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바

로마의 역대 황제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11대 도미티아누스12대 네르바13대 트라야누스
5현제 목록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름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생몰년도30년 11월 8일 ~ 98년 1월 27일
재위기간96년 9월 18일 ~ 98년 1월 27일

1 황제 즉위 전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로마 제국의 제 12대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첫 황제이다. 그와 동시에 오현제 시대 다섯 명의 황제 중 첫 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네르바의 증조할아버지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1]는 공화정 시대 말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네르바의 할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친구이자 조언자였고, 아버지는 칼리굴라 시절 집정관을 지냈다. 한마디로 네르바는 몇 안 되는 공화정 시대로부터 내려온 명문가에 속해 있었고, 원로원의 중진이었다.

네르바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했고, 71년[2]에 집정관을 지냈다. 90년에 도미티아누스는 사트루니누스의 반란이 있었을 때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직에 올랐다.[3]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미티아누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는 네르바가 원로원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중진이었음을 의미한다.

2 황제 즉위

도미티아누스가 96년 암살당하자, 네르바는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의해 황제에 옹립되었다. 고령인데다 자식도 없었던 네르바를 황제로 지목한 것은 조종하기 쉬운 노인을 자리에 앉혀 원로원이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4] 네르바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단죄당하는 원로원 의원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5] 동시에, 네르바는 사재를 전부 기부해 사심이 없음을 밝힌다.

제위계승이 잡음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덕분에 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자리에 노인이 들어앉은 것에 근위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군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고 지지기반이 없는 늙은 황제는 계승자도 없었다. 군대는 폭동을 일으켰고, 네르바는 유폐되었다.[6] 이 과정에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내전 직전까지 갔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3 평가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네르바가 이룬 업적은 적다. 포럼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의 이름이 붙어 네르바 포럼이 되었지만, 이는 도미티아누스가 착공을 지시했던 건축물이다.[7] 그래서인지 나무위키에는 오현제 중 가장 늦게 등재되었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이외에 한 일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지명했던 결단은 내전 직전까지 몰린 국가를 구해냈다. 거기에 반은 타의였지만 양자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내전 없이 성립되었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는데[8] 이는 네르바의 공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치세를 일컬어 황제의 권력과 시민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여기에서의 시민이란 곧 원로원. 다르게 말하자면 여태까지 권력을 가진 황제들은 좋든 나쁘든 원로원을 호구로 만드는 데에 열심히 몰두했다.
  1. 황제 네르바와 이름이 같다.
  2.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에 집권했다. 다시 말해 베스파시아누스의 중요한 측근으로, 반정공신에 속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3. 황제와 함께 집정관직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형식상으로 집정관은 로마의 최고 관직이었고, 황제와 동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4. 도미티아누스가 실각한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는데도, 원로원은 사후 도미티아누스를 단죄한다. 원로원을 억압했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했지만, 이는 원로원이 원로원 주도의 정국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5. 이는 하드리아누스 시기를 제외한 오현제 시대 내내 이어진다. 하드리아누스는 집권 과정에서 몇몇 반대자들을 숙청해야 했다.
  6.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7. 그에게 기록말살형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서민들의 항의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 현재의 나보나 광장 - 의 이름은 그대로 남는다.
  8. 네르바의 제위는 원로원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의 원로원은 다른 때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