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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 Staunton Dike, Jr. (1918.5.19 ~ 1989.7.23)
파일:Attachment/dike234.png
왼쪽이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의 노먼 다이크, 오른쪽이 실존 인물 노먼 다이크.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등장인물. 계급은 중위에서 중령까지 진급. 포지션은 이지중대의 5번째 중대장, 그리고 별명이 참호맨. 배우는 피터 오 메라.
1 전쟁 이전
노먼 다이크는 1918년 5월 19일 미국 뉴욕 주 연방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1941년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42년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서도 공부하였으나 입대 전에는 졸업을 하지는 못하였다. (전후 1947년에 졸업하였다.)
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허버트 소블은 그래도 엄격한 규율과 스파게티훈련으로 이지 중대의 전투력을 높였다는 점을 참작할 여지라도 있지, 이 인간은 찌질의 극치다. 브라운 대학 출신에다 든든한 줄을 가진 엘리트로 중대장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남자답고 낙천적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바스토뉴 포위전을 겪으면서 경험 부족과 우유부단한 통솔로 중대원들의 신뢰를 크게 잃게 된다. 립튼이 말하기를 "그가 안 좋은 지휘관인 이유는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가 아니라 아예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이 공략을 앞두고는 중대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카우드 립턴 중사마저도 윈터스에게 다이크 밑에서는 전투를 치룰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할 정도. 그의 찌질한 행동은 나열하자면 너무 많지만 그 중의 압권은 중대원들이 포격을 당하고 있을때 1차 포격이 멈추자 어디선가 허겁지겁 기어나와선 립튼에게 "여긴 자네가 맡아! 난 지원 요청하러 갈게" 하고 또 사라졌다.[2][3] 이후 포이 공략 전투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4]중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자 빡친 윈터스에 의해 그 자리에서 바로 해임된다.[5] 보통 같았으면 몇 계급은 강등당하거나 불명예 제대하는게 당연하지만 든든한 배경 때문에 오히려 사단본부로 전출을 가게 되고 종전시 중령까지 진급하였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한 드라마 제작진은 건초더미 뒤에 짱박힌 그에게 독일군의 마지막 퐈이야를 먹여 산화시켜버린... 줄 알았는데 마지막 퐈이야 장면을 유심히 보면 건초더미가 날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뛰어나오는 세 명이 있다. 그들중에서 가슴쪽에 갈색 홀스터를 착용하고 가죽장갑을 한짝만 낀 채 머리에 쓴 헬멧을 붙잡고 허둥대며 뛰는 사람이 다이크다. 제길기록에 의하면 다이크는 전투지휘관으로써는 최악이었지만 사단 본부 전출 후 행정장교로써는 그럭저럭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스토뉴 전투를 위해 이동하기 직전에 갑툭튀해서 윈터스에게 '지휘관이 결혼식 때문에 아직 런던이라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징징거리다가 윈터스가 '니가 더 문제야, 탄약하고 물자도 안 챙겼으면서 뭘 징징대냐?' 라며 까이자 깨갱하는 장면도 있다.
이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내용만 가지고 그를 지나치게 깎아내린 묘사다. 그가 이지 중대에 배속되기 전 받은 동성 훈장은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사방에 흩어진 공수부대원들을 결집하여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아인트호벤과 아른헴을 잇는 연합군의 보급로를 지켜냄으로써 받은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동성 훈장은 1945년 1월 3일 바스토뉴에서 독일군과의 총격전 도중 노출된 곳에 쓰러진 부상병 셋을 본인이 직접 옮겨온 것 때문에 받게 된 것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묘사된 것처럼 겁쟁이에 무책임한 허당이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벨기에 포이 공략에서 보여준 그 어설픈 행태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이 문서에서처럼 인격적인 모독까지 받아야 할 인물은 아닌 것이다.
3 전후 활동 및 기타
그는 한국전쟁 당시까지 군에 복무하였으며 1957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47년엔 끝내지 못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여 학위를 취득하는 한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일본의 판무관으로 근무하면서 CIA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후 군대에 있으면서 당시 유력한 전략 자원인 우라늄의 채광 업체에서 근무하면서 부사장직까지 올랐다. 전역 이후에도 이사직을 잠시 유지하였으나 1959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1960년에는 스위스에 영주권을 획득한다. 1989년 6월 23일 스위스에서 사망하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보여준 그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악의적었다는 지적이 있다. 만약 극중에서처럼 그렇게 무능하고 자기 몸만 사리는 인물이었으면 은성무공훈장, 동성무공훈장 2개[6]와 퍼플 하트를 받은 기록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8] 사료 교차 검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장교노릇에 당황하셨지만 이내 각성하신 것이다
훈장을 토대로 상상해보자면 이지 중대 배속 전에는 훈장을 받을 정도로 나름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훈장을 받을 만한 공적을 세우고 린 콤튼처럼 정신에 상처를 입어 PTSD에 시달리는 상태로 치료받지 못하고 이지 중대에 배속 받은게 아닐까 추정해본다. 극중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매번 어딘가의 참호에 숨어있고 대대와의 연락을 취하겠다며 사라지는데 다소 억지스럽긴 하지만 혼자서 PTSD를 극복하려고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버둥을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 ↑ 이는 후일 다이크의 군 생활 시 여러 사람을 빡치게(...) 만든 그의 든든한 뒷배경 중 하나가 된다.
- ↑ 이 때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다이크를 어이없게 쳐다보며 조지 러즈가 하는 "What the FUCK?"(더빙판에서는 "저런 개새끼!") 가 명대사.
- ↑ 일설에 의하면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도 있다.
- ↑ 완전히 정신을 잃는다.
- ↑ 이제까지 동고동락한 이지 중대원들이 다이크의 개삽질로 인해 쓰러져 나가는 걸 보자 냉정하고 침착한 윈터스마저 부대대장이었음에도 총을 들고 뛰쳐 나가려 했다가 싱크 대령에게 저지당한다.
- ↑ 한번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사선에 노출된 부상병 세명을 구출해서 받은 것이다. (Union Club World War II Records 1940 - 1947, "Norman S. Dike, Jr.")
- ↑ 미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 대전 당시에도 절대 훈장을 남발하는 국가가 아니고 더군다나 은성무공훈장이나 동성무공훈장은 절대 장교라고 거저 주어지는 성격의 훈장이 아니다. 부상병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를 받았다는 말도 일단 부상을 당할 만큼 몸 사리지 않고 싸웠다는 뜻이 된다.
- ↑ Obituary: Norman Staunton Dike Jr.
- ↑ 고립되서 의료품이 극히 부족한 상황이었던 만큼, 유진 로의 요청에 누구나 다 자신이 가진 몰핀과 의료도구를 넘겨줬다. 그런데 다이크는 그 요청에 대한 첫 반응이 '그랬다가 내가 총맞으면?' 이었다. 한마디로 다이크가 겁쟁이가 아니다라고 강변하기에는 다른 헌신적인 장교들과 부사관들에 비하면 다이크의 반응은 분명히 장교답지 못했다. 그조차도 PTSD 때문이다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 ↑ 마지막 묘사된 모습은 그냥 단지 일시적 공황상태라고 해도 무방하다. 진짜 중증의 PTSD 환자였다면, 자신의 든든한 백을 이용하여 일찌감치 좀더 안전한 후방사단으로의 전출을 기도했어야 했고, 또한 아무리 행정보직으로 옮겼다고 하나 1957년까지 군에 복무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겁쟁이는 아니었다해도 본인 및 부하들의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강한 압박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전투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크게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전쟁이 거의 막바지라고 생각하고 뽀대나는 군 경력이나 쌓자는 생각이었는데 아르덴 공세 때문에 101공수사단이 갑자기 바스토뉴로 투입되어서 최전선에서 싸웠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에 적응을 못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