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삼국지)

진서 「위관등전(衛瓘等傳)」
위관장화


張華
(232 ~ 300)

1 개요

, 서진의 정치가. 자는 무선(茂先).

2 생애

범양 방성 사람으로 일찍 고아가 되었지만 총명하고 문장에 능해 동향의 노흠이나 유방 등 명사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가 지은「초료부」라는 작품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의 눈에 들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곧 사마소의 부중에 속해 저작랑과 중서랑의 자리를 거쳤으며, 서진 건국에 이르러서는 황문시랑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276년에 두예, 양호와 더불어 토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279년에 사마염과 바둑을 두다가 두예의 표문이 도착하자 지금 오를 토벌해야 한다고 해 탁지상서에 임명되어 전략을 짜는 직책에 있었으며, 오 토벌에 소극적이던 가충은 진공이 느려지자 장화가 무리하게 토벌을 주청했다 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마염의 비호로 무사히 완수했다.

천하통일이 달성되자 사마염은 장화의 공을 높이 치하해 관내후에서 광무현후로 책봉하면서 식읍 1만호가 증가되었고 곧 삼공의 자리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비주전파이면서 장화의 출신을 업신여기던 가충이나 순욱 등의 견제가 심했으며, 과거 사마염과 제위를 다툴 뻔했던 제왕 사마유를 장화가 높이 평가한 일로 사마염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 안 순욱은 곧 그를 모함해 유주 국경의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그 직위에서도 이민족에게 선정을 베풀어 다시 중앙 요직에 오를 기회가 생겼지만 바로 또 참소당해 사마염 생전에는 끝내 재상이 되지 못했다.

태상으로 임명되었다가 290년에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면서 가을 9월 26일에 태자소부가 되었고, 291년에 사마위사마량을 죽이자 동맹으로 하여금 가남풍을 설득해 사마위가 멋대로 사람을 죽인 죄로 죽이게 하라고 하면서 가남풍이 사마위를 죽였다. 가남풍이 전권을 행사하면서부터는 시중, 중서감 등을 거치다가 296년에 사공의 지위에 올라 정치 면에서 가남풍을 보조해 진언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서쪽에서 강족과 저족이 일어나면서 사마륜의 총신인 손수와 옹주자사 해계가 군사적인 문제로 다퉜다가 해계, 해결 등이 손수를 죽여 저족과 강족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청하자 양왕 사마융에게 보고하면서 허락을 받아 죽이려고 했는데, 손수의 친구인 신염의 도움과 손수의 계책으로 사마륜이 곽씨와 가씨 등과 교제하면서 죽이지 못했다.

사마륜이 곽씨, 가씨 등과 깊이 교제하면서 그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녹상서사, 상서령 등의 직책을 달라고 청했는데, 배외와 함께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굳게 주장하면서 사마륜과 손수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299년 가남풍의 음란함과 포학함이 심해져 배외, 가모 등과 가남풍을 폐위시키고 사숙비를 바꿔 세울 것을 논의했으며, 배외가 추천한 위충을 등용하려고 했지만 병을 핑계로 거부하면서 위충이 어떤 사람에게 장화는 화려하지만 알맹이가 없다고 했다.

가남풍이 태자 사마휼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미자 옳지 못하다고 간언해 면직되었다가 300년에 아들인 장위가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같은 해에 조왕 사마륜이 쿠데타를 일으켜 가남풍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마륜과 손수가 묵은 원한을 갚으려고 그도 붙잡았다. 통사영사 장림에게 충신들을 해치냐고 하자 장림은 조서를 들먹여 나무라면서 재상이면서 태자가 폐위될 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꾸짖었고, 장화는 식견전에서 논의할 때 간언한 내용이 남아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간언해도 듣지 않았으면 왜 자리를 떠나지 않았냐고 하자 대답하지 못해 가남풍의 전횡을 도왔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삼족이 몰살당했으며, 조야가 그 처사를 슬퍼했다. 후에 사마륜과 손수가 실각해 처형당하자 복권되었다.

박식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사마염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서로 《박물지》및 오언시 등을 엮은《장사공집》, 가남풍의 난행을 충고한 《여사잠》[1]등을 남겼다. 박물지를 남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술에 조예가 깊어 각종 약물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면서도 인물 보는 안목도 뛰어나 육항의 아들 육기와 육운 등을 발탁했고,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를 효렴에 추천하며 비호하기도 했다.

아들로는 장의, 장위 등이 있고 영가의 난 때 살해당했지만 손자인 장여가 강동으로 피신해 승상연, 태자사인 등을 지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장 끝머리의 단역 정도로 등장하지만 사마염과 바둑을 두다 바둑판을 손으로 쓸어내고 오 정벌을 건의하거나 가충 앞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모습 등이 눈길을 끈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가충과의 언쟁을 서술하면서 이 사람이 황문시랑 관직에 있었다고 환관으로 해석해버리는 오류를 저질렀다.고자가 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아니 장화가 고자라니![2]

3 일화

전설에 따르면 태아, 용연의 마지막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천문을 보다 남쪽에 붉은 기운이 비치는 걸 보고 천문에 밝은 뇌환 (雷煥) 이란 인물에게 물어보니 명검의 정기로서 예장군에 묻혀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장화가 뇌환을 그곳 현령으로 임명해 검을 찾도록 했더니 과연 명검 한쌍이 발견되었는데, 뇌환은 검 한자루만 장화에게 보내고 남은 한 자루는 자신이 지녔다. 장화가 형벌을 받아 죽은 뒤에는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뇌환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뇌화가 차고 있었지만 어느날 홀연히 칼이 뛰쳐나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시켜 찾게 했지만 두마리 용이 비늘을 세우고 유유히 노니는 모습만이 있어 두려워 더 찾지 못했는데, 이 뒤로 태아와 용연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화는 널리 보고 두루 들어서 꿰뚫어 섭렵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마염이 한 번은 그에게 한나라의 고사를 물어보다가 이야기가 건장궁의 천문만호까지 이르렀다. 장화는 땅을 그어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유창하게 대답했는데, 한나라의 장안세[3]도 그보다 나을 수 없을 정도였다.

수신기에는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연소왕의 무덤에 늙은 얼룩무늬 여우가 살았는데 변신술을 깨쳤다. 여우는 선비로 변해 장화를 만나러 가려하자, 무덤 앞의 화표목이 반드시 욕을 볼 것이며, 또한 천년간 쌓은 도술을 망칠 것이라며 충고한다. 여우는 듣지 않고 장화를 만나 학문을 논한다. 장화는 도저히 그를 이기지 못하자 이는 사람이 아니라 요괴임이 분명하다 생각하여 가둔다. 이에 여우가 여러차례 풀어줄 것을 사정하나 장화는 거부한다. 당시 풍성령이란 자가 현명하다고 소문이 나 장화는 그를 불러 자문을 구한다. 풍성령이 사냥개로 시험하라고 하자 장화가 이를 따라 사냥개를 풀었으나 여우는 태연히 웃으며 장화의 속좁음을 비난한다. 이에 풍성령이 천년 묵은 나무만이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 말하며 마침 연소왕 무덤 앞의 화표목이 천년 묵었으니 이를 베러 간다. 화표목을 베러 가던 중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어디로 가냐고 묻자 화표목을 베러 간다고 답한다. 이에 동자는 울면서 "늙은 여우가 내말을 듣지 않아 그 화가 나까지 미치게 되었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 말하고 사라진다. 화표목을 베니 피가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화표목을 태워 선비를 비추니 정체가 드러난다. 장화는 두 요물을 태워 없앴다고 한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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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평범한 문관 스탯. 그대신 매력은 가충보다 높고 지력이 70~80대라서 부장용으로 쓸수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34/29/80/76. 몽충, 혼란을 가지고 있다. 후반기인 걸 감안하면 나름 유용한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34/26/81/77/62로 후기장수중에 몇안되는 지력 80이상의 장수이며, 특기가 4개인데 그 중 하나가 사기특기인 군사특기이다. 통솔이 낮은게 아쉽지만 아쉬운대로 후방에서 준수한 장수를 원격조종하는 것은 유용하며 지력을 살릴 수 있는 기술 특기가 있으니 기술셔틀로 써도 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36/27/78/79/64에 특기는 없다. 수준 이상의 문관이지만 251년 등장이라 역사 시나리오에서는 얼굴 볼 일이 없을 테고, 계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영웅집결에서 유우 군의 초반 군사로 활약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이름 그대로 신발 종류인 장화(...)로 등장한다. 색도 똑같이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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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진 시대의 화가 고개지는 이에 근거한《여사잠도》를 그려 남겼다고 하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모작만 런던 대영박물관에 남아있다.
  2. 그 시대에 '황문(黃門)'은 환관의 통칭이 맞다. 하지만 황문시랑(黃門侍郞)은 황제의 비서격인 직위로 환관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 순유도 황문시랑 관직에 앉았던 적이 있다.
  3. 한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유(子儒). 고사에 정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