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高平陵 事變
249년 삼국 시대 위나라의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한 사건이다. 이로써 위나라의 세력 판도는 조씨 정권에서 사마씨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고 위나라 멸망의 시작이 된다.
2 배경
2.1 정권을 잡은 조상과 사마의
238년 위나라의 2대 황제인 명제 조예가 죽어갈 때 대장군 조상과 사마의는 명제의 측근이던 유방과 손자의 지지, 사마의의 공손연 토벌 후 적시 귀환으로 조우[1]를 앞세운 정적 진랑, 하후헌 일파와의 알력에서 우위를 점해 명제의 고명대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239년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하자 고명대신의 명분으로 정권을 잡는다.
2.2 사마의 축출과 조상의 집권
조상은 한동안 사마의를 후대했으나 점차 경계심을 품고 인척이던 하후현을 끌어들이면서 사마의와 대립하게 된다. 조상은 등양과 이승의 권유에 따라 사마의의 반대를 무릅스고 추진했던 낙곡대전의 실패 후 정밀의 계책에 따라 사마의를 명예직인 태부로 높이면서 병권을 박탈해 병권을 독점하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권력을 독점한 조상은 사치와 낭비에 빠졌으며, 파당을 조직하여 측근들을 중용하고, 500여명의 빈객을 거느렸다. 그 중 조상의 세력의 중심이었던 자들은 사창팔달이라고 불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2] 하안, 등양, 이승, 정밀, 필궤 등이 조상의 측근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하안, 등양, 정밀에게는 상서 벼슬을 내리고 필궤는 사례교위, 이승은 하남윤으로 삼아 요직과 수도 관련 직위를 측근들에게 맡겼다. 군권의 통솔에 있어서도 동생 조희를 중령군, 조훈을 무위장군, 조언을 산기상시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려 맘대로 궁에 드나들게 했다.
2.3 조상의 권력남용과 그에 대한 반발
조상이 전횡을 부리며 정밀과 필궤는 꾸준히 사마의를 조심하라고 했기에 사마의에 대한 경계는 더욱 심해진다. 이에 사마의는 두문불출하며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으며, 이걸 감시하러 간 이승이 홀딱 속아넘어가 버린다. 이승의 말만 듣고 조상은 안심하고 종종 사냥을 즐겼다. 환범은 사마의가 병상에 누워있음에도 조심하라고 조언을 하고 동생 조희와 환범이 간언을 했으나, 조상은 그중 어느 것도 듣지 않았다.
이때 심복 등양은 인재 등용을 하면서도 너무 대놓고 돈을 받아들여 장애라는 사람으로부터는 장애의 부친의 첩을 받기도 하고 조상 일파에 반대하는 규태라는 사람을 무거운 형벌에 처한다. 사마기라는 사람이 이걸 보고 미친 짓이라며 반대하지만 결국 겁에 질려 1년 만에 죽기도 한다.(…) 필궤는 왜곡된 상소로 노육을 관직에서 내쫓기도 한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은 정밀로 여러 차례 탄핵하고 논박했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했지만 조상파인지라 뭐 별 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당시 나돌던 방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을 정도.
대각 중에 개 3마리가 있다. 2마리가 물어뜯으려 덤비면 당할 수가 없고, 한 마리는 묵을 믿고 저낭을 만들어낸다. |
개 3마리라는 것은 하안, 등양, 정밀을 가리키는 것이고, 묵(默)이란 조상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세 마리 개가 모두 사람을 물어뜯으려 덤비는데, 그 중에서 정밀이 특히 심하다는 뜻이다.
대신들은 이런 조상의 월권과 그 측근들의 전횡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재야에서도 조상의 평판이 떨어져 양호는 조상의 초빙을 거절했으며, 이미 벼슬살이를 하고 있던 완적(죽림칠현의 1인)은 칭병하여 벼슬을 버렸다. 248년 12월 28일에는 점술가 관로가 하안과 등양에게 패망을 예견했지만 이들 또한 이는 늙은이의 헛소리라며 무시해버린다. 사마의의 정변 때 태위 장제나 고유를 비롯한 노대신들과, 명문가이던 진태 등 여러 관료들이 사마씨의 편을 든 것도 이러한 것에서 비롯되지 않나 여겨진다.
- 조상의 이런 행동이 후대에 과장되었으며, 조상과 그 일파가 호족들의 이해를 침해하는 개혁을 실시하였거나 그런 시도를 하여 호족들의 반발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적어도 하후현의 경우 도관고과법을 도입해 공과로 관리의 재능과 자질을 평가해 조조 시절의 유재시거의 기풍을 부활시키려 했고, 일단의 내정개혁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3] 그는 사마의에게도 구품관인법 개혁을 권유하나 좋게 거절당한다.[4] 정사 삼국지(三國志)와 그 주석에서는 조상 일파의 정치를 거의 폐정으로 서술하나, 하후현전에 주석으로 달린 세어(世語)에선 하후현이 중호군(中護軍)시절 하후현이 임용한 인재들 중에 준걸들이 많았다고 적고있으며 진서(晉書) 부현전(傅玄傳)에는 하안의 인재 선발이 성공적이었으며 이승 역시 직무를 잘 했다고 하여, 등양으로 인해 하안의 인재 선발이 실패했다는 위략(魏略)의 기록과 충돌하고 있다. 정사 삼국지가 사마씨가 집권한 서진 시절 당시 승리자들이던 서진 세력에 의해 남겨진 서술 등을 참고하여 서진의 관리이던 진수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 하후현이 조상 아래서 내놓은 개혁론이 호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점, 진서가 당(唐) 태종기에 쓰여졌기에 자료 취득에 있어서는 앞의 저서들보다 아쉬울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서 후속적 연구가 이어지고 소개되길 바라야 할 듯하다.
3 과정
정시 10년(249년) 정월, 환범이 예전에 형제 중 한 명은 남겨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음에도 조상은 황제 조방을 모시고 세 아우 조희, 조훈, 조언과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려 명제의 무덤인 고평릉으로 참배를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 사마사가 비밀리에 양성한 사병 3천여 명을 동원해 낙양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고, 자신은 조예의 황후인 곽태후(명원황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표문을 장서하도록 했다. 조상은 낙양 주둔군의 진채를 전부 낙양성 안에 배치했는데, 그로 인해 낙양성이 사마의의 수중에 떨어지자 조상의 군대는 조상과 단절되어 버렸다. 조씨 형제들이 전부 성밖에 있었던 탓에 사마씨의 세력에게 점거된 군사들과 장교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사마의는 적어도 이들 군대가 조상 형제의 명령을 받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다.[5]
조상의 파벌이던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하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하고 조상의 수하 사마 노지가 참군 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다. 한편 사마의는 대사농 환범도 중령군으로 불러들였으나, 환범은 아들의 말을 듣고 황제가 있는 조상 측으로 마음을 정해,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간다.
사마의는 허윤과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병권만 거둔다는 말을 전하게 하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을 내린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가족의 처지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천자와 함께 허창으로 이동,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대가 약한 조상은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을 전해오자 결국 병권을 넘기기로 결정한다. 조상이 대장군의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하고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한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후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조상의 측근 6인을 옥에 가두고 조상을 물론 3형제와 그 가족과 일당 모두 붙잡아 처형하고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어 후환을 끊었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였던 환범 역시 일족이 몰살당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이후 사마의는 태위 장제의 건의로 노지와 신창을 복직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조상의 죄를 다스릴 때 하안을 옆에 두었는데 하안은 저 혼자 살겠다고이승도 조예 때 그러더니 신의가 없는 친구들이 확실하다 다른 애들을 욕하면서[6] 살려달라고 하자 사마의는 하안에게 "죄인은 모두 8족"이라고 말하자 하안은 필사적으로 살겠다고 정밀, 등양 등 7족을 말하지만 사마의는
아직 부족하오.
라는 대답을 한다. 하안이 이에 급히 자신을 말하냐고 하자 사마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인다.
나머지 조상 일파인 하후현은 면직됐다가 나중에 다시 승진해 복귀하며 양호를 조상 일파로 끌어들이려고까지 했던 왕침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용서 받는다.
이 후 사마의는 조방에 의해 승상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지면서 사마의는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 이로써 사마씨가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사마의는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 저항한 노신 왕릉을 죽였으며 조씨 황족들을 업으로 이주시켜 감시하였다.
4 사마의 사후
사마의 사후 사마사와 사마소는 거역하는 관구검, 문흠, 제갈탄 등 지방군을 진압하고 호족들과 명사들을 회유하며 파당을 형성하며[7] 찬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하고 자신에게 저항한 하후현, 장집 등을 죽였으며 사마소는 조모를 시해하고 조환을 옹립해 진공(晉公)과 상국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진다. 사마소는 촉을 정벌하고 진왕(晉王)으로 승진해 찬탈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급사하고 뒤를 이어 사마염이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한다. 사마염은 오나라까지 정복하고 천하통일을 하지만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서진은 통일한지 반세기도 안되어 멸망하고 만다.
5 기타 창작물에서
5.1 84부작 삼국지
공명 사후 주요 이벤트로 생생히 묘사된다.[8] 보통 어린이용 삼국지 등 축약본에서는 공명사후 한 두줄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대부분이고 84부작 삼국지도 강유의 북벌 등 많은 이벤트를 축소, 오나라의 병크는 아예 생략한 반면에 조위의 정치 격변은 충실히 다루고 있고 이 고평릉 사변은 꼼꼼히 다루고 있다.
다만 여기서 조상은 삼국에 나오는 조진의 이미지로 주지육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인간 쓰레기로 나오고 있다. 이례적으로 조상의 연회부분이 길게 다루어지고 있고 사마의는 중풍으로 죽기 직전으로 위장한 후 쿠데타를 일으킨다. 삼국과는 달리 84부작 삼국지에서 조상은 연회장에서 목숨만을 구걸하다가 벼슬만 깎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말만 믿고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의에게 투항. 이후 사마사가 이끄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것으로 마무리
전반적으로 사마의가 공명에게 당하기만 하는 찌질이로서의 인상을 주었던 이전편들과 달리 간신배이자 역적으로의 모습이 극명하게 보이는 에피소드로서 배우의 이미지가 확실히 바뀐 것을 알수 있다. 이 후 악의 화신으로 국정을 농단하다 사마사에게 물려주고 리타이어.
5.2 드라마 삼국
5.2.1 조씨 친족의 견제
사마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제갈량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명심해라. 영원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조조
작중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는 도중에도 황제 조예와 대장군 조진, 대사마 조휴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받는다.
1차 북벌 때는 마속이 지키는 가정을 탈환하고, 촉군을 한중으로 패퇴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제갈량의 거문고 연주에 속아 제갈량을 포획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퇴각하게 된다. 비록 사마의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이런 실책을 범한 것을 조예가 가만 놔둘 리가 없고, 긴급 모병 사건 및 신의 사건에 대해 막아주는 듯 선심써주는 척 하며, 자연스럽게 병권을 박탈한다. 원 아웃
2차와 3차 북벌 때는 사마의의 문하생인 학소가 혼자서 진창성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조진은 '학소가 패배하면 그를 추천한 사마의도 깨지겠지?' 하면서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방해만 한다. 심지어 병사 5만명을 자기 휘하로 빼앗아서 진격하다 털리고 위군 갑주를 걸친 촉군 5만명 때문에 진창성이 함락되기도 한다. 조진이 패퇴하자 위군은 모랄빵이 나서 탈영병이 속출하지만, 사마의가 다시 대도독으로 기용되었고, 그의 노력으로 위군은 사기가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조진은 '사마의는 싸움을 피하는 겁쟁이, 그러다가 장합 장군도 전사했대요' 하면서 상소문을 올리고 사마의는 부도독으로 강등되어 조진의 지휘 아래 놓인다. 투 아웃 이후 조진이 죽을 때까지 사마의는 조진의 말을 잘 듣는 부도독이 되지만...
4차 북벌 때는 진법 싸움에서 대패함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살포로 제갈량을 물러나게 하는 기량을 선보이고, 5차 북벌 때는 여자 옷으로 조롱을 당하고, 군량을 빼앗기며, 결국엔 상방곡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제갈량의 수명이 다해 최종 승자가 된다. 위나라에서 누구도 이 공을 능가할 자가 없었지만, 조예는 상을 준답시고 명목뿐인 태위직을 던져주고 병권을 빼앗아 하후패에게 넘겨준다. 스리 아웃 체인지
요약하자면, 조씨 친족의 견제 → 사마의의 병권박탈 → 제갈량의 북벌 → 조씨 친족 참패 → 사마의의 재기용 → 제갈량 퇴각 → 다시 견제 → 박탈 → 북벌 → 참패 → 재기용...의 무한 반복 패턴으로, 누구라도 미치지 않고선 못 버티는 상황에서 십수년간 참고 버틴 것이다.
또한, 조비와 조예가 포상이랍시고 수도에 저택과 여자 정주를 하사하는데, 저택은 호분군에게 둘러싸여 연금된 상태이고, 정주는 사마씨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황제에게 고해바치는 스파이였다. 사마의는 집 안에서조차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5.2.2 사마의의 대응
어째서 얼굴이나 손보다 발이 더 하얀지 알고 있나?(잘, 모르겠습니다. - 사마의) 감춰져 있기 때문이지. - 조조
이에 사마의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인내의 시간을 보낸다. 조조가 자신의 재주를 경계하자 흙바닥을 손으로 쓸고 자신이 스스로 마차의 계단이 되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조비가 병권을 주지 않자 일부러 자신의 예상이 빗나감을 들어 벌을 내려달라 청한다. 조예가 의심을 품자 오히려 솔직히 자신이 모병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에 대해 사마소가 불만을 토로하자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혼을 낸다. 또한 조진의 모함으로 인해 부도독으로 강등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을 치하하는 상주문을 올리자, 조정에서는 사마의가 '조진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며,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더 우선하는 충신'이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교묘한 수로 조진을 궁지에 몰아넣어 조진이 몰락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조진에게 사마의 본인이 등을 토닥이는 척, 최후의 일격을 날려 조진을 저 세상으로 보낸다. 본격 등골 브레이커 사마의
곽회에게는 탈영병 관리를 잘못했다며 공개참수형을 내린 후, 부하장수들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곤장 40대로 감형을 시키고 만약 처음부터 곤장 40대 치기로 했으면 반발만 심했을 것이다. 조삼모사의 대가 나중에 혼자 불러 몸은 좀 괜찮냐고 다독여준다. 그 뒤에 강력한 지도력으로 추락한 군심을 휘어잡는 것을 본 곽회는 사마의의 오른팔이 되고, 사마의가 낙향하자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아달라는 등 철저한 심복이 된다. 손례가 제갈량의 도발에 분노하여 출전하려하자 "지금 나가서 싸우면 역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네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너의 식구들은 변경을 떠돌며 노비생활을 하겠지."라며 협박을 하여 손례의 출전을 막는다. 그 후,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을 믿어달라며 호소하자 곽회와 마찬가지로 손례도 사마의의 왼팔로 활약한다.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 사마의는 조진을 실각시키는 어둠의 책략뿐이 아니라 인심장악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낙양으로 귀환하여 아무 욕심이 없는 듯이 군권을 반납하고 관직에도 뜻을 보이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도 오직 조비에게 받은 애첩 정주와 함께 알콩달콩 신혼분위기만 낼 뿐이어서 청렴결백하고 야심이 없는 충신으로 보일 뿐이었다. 조예가 임종 전, 사마의를 떠보기 위해 태자의 섭정을 맡겨보지만, 사마의는 사양하며 오히려 조진의 아들 조상을 추천한다. 조예는 조상에게 사마의를 명대로 살게 놔두라고 유언을 남기고, 사마의 집에 심어놓은 스파이 정주도 조상에게 넘긴다.
얼마 후, 정주가 난산으로 죽자 사마의가 충격으로 쓰러지며 중풍에 걸린다. 이 소식을 들은 조상은 쾌재를 부르며 안심을 하게 되고, 어린 황제 조방과 함께 청명절에 문무백관들을 모아 선제 조예의 능으로 참배를 가는데...
5.2.3 조씨의 몰락, 사마씨의 정권찬탈
검은 한 번 휘둘렀지만, 난 그 검을 십 수년간 갈았지. 네 선조인 조조가 가르쳐준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사마의가 조상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두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도 알아채지 못했다. 사마의는 재빠르게 곽회와 손례 등 예전의 심복들을 소집하고 비어있는 궁궐로 진군한 후, 곽태후(명원황후)를 협박하여 조서를 얻어낸다. 바로 고평릉으로 달려가 태후의 조서를 명분으로 조상을 역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문무백관들의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여 조상을 무력화시킨다.
고평릉 사변 후, 정주의 무덤에서 과거 정주를 데려온 늙은 환관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의 입을 통해 조비가 심어놓은 스파이가 정주임을 듣게 된다. 늙은 환관은 정주를 죽인 것이 혹시 사마의가 아니냐가 묻는데, 사마의는 산파를 매수해서 정주를 죽게 한 것을[9] 고백한다. 늙은 환관은 사랑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죽일 수 있냐며 비난하고, 사마의는 내가 사랑한 것은 공명대업이었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시간이 흘러, 사마의는 정원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어린 사마염이 당랑포선의 고사[10]를 외우는 것을 들으며 숨을 거둔다. 그와 함께 정권을 장악한 사마 가문이 촉, 위, 오를 차례대로 무너뜨리며 삼국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며 드라마가 종영된다. 그리고 사마 가문은 이민족에게 무너지지.
5.2.4 고평릉 사변의 상징성
드라마 상에서는 고평릉 사변을 묘사하는데 마지막 화를 통째로 사용했다. 더불어 삼국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주제가 마지막 화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평릉에서 과거 조조와 사마의가 현재와 오버랩되며 맨발로 천천히 걸어가 조상을 지그시 밟는 장면은 이 드라마 최고의 백미이다. 사장 아들의 무개념 행동에 빡친 신입사원이 십 수년간 참으며 세력을 기르고 있다가 회사를 적대적 인수합병 해버리는 장면에 비유한 위키러가 있을 정도.
당고의 금으로 세력을 잃은 청류파, 십상시의 난으로 대표되는 환관세력, 하진으로 대표되는 외척세력의 다툼으로 인해 삼국지가 시작되는데, 사마의, 늙은 환관이 만난 곳이 정주의 무덤이며, 정주는 바로 하진의 후손이다.[11]
마지막에 사마염이 외우는 당랑포선의 고사는 실로 사마의의 생애와 함께 삼국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유씨 천하를 조씨가 찬탈하고, 조씨 천하를 사마씨가 찬탈하는 과정이 매미와 사마귀, 참새의 고사를 통해 잘 나타난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이 사마씨는 나중에 유씨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참 얄궂은 것이, 서진이 먼저 전조 [12]의 유총에게 멸망을 당하고, [13] 이후 잔존 세력이 겨우 도망쳐 나와 동진을 세웠으나 이 또한 유송의 유유에게 멸망 당한다. [14] 다시 말하면, 왕조가 2번에 걸쳐서 멸망당하였는데 둘다 유씨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조씨가 유씨를 멸하고, 그 조씨를 사마씨가 멸하고, 다시 그 사마씨를 유씨가 멸한 셈. 또한 이 유씨는 다시 소씨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데 이 때 유송의 마지막 황제가 들은 소리가 흥미롭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사실 폐하의 조상(유유)도 사마씨(동진)에게 이러지 않았습니까?"
여담으로 저 말은 정말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비꼬는 거다. 실제로 유유는 사마씨 마지막 황제를 폐위 후 몰래 암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해석하면, 걱정마 너도 죽이지 않는 척 하다가 암살해 줄께 강제 선양의 가장 최초의 피해자였던 유씨가 최후에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공교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여담으로 소씨는 다시 진씨에게 멸망을 당하며, 진씨의 멸망으로 그 기나길었던 막장의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린다.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6부터 독자 세력으로 편성된 진나라의 스토리 모드 시나리오에 '정시의 변(正始の変)'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6편에서의 조작무장은 사마의. 조상이 사냥 나간 틈을 타 궁성을 습격하여 조상에게 습격 소식을 전하려는 전령을 저지하고, 환범, 하안 등 조상의 부하들을 처리하며 궁성을 제압한 후, 뒤늦게 돌아온 조상을 사마의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후하하하하과 함께 밟아 주면 클리어. 조상이 죽은 후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하후패는 촉으로 망명하고, 이를 바라보는 사마소는 그를 '자유롭다'고 평한다.
- ↑ 조우 자체는 욕심이 없었다고도 한다.
- ↑ 조예는 이런 걸 싫어해서 사치를 금지시키고
정작 자기도 궁궐이나 마구 지어대며 사치를 즐겼던 건 비밀이를 안 지켰던 이들을 체포해서 벌을 준다. 이승은 이때 친구들의 죄목을 불어서 금고형으로 풀려난다.(…) - ↑ 여기에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사마씨 일파이자 호족인사였던 부하. 삼국전투기에선 부하가 선견지명이 있어 실속없는 하후현을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이 둘은 정책적 대립때문에 사이가 좋을수가 없었다.
- ↑ 루쉰은 강연에서 이를 지적하여 대권을 쥔 사마의는 지방의 친위 군벌을 토벌하고 중앙의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매진하였으니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보았다.
- ↑ 이후 사마씨는 군을 새로 배치해서 성벽 외부에도 진채를 설치해 군을 나누어 주둔시키게 된다.
- ↑ 이 기록이 위씨춘추에 있는데 사마사와 친했다는 내용 바로 밑에 있다. 이걸 믿고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
- ↑ 그 과정에서 구품관인법이 완전히 왜곡되어 버린다.
- ↑ 다만 어른의 사정으로 문화방송 방영판은 이 부분이 송두리채 날라갔다.
- ↑ 산파에게 출혈제를 진통제로 속여서 주라고 하며 줬다.
- ↑ 나무 위의 매미를 사마귀가 노리고, 사마귀를 참새가 노린다는 이야기이다.
- ↑ 95화의 시작도 무너진 하진의 사당에서 시작한다.
- ↑ 원래 한나라였으나 추후 조로 이름을 고친다
- ↑ 이는 삼국지 평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단 유총은 원래 흉노족으로 유씨성을 하사 받은 경우니 이는 창작에 가깝다. 그러나 사마씨가 다시 유씨에 의하여 멸망 당했다는 상징성은 있는 편이며 유총도 이를 써먹기 좋다고 생각했던지 애초에 나라 이름도 처음엔 한나라 였으며, 스스로를 촉한의 정통 후계자로 칭하긴 하였다. 삼국지 평화의 모티브가 아주 솟아난 소재는 아닌셈이다.
- ↑ 역시 유송 또한 촉한의 정통 후계자를 칭하긴 하였으나 친척 관계에서는 좀 차이가 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