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흠

盧欽
(? ~ 278)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자약(子若). 노육의 아들. 노식의 손자.

범양군 탁현 사람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담박한 성격으로 앞일을 헤아리는 식견이 있으면서 경서, 사기에 뜻이 깊었으며, 어려서부터 명예와 지위가 높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청빈하게 살았다. 같은 군 사람인 장화가 가난하고 나이가 어려서 고아가 되자 동네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지만 노흠만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겼으며, 노흠은 효렴에 천거되었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상에게 벽소되었다.

조상의 동생도 과거에 노흠을 수중에 넣겠다고 했지만 노흠은 조상의 자제가 법도를 함부로 범해 좋지 않다고 했으며, 조상이 이를 깊이 받아들여 조상의 동생에게 벌을 주었고 상서랑이 되었다가 249년에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주살되자 면직되었다. 이후 시어사에 임명되고 아버지의 작위인 대리정후를 계승했으며, 낭야태수로 옮겼다가 사마의가 태부가 되자 종사중랑으로 벽소되었고 낙양을 나와 양평태수, 회북도독, 복파장군 등을 역임했고 노흠의 치적은 칭찬받았다.

산기상시, 대사농, 이부상서 등을 역임했고 대량후로 작위가 올랐으며, 265년에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해 황제에 오르자 도독면북제군사, 평남장군, 가절 등에 임명되고 여러 물품과 함께 3만 전을 받았다. 노흠이 출진해 너그러움과 엄격함으로 변방의 근심을 없앴고 낙양에 들어가 상서복야에 임명되었다가 시중이 덧붙여졌다.

노흠의 생활이 청렴하고 가난해 비단 100필이 하사되었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천거해 청렴하고 공평함을 실현했다고 칭송받았으며, 278년에 사망하면서 위장군에 추증하면서 의동삼사로 삼았고 여러 물품과 3만 전을 하사했다. 노흠은 예법으로 인한 제도에 근거해 아내가 죽자 지팡이를 갖추고 규칙대로 상의 기간을 마칠 때까지 외출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시, 부, 논란 등은 수십 편이 되었고 작은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