
  4. 본명은 유계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