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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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자결로 단절된 뒤, 베스파시아누스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진 내란기를 종결시키고 서기 69년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으며, 티투스가 1년만에 죽은 후에는 티투스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암살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을 자가 없고 네르바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왕조의 존속기간은 30년 정도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 모두 내란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 황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도 고대에는 평판이 나빴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재평가[1]되고 있다. 바꿔 말해서 로마의 최전성기로 가는 기틀을 닦은 왕조.
2 플라비우스 가(家)
1세기 무렵 로마에서는 오랜 세월 원로원과 로마 사회의 주축을 담당해 온 명문 귀족 가문들이 서서히 쇠락해가고 있었고, 이를 대체하여 소위 '평민 귀족'이라고 불리는 평민, 기사계급 출신의 신흥 가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플라비우스 가문도 이 중 하나였는데,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플라비우스 가문은 어디서 굴러먹다가 등장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2]였다. 처음으로 플라비우스 가문이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할아버지 때의 일로,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 밑에서 백인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는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면서 꽤나 부를 축적가렴주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기사계급으로 신분을 격상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 대에 이르러서 마침내 플라비우스 가문은 원로원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그후로도 플라비우스 가문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영국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서기 51년 집정관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이어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동으로 파견된다.
3 집권
베스파시아누스가 약 8만 명의 병력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한창 진압하고 있던 서기 68년 네로가 원로원의 불신임[3]당하고 자살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뒤를 이은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전령을 보냈지만 갈바 역시 집권 후 반 년이 겨우 지난 서기 69년 1월에 오토에게 암살당했고, 그와 동시에 게르마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황제를 자칭하면서[4] 로마는 내전기로 치닫는다.
오토와 비텔리우스의 내전에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은 채 간을 보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이 비텔리우스의 승리로 끝난 7월 1일 측근들의 충고를 듣고 마침내 황제를 자칭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전반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리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는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경험치가 거의 만렙에 달했던 정예 병력만 8만명에 달했으며, 이 당시 로마의 식량 공급을 전부 책임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던 이집트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의 손 안에 있었다.[5] 여기에 도나우 강 일대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로마군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던 것은 덤.[6]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손쉽게 비텔리우스 세력을 제압했고[7],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황제로 승인한다. 또다시 내란으로 무정부사태가 재발할 것을 우려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즉위한 다음 해인 서기 70년, 플라비우스 가문의 황위 세습권을 승인해 줄 것을 원로원에게 요구했고 원로원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마침내 플라비우스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4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들의 개별 항목을 참조할 것.
4.1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정확히 10년을 통치했음에도 정말 남아있는 사료가 눈물나게 적다(...) 그렇지만 몇 가지 업적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네로 황제와 내전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박살난 로마 제국의 재정을 되살려냈으며[8][9] 또한 유대인의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서 내란기에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이 제국 변경 곳곳에서 일으킨 반란 역시 즉위 이후 수월하게 진압해내면서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로마의 랜드마크로 남아있는 콜로세움 역시 베스파시아누스 시기 빵과 서커스의 일환으로 세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었는지를 모르는게 함정
4.2 티투스 황제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황제였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즉위 직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폼페이가 날아가버렸고, 겨우겨우 이게 해결되나 싶었더니 수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해버린 것. 즉위 내내 재난 대책에만 몰두하다가 병에 걸려 사망(...)
4.3 도미티아누스 황제
개요 항목에서 상술했듯이 고대 로마 시기에는 미친듯이 까였고, 죽은 뒤에는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폭넓게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근처까지 제국의 영역을 확장한 데 이어,루마니아 쪽에서 미친듯이 털리고 굴욕적인 강화조약 맺은게 함정 형 티투스가 미처 끝내지 못한 로마의 화재 재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또한 평가절상을 통하여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 것과 게르마니아 일대에 대규모 방벽을 세워놓은 것도 주요한 업적. 다만 도미티아누스는 서기 93년 게르마니아 총독이 반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이후로 심심하면 원로원을 내란죄로 가혹하게 탄압[10]해서 원로원의 반감을 사고만다. 그리고 이런 공안 정국의 연속 와중에 자기 역시 암살당하고 만다. 도미티아누스의 암살 이후 네르바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창설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의 짧은 치세를 뒤로 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5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베스파시아누스 | 69년 7월 1일 ~ 79년 7월 23일 |
2대 | 티투스 | 79년 7월 23일 ~ 81년 9월 13일 |
3대 | 도미티아누스 |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
- ↑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고자 라인강과 슈바르츠발트 일대에 설치한 게르마니아 방벽.
- ↑ 특히나 전 왕조가 로마에서 명문 귀족 가문 중에서도 가장 명문으로 꼽히는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합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대비되었다.
- ↑ 네로를 국가의 적
퍼블릭 에너미로 규정해버렸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오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갈바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시기의 통신 사정상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야 로마에서 오토가 갈바를 암살한 것을 깨달았던 것, 어쨌든 비텔리우스는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달려 보자'라면서 오토고 갈바고 신경 안쓰고 신나게 자기 휘하의 전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온다(...)
- ↑ 다만 실제로 식량 공급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언의 협박으로 '까불면 끊을 수도 있어'라고 행동했을 뿐.
- ↑ 도나우 강 수비대는 사실 맨 처음에는 오토를 지지했다가 내전에서 비텔리우스에게 패하면서 온갖 굴욕을 당한다. 그리고 그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다가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베스파시아누스 편에 붙어버린다(...)
개판일세 - ↑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본인은 유대인 반란을 마저 진압하겠다는 핑계로 비텔리우스 세력과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비텔리우스와의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최측근이자 황제에 오를 것을 간정했던 킹메이커 무키아누스.
- ↑ 근데 정말 온갖거에다가 세금을 다 거두어서 쪼잔하다고 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게 공중화장실에서 나온 대소변을 퇴비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둔 것. 덕분에 현대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 이름보다는 공중화장실을 상징하는 은어로 남아있다고(...)
- ↑ 소위 '오줌세'와 관련되어 야사도 남아있는데 다음과 같다. 아들 티투스가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고 항의하자 베스파시아누스가 주변의 은화를 한 움큼 쥐어와서는 티투스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한 말이 '지린내가 나지 않느냐. 이건 오줌세로 거둔 세금인데'(...)
- ↑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20명의 원로원 의원이 반란죄로 처형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