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1 祖上

자기 세대 이전의 모든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반댓말은 후손이다.

일찍이 유교 문화가 강한 동아시아권에서는 특히 조상을 잘모시는것이 매우 중요했다.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2가지가 바로 손님(심지어 그냥 찾아온 거지라도)을 융숭히 대접하는 접빈객(接賓客)과 제사를 지내는 봉제사(奉祭祀)였다. 봉제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집안에 자랑스러운 조상이 있으면 고개가 으쓱해질 수 있지만(ex -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부끄러운 조상이 있으면 고개를 들기도 힘들다.(ex - 을사오적) 그리고 훗날 죽은 자신들을 모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을 똑바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건 당신이 있게 해준 조상 앞에 당당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일례로, 미 육군의 조지 S. 패튼 장군은 초급장교 시절 전투에서 겁에 질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가, 얼빠진 자기를 데리러 내려온 조상들의 빡친분노한 모습을 보고는, 죽어서 조상들을 대하는 게 더 겁나(…) 열심히 싸워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조상의 죄를 들어 후손을 욕하거나 처벌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옳지 않다. 따라서 조상 중에 부끄러운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후손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조상이 한두명도 아니고 그중에 죄 안지은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후손들이 원죄를 지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현대법치국가들 중에 연좌제가 왜 인정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길거리에서 1~2명 정도의 사람이 기운을 좋게 하기 위해 조상님의 원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하면 냅다 도망쳐라.

또 후에 오는 것이 발생, 발전하는 데 있어 토대가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2 曹爽

(? ~ 249년)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으로 는 소백(昭伯). 대장군 조진의 아들로 조희, 조훈, 조언의 형.

2.1 정사

조신한 성품으로 어릴 때부터 황궁을 출입해서 황궁의 예절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조예와는 어린시절부터 친근했다. 조진의 아들이라는 점도 있어 황족 대우를 받았으며 조예 사후 탁고대신으로 병권을 장악했다.

본디 조상은 나이로도 사마의의 아들 뻘이었고, 공적도 거의 전무한 낙하산에 가까웠기에 조예의 탁고를 받아 섭정을 맡기에는 무게감이 턱없이 부족했다. 조상이 탁고를 받은 것은 황실의 종친이라는 신분과 중서를 장악하고 있던 유방, 손자의 추천, 다른 고명대신인 사마의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안배에 가까웠고 조상도 이런 처지를 알고 있었는지 초기에는 사마의를 아버지처럼 모셨고 모든 국사를 사마의와 의논하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상이 보정대신이 되면서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절에 소외되던 인사들이 대거 기용됐는데, 이들은 사마의와 조상의 대립구도를 부추겼고, 이에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하도록 상주한다. 이 상주는 받아들여져 사마의는 태부로 승진했는데, 표면상으론 승진이었지만 명예직에 가까웠던 태부의 특성상 사마의는 태부로 밀려나면서 사실상 정치에서 실각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린 놈이라고 얕보던 백전노장 사마의를 일시에 관광태우고 정권을 장악한 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상 자체는 사마의와 달리 별다른 공적이 없는 낙하산 인사였기에 한계가 뚜렸했고, 이에 조상은 244년 하후현과 함께 촉나라를 공격해 낙곡대전을 일으키지만 왕평, 유민의 반격으로 참패하고 만다.

참패하고 돌아온 조상은 일족들로 도성의 군사를 장악하게 하고 더욱 위세를 부리며 사치와 향락 빠진다. 동생 조희가 간언했지만 소용 없었다. 조상의 부하 이승이 사마의를 방문했었는데 사마의는 병이 위중한 척 하여 자신의 쇠약한 형상을 보여주었다. 이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이라 여겼다. 이승이 이에 대해 조상에게 말하자 조상은 사마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249년 정월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사마의가 조상을 회유하기 위하여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며 단지 파면에 그칠 뿐 사마의가 절대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 맹세한다. 조상이 사마의의 회유에 병권을 넘기고 은퇴하려고 하자 환범은 외병을 불러 맞서자고 했고 사마 노지, 주부 양종도 이를 말렸지만 조상은 결국 병권을 반납한다.

얼마 뒤 사마의에게 역모죄로 다시 트집을 잡혀 그의 심복 하안, 환범, 이승, 정밀, 필궤, 등양을 포함한 삼족이 모두 멸족되었다. 장제는 조진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상만은 살려주자고 진언했지만 사마의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2.2 평가

2.2.1 긍정적 평가

낙곡대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상 정권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고, 고평릉 사변 직전까지도 이렇다 할 사건이나 사고 없이 건재해 보였다. 게다가 정사의 기록상으로도 주로 조상 일파의 사치나 권력의 남용 등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비난하는 경향이 강한데, 당나라 대의 기록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기사도 보이기 때문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마씨가 세운 서진 왕조의 치하에서 조상의 실정이 과장되었으며, 실상은 조상과 그 일파가 기존 기득권을 가진 주류 호족들의 이해를 침해하는 개혁을 실시하였거나 그런 시도를 하여 반발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1]

조상이 사마의에게 순순히 정권을 넘기고 출두한 것에 대해서도 환범이 울면서 조진은 훌륭했지만 그 자식들은 개나 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내 일족까지 망쳤다라고 한탄하는 등 대놓고 유약하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데, 당시 도성을 장악한 사마의는 태후를 협박해 조상을 역적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보정 체제는 어린 황제 대신 보정대신과 태후가 정사를 보는 것인데, 환범 등의 계책은 어린 황제를 끼고 있던 보정대신 조상도 사마의를 역적으로 선포하며 맞대응하고 지방의 군대를 소집해 맞서자는 것이다. 중앙에 기반을 가진 조상이 지지기반인 중앙군을 사마의에게 홀라당 뺏긴 상황에서 황제 하나를 믿고 지방 장군들의 힘을 빌어 사마의를 치자는 것인데, 조상이 그렇게 발악한다면 사마의 또한 대응을 안 할 리 없기에 태후를 협박해 새로 황제를 옹립했을 것이고, 낙하산 출신에 낙곡대전에서 참패하며 체면을 구기고 중앙군까지 잃은 조상 VS 중앙군을 장악한데다 이전부터 각지에서 무공을 떨치고 태후의 명을 빌어 조상의 실정을 탄핵하는 역전의 노장 사마의 구도가 되는지라 조상의 승률이 대단히 희박한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든 반 사마의 세력을 모아서 최대한 발악 한다고 해도 위나라 자체가 두동강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조상의 투항은 나름대로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2.2.2 부정적 평가

장제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조조가 세운 나라를 사마의에게 넘겨버린 인물이 어떻게 구국의 결단을 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왕조시대에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백성의 목숨 따윈 그저 소모품이었고, 사직만이 전부였을 뿐이다. 조상은 이점들을 간과한 채 그저 자신이 면직되는 것에 그칠 뿐이라고 예측하는 등 안이한 자세를 보였고, 결국 자신은 물론 관련된 인물들의 삼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조위 황실까지 사마씨에게 먹혀버렸다.

조상 정권을 재평가하는 측에서도 하안, 하후현 등을 필두로 한 조상파의 핵심 인사들을 조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상 본인은 그리 평가가 좋은 편이 아니다. 무난한 성격으로 인망도 없지 않았으나 자체적으로 국정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나 배짱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진수 등의 기록에서도 조상 자체는 평범한 인물이라 감히 사마의에게 거역할 생각조차 못했으나 하안 등 주위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2.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239년에 조예가 죽을 때 사마의와 함께 자신의 아들이자 다음 황제인 조방을 보좌하도록 부탁받았다. 하지만 심복 하안의 진언으로 사마의로부터 실권을 빼앗아 권력을 휘둘렀고 사마의의 노쇠를 가장한 연기에 속아 안심하고 번번이 사냥을 개최했다.

그러나 249년에 황제 조방과 함께 사냥을 나와 있던 와중에 고평릉 사변의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을 빼앗겼고 부하 환범이 조방을 끼고 사마의를 토벌하도록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결국 사마의에게 일파 모두 붙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다만 희대의 실책인 낙곡대전은 생략된데다, 조진이 워낙 안습하게 나왔기에 독자들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능력으로 비교하면 조진에게 고인드립이다.

2.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정치만 약간 높을 뿐 대대로 효율이 낮은 능력치. 정사에서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5/무력 28/지력 31/정치력 72. 혼란과 매도를 가지고 있지만 지력도 낮고 병법 숙련도도 0. 은근히 정치는 높으니까 내정에 굴리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7/무력 34/지력 30/정치력 69/매력 48로 변변찮은 능력치에 특이하게 주호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9/무력 33/지력 30/정치력 66/매력 51이며 대장군 친목질 전력을 반영해 친애무장은 상당히 많지만 자기는 물론 다른 친애무장들 대부분도 전투에 쓸데없는 문관형들이 많아 한마디로 빛좋은 개살구다.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진양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부하는 조희, 조훈, 장집, 이승, 이풍, 하안, 하후현, 환범으로 전투용 무장이 1명도 없는데다가 옆 도시 업에 등애, 계에 장비가 있어서 심각하게 막장스러운 난이도를 자랑한다. 다행히 진양은 방어하기 나쁘지 않은 도시라 미발견 무장으로 있는 장연왕창을 최대한 빨리 등용하고, 능력 연구로 기략 특기인 하안의 지력을 95까지 올리면 좀 숨통이 트인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PS3판, PK에서 추가되었다. 하지만 능력치는 정치만 제외한다면 백하팔인 정도에 전법이 쓰레기인 방어강화라서 그냥 시장의 건전지로 쓰자.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공명전에서만 등장한다. 제갈량오장원 이후 생존하는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사마의가 몰락하는 사이에 총사령관으로 나온다. 동생들은 보병계인 근위병으로 등장해서 4형제의 필두로 병종빨을 받아 꽤나 강력(!)하지만 당연히 아버지만은 못하다. 그리고 역사대로 고평릉 참사로 리타이어. 어쩐지 덕분에 훨씬 일찍 죽은 것 같다?[2]

삼국에서도 북벌 시기에 등장한다. 한국 더빙판 성우는 김상백. 무능하고 겁이 많은 조진에 비해 제법 영리하고 재기있는 아들로 나온다. 사마의도 조진보다 뛰어나다고 할 정도. 비록 사마의 부자보다는 떨어지지만 제갈량의 진창 철퇴의 속내를 나중에 알아차린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포상받았다고 좋아라 하는 조진에 비해 낫긴 낫다. 게다가 용기도 있어 촉군 공격에도 항상 자청하여 나선다. 의도적으로 조진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마의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조우, 조조(조휴의 장남), 하후헌, 진랑 등과 함께 세트로 플레이모빌 인형[3]으로 출연했다. 이유는 선대와 달리 전부 시덥지 않은 인물상들이라서... 틀린 말은 아닌데 오히려 단순하게 생긴 얼굴이라 귀엽다는 평이 있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6편 부터 주역 클론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본래 시대상 나오기 힘든 인물이었으나 진나라 시나리오가 추가됨에 따라 덩달아 비중이 급상승. 물론 역사 내용을 따라서 낙곡대전에서 크게 털리고 정시의 변에서 끔살당하고 바로 퇴장(...) 캐릭터가 좀 자만에 가득찬 인물로 나온다.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위나라로 일러스트 참전했다. 스토리상의 인물상과 똑같이 나왔다. 자만심 가득한 총사령관 느낌이 팍팍 든다.
  1. 조상 일파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어떤 식이었는지 알려주는 기록는 없지만, 적어도 하후현의 경우 관리선발의 투명성과 분권을 중심으로 하는 내정개혁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행되지는 못하였던 듯하며 이후 사마의에게도 권유하나 거절당한다.
  2. 공명이 죽지 않은 해 바로 장안으로 진격했고, 오와의 전쟁이 10여 년을 끌지 않는 한 조상은 무조건 일찍 죽게 된다.
  3. 독일제 소꿉놀이 인형 장난감(?)인데 인형의 도안은 레고 비슷하지만 레고 인형보다 큼지막한게 특징. 한국에도 한때 영실업을 통해 '영플레이모빌'이란 이름으로 정식 수입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