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조선)

(봉림대군에서 넘어옴)

조선의 역대 국왕
16대 인조 이종17대 효종 이호18대 현종 이연
묘호효종(孝宗)
시호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충선(忠宣)[1]
본관전주(全州)
능묘영릉(寧陵)
이호(李淏)
정연(靜淵)
출생한성 향교동 경행방 어의궁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2]
사망장소한성 창덕궁 대조전
배우자인선왕후(仁宣王后)
아버지인조(仁祖)
어머니인열왕후(仁烈王后)
생몰
기간
음력1619년 5월 22일 ~ 1659년 5월 4일
양력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39년 11개월 20일, 1만 4,600일.)
재위
기간
음력1649년 5월 13일 ~ 1659년 5월 4일
양력1649년 6월 22일 ~ 1659년 6월 23일. (10년 1일, 365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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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어필.

조선의 역대 왕세자
소현세자 이왕효종 이호현종 이연

1 개요

조선의 17번째 국왕.

송효종에서 비롯한 이름인 효종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당대에 효종이 중흥 군주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뿐더러, 이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일단 고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온 암군종특을 끊은 것만 해도 엄청난 임금이다.

2 즉위

인조의 차남으로 자는 정연. 호는 죽오. 시호는 명의.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 비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였다. 인조 4년에 봉림대군[3]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다. 볼모로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치려고 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할 정도로 형을 지키려 했다.

귀국 이후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즉위한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는 온 조정의 맹렬한 탄핵을 받았고 효종은 김자점과 이시백 두 사람을 잘 예우하라는 인조의 유언 때문에 김자점에게 벌을 주진 않았지만 온 조정이 등을 돌린 김자점은 완전히 실각하고 만다. 이에 김자점의 아들들이 격노하였고 친청파 무장과 대신들을 끌어들여 아버지와 함께 역모를 계획하나 소용 조씨의 행패를 자의대비가 조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 친청파는 자취를 감추고 반청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뒤에 말한 것처럼 실제로 이들이 북벌을 정말로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효종은 북벌론을 그리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았다. 천하의 청나라가 버티고 있는데 즉위하자마자 북벌! 북벌! 굿판을 벌이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효종이 아니다. 효종은 대놓고 청나라에 거스리기보다는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하는 등 망가진 조선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과 기초적 군사력을 다듬는 일에 주력했다.[4] 게다가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소리와는 달리, 효종은 청의 문물을 매우 고평가해서 신하들에게 오랑캐 문물을 숭상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3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

북벌의 실행을 위해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을 추진했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지만, 송시열은 실제로는 북벌에 심히 소극적이었으며, 효종이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도 수신(修身)만을 권할 따름이었다. 송시열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관마저 물러가게 하고 효종과 송시열 둘만이 독대한 기해독대(효종이 사망하는 효종 10년 3월 11일)의 내용을 송시열이 후일에 진술한 바에 근거한 것이다.[5] 그래서 지금은 북벌은 군사력을 기르기위한 훼이크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서인들을 등용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효종이 산당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일파를 아우르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한 모습은 자주 보인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산당을 제어할 경우 자신을 인정하여 정통성을 보장해줄 재야세력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은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삼전도의 굴욕의 영향으로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고질적인 벼슬 기피풍조가 퍼졌다. 그러니 재야세력과 조정에서 일하는 사대부들의 세력 차이는 엄청났고 조정의 일부 한당과 친청파의 지지 수준으로는 정통성 확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오히려 자신의 친위세력이 될법한 김자점과 친청파는 배제해버리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같은 산당을 극진히 예우했다. 하지만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효종은 그걸 방지하고자 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명분, 즉 북벌을 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당의 수장 송시열도 왕에게 거의 전권을 이양받다시피한 권위를 부여받고도 효종에게 엎드렸던 것이다.

이런 왕권 강화는 효종 본인의 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의도 또한 있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의 자식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챈 '찬탈자'로 해석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특히 민회빈 강씨의 옥사에 대한 의문점은 사대부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정통성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강빈을 신원할 것을 요구한 신하들을 죽여대고 강빈을 '역강'('반역자 강씨'라는 뜻의 비칭)으로 부르며 '역강에 대해 한마디라도 꺼냈다간 역당으로 간주하겠다!' 라는 강경한 발언을 해가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 사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는 소현세자 부부와 볼모 생활을 하면서 관계가 매우 좋았다. 게다가 이후 이석견을 비롯한 소현세자들의 자손들은 귀양지를 계속 옮겨주다가 결국 귀양을 풀고 한양에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즉, 바꿔 말하면 효종으로선 내심으론 소현세자와 그 가족에게 애정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이걸 드러냈다간 당장 본인의 정통성이 무너질 수 있어서 평생 민회빈 강씨에게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다. 권력이란게 이래서 무섭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점이다.

효종을 북벌에만 매달렸던 이상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꽤 많은데, 그도 청나라의 북경 정복과 천도 과정을 소현세자와 함께 두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자. 청나라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비확장도 임란-이괄의 난-호란 에 걸쳐 누더기가 된 군사편제를 재정비해야 했으므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대동법의 확대 등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진행한 덕에 효종 치세에서 조선은 안정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인재를 얻을 때에 장군인 이완을 등용할 때의 야사 일화가 하나 있는데 어느날 무신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하고 냅다 그들에게 화살을 날리게 하였다. 놀란 무신들이 죄다 도망갔는데 오직 이완만이 어명을 받들기 위해서 등에 화살이 꽂힌 채로 그대로 효종의 앞에 나타났다. 또한 당시 그는 임금이 급하게 부를 때는 변고가 있는 것이라 하여 갑옷을 의복 안에 갖춰입어서 화살을 맞아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를 본 효종은 그의 충성심과 준비성에 감탄하여서 그를 북벌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계속하여서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간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청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2회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얻은 성과도 소수 있기는 했지만...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종기의 악화로 인해 사망하면서 북벌 계획도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음모론적) 야사에 따르면 5월 5일 군대를 출동하려고 했는데 그 전날 죽었다고.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을 지휘했던 신유 장군은 전리품으로 얻은 플린트 록 머스킷 300~400정중 단 한 정만 힘들게 빼돌려서 조정에 진상하였고 시험적으로 양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게 구조가 복잡해서 생산이 힘들고 단가는 조총보다 훨씬 비싸면서 성능은 조총보다 약간 앞서는 정도였기에 효종은 차라리 같은 값으로 조총 3정 만드는 게 낫겠다 하여 수백정만 소수 생산한 후 백지화했다. 한편 신유 장군이 가져온 것 말고도 하멜이 머스킷을 진상했지만, 마찬가지로 양산은 되지 못했고 하멜은 이후 조선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다가 나중에 탈출하게 된다.

4 죽음

당시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린다. 이에 효종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 하였으나 정작 큰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신가귀의 수전증으로 인해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것.[6] 졸지에 왕은 승하하고 책임자인 신가귀는 당초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졌다.[7] 신가귀는 침을 놓지 못하는 의사였다는 말이 있지만, 현종실록 1권 즉위년 6월 4일 3번째 기사를 보면 효종은 과거 신가귀가 수전증이 있음에도 침을 잘 놓았다는 평가를 할정도로 침 놓는 솜씨는 나빴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신가귀를 불러 침을 놓게 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수전증이 있던 신가귀는 당시 효종을 치료할 때 본인 역시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겹쳐 혈락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종도 그 점을 감안했기에 신가귀를 참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한 것. 그리고 조선의 법에서 교수형은 시신을 그나마 보존할 수 있으므로 같은 사형이라도 참형에 비해 온건한 형벌이었다.

여하간 이 사건 덕분에 산당 독살설이 불거지지만... 송시열의 상경까지 완수한 산당이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죽였을까 싶다.[8] 더구나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로운 현종은 산당에 대해 더욱 경계하는 임금이었다. 의학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이는 전적으로 효종의 건강을 책임진 어의 등 의관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효종의 무덤은 영릉으로,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10월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므로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되어 왕릉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을 한다. 그 당시 천장의 이유로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들어 갈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주의 영릉 곁으로 옮기기 위해 영릉을 개봉하니 깨끗하여 영릉대감의 책임자들이 면직되기도 했다.

4.1 사망 플래그?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효종은 죽음에 대한 징조가 정사와 야사에 유난히 많이 남았단 거다. 효종이 승하하기 2달 전에 거사를 자처하는 한 노인창덕궁 돈화문 앞에 엎드려 소리치기를, "5월에 나라에 큰 화가 있을 것이니 경복궁 옛터[9]에 초옥을 짓고 그곳으로 옮겨 화를 물리치는 굿을 하소서!"라고 외쳤으나 사람들은 그냥 미친 노인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다.[10]

또한 야사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남았는데, 이는 모두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이 저술한 <공사견문록>과 <한거만록>에 남은 이야기다. 공사견문록에는 왕이 승하하던 해 4월에 세자(현종)가 학질에 걸려 10여 일이 되도록 침과 약의 효력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효종이 이를 듣고 세자를 징광루(澄光樓) 아래에 있게 하고, 세자를 놀라게 하려고 궁녀를 시켜 몰래 질기와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서 내던져 깨뜨리게 하고는, "궁녀 아무개가 누각에서 낙사했다."고 일제히 외치게 하였다. 그러자 궁중에 난리가 났으며, 이를 본 늙은 궁녀 김씨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4대 조정[11]을 받들었다. 궁중에 일이 있더라도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킬 것인데 이제 일도 없이 일부러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5월에 효종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야사 기록이긴 한데 이것은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게 세자 또한 효종이 죽기 직전에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효종 자신도 아픈데 자신보다 세자의 병을 더 신경썼다는 기록도 실록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효종의 사위가 쓴 기록이다.

그리고 효종 본인도 어느 정도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사망 1달 전에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출처는 한거만록)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목이 새로운데 / 雨後晴光萬綠新
한 자리의 늙은이와 젊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 一堂長少是君臣
꽃 속의 대(臺)와 버들에 싸인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 花臺柳榭渾如畫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누나 / 時有鶯聲喚主人

이걸 다 읊고 나서 효종은 "가을 9월에 단풍이 들면 다시 부르겠다"고 하며 "뒷날 다시 만날 것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4.2 후일담

승하한 후 장례 절차에도 문제가 생겼는데, 효종의 시신을 넣기 위해 관을 준비해 왔는데, 어깨가 너무 넓어(…) 관이 맞지 않았던 것. 게다가 그 관도 효종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죽은 후에 바로 내놓은 물건이었다.[12] 이걸 효종이 왕 대우 못 받은 근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왕의 몸에 맞는 관을 만들 널판이 없어 덧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일이라...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이 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송시열은 사관에게 대차게 까였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널빤지를 잇대어서 왕의 관을 만드는 초유의 일이 생겼으며 옻칠을 더하여 널빤지를 이은 자국을 감추도록 했다. 그리고 효종이 죽은 뒤에는 조선 역사상 최대의 대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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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영릉(寧陵)[13].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英陵)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처음 장지로 예정된 곳은 수원[14]이었지만 공력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동구릉에 묻혔었다. 그런데 왕릉 석물에 금이 가고 파손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현종 14년인 1673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다. 인선왕후 장씨도 효종 능 뒷편에 묻혔다. 효종의 능이 될 뻔했던 수원의 예정지에 들어선 능이 바로 사도세자정조의 능인 융건릉이다. 참 재밌는 것은 민간에서도 피하는 파묘[15] 자리가 영조의 원릉이 되었다는 것. 사도세자와 정조의 묫자리는 효종의 장지로 물망되었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능의 구조가 좀 특이하다. 릉이 앞뒤로 있는데, 이런 구조를 상하이원봉이라고 부른며 경종의 릉도 이런 구조로 만들어지다. 둘 릉 다 왕비 쪽의 곡장이 없으며 왕쪽에만 곡장이 있다. 차이점은 효종의 릉은 쌍릉의 위치가 대각선이지만 경종은 말 그대로 완벽한 앞뒤다.

5 평가

군사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기도 했고, 전란 이후의 민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등 여러 가지로 의욕이 강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을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군주'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6] 효종은 서울 근처의 방어기지인 남한산성을 보강했으며 내부 방어체계를 재정비했다. 다른 국방력 강화도 쌍령 전투 등으로 드러난 조선군의 한심한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군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훈련 강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북벌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통일을 완수한 청나라의 국력이 융성하던 시기였으니, 효종이 더욱 오래 살아있었다고 해도 북벌을 실현하기가 불가능하였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시절 황제는 바로 그냥 황제가 아닌 중국 역사상 백전백승의 먼치킨 황제 강희제였다. 게다가 청은 과거 명을 정복하는 데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갖고 있었다. 조선군이 아무리 강력해졌다 해도 조총병을 잘 이용해 야전에서나, 그것도 만주 일대에서 청군과 맞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정도지, 국력상 한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청을 상대로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벌이 기득권 세력(서인 노론)의 세력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까웠었다는 의견도 있다. 병자호란에 대한 국정운영 실패를 무조건적인 청 비판으로 몰고가 효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송시열은 신권강화를 위해 써먹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당시 삼번의 난이 벌어지고 대만에서 정경이 활약한 점을 들어, 삼번의 반란군이 청을 공격하고 바다에서는 정경의 협조를 받은 상황에서 강습하면 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번은 스스로도 명분이 없는 막장 집단인데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합집산을 거듭했고[17], 정경도 세력상 한계는 명백했기에 효종으로서는 왜란-호란 시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효종이 사망하자 북벌 계획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연암 박지원허생전 등을 통해서 이완을 찌질이로 만드는 등 북벌 계획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소현세자의 일 때문에 아무래도 정통성문제에 관해서 민감했다. 과연 효종의 정통성문제는 아들대인 현종시대에 제대로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6 인물됨과 일화

체구가 크고 힘이 강했던 모양으로 일이 끝나면 말을 타고 월도나 철퇴를 가지고 무예를 닦았다고 하며 영조 때 효종이 쓴 월도와 철퇴가 저승전에 남아있어서 무사들이 들어 봤는데 모두 못 들었다고 했다. 정조가 지은 사도세자 지문에 사도세자가 16세 때 효종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는 언급이 있다.

얼굴이 상당히 잘생겼다고 한다.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관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널빤지를 이어붙여 관을 만들었을 정도이니 키도 크고 어깨도 넓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인조도 꽤 미남이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인조의 아버지이자 효종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원종의 초상화를 보면 미묘하긴 하다 [18]

효종에게는 '팔장사(八壯士)'라는 8명의 호위 무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박배원, 신진익, 오효성, 조양, 장애성, 김지웅, 장사민, 박기성 이렇게 8명이다. 이들은 효종이 왕자 시절 청에 끌려갔을 때부터 효종을 호위했고 귀국 후 효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가까이에서 왕을 보필하였다. 뭔가 이름이 야사나 민담에나 나올 법한 이름들이지만 이들은 분명히 실록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이름이다. '팔장사'라는 표현은 실제로 실록에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효종/현종실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영조실록, 정조실록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붙여진 표현인 듯하다.

이들 중 오효성이라는 사람과는 야사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다. 효종이 청에서 돌아올 때 4세였던 현종을 교자에 태울 수 없어서 팔장사가 번갈아가며 어린 현종을 등에 업고 걸었는데, 어린 현종은 다른 장사들이 안으면 계속 울었지만 오효성이 안으면 얌전해져서, 심양에서 한성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오효성이 현종을 계속 업고 걸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기가 물거나 침을 하도 흘리는 바람에 어깨에 상처가 생기고 옷의 등이 많이 닳아 버렸다. 뒷날 효종은 팔장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오효성은 현종을 업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 효종이 오효성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취기가 오른 효종이 오효성을 총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이야기하려 하자 오효성은 이를 사양했다. 그러자 빈정 상한 효종은 갑자기 거문고를 들어서 오효성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쳐 버렸다! 당연히 오효성은 오른쪽 어깨를 다쳤고 결국 다음날 술에서 깬 효종은 이 사실을 알고 오효성에게 크게 사과하면서 더욱 총애했다는 야담이 남아 있다. 효종의 울컥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하지만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효종은 세자가 된 이후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의 출처는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19]인데 이덕무는 여기서 "이거 오효성의 후손이 기록한 것에서 뽑아 기록해 둔 거임"이라고 언급해 두고 있다. 따라서 야사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세조의 경우에는 워낙에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 정치까지 했던 양반이니까 신숙주가 취해서 왕이 시키는대로 팔을 꺾어버렸다는 야사가 남아도 없잖아 신빙성이라도 있는데 정통성 콤플렉스로 거의 구도자 수준의 생활을 유지한 효종이 술에 취해서 거문고로 신하를 두들겨 팼다는 것은...

확실히 술꾼들이 많았던 조선시대 왕 중에서 그래도 술은 자제했던 임금으로 조선의 술 문화에 대해서 한마디 하기도 했다. 이는 효종행장에 나온 기록이고 조선시대 관리들의 음주 문화를 비판한 말이지만 오늘날의 술 문화에도 시사할 바가 많은 말이라 하겠다. 실제로 효종실록을 보면 관리들에게 술을 줄이라고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으며, 1658년에는 아예 금주령을 내린 기록도 있다.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의 일신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한 사람의 경우는 본래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효종실록> 효종 대왕 행장

가정생활에서는 상당히 다정한 아버지면서도 아내에게 쥐여사는 애처+공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은 정실 왕비인 인선왕후 장씨에게서 훗날의 현종인 세자를 얻고, 공주들도 여러 명 낳았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는 안빈 이씨(安嬪李氏) 소생의 숙녕옹주(淑寧翁主)가 유일했다. 효종은 어느 날 세자와 공주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었는데, 숙녕옹주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정실 인선왕후의 눈치를 보며 선뜻 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선왕후는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 부부가 둘 다 마음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때부터 조선 왕실에서 전반적으로 아들보기가 힘들어진다.[20] 거기에다 기껏 태어나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결국 철종의 승하로 인해 효종의 (남자) 후손은 완전히 단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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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이 괴양이는 품고 있느냐?[21]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ㅡ 효종이 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쓴 언문(한글) 편지.

이 편지는 숙명공주가 친정(왕실)의 어른들과 주고받은 서찰을 모은 '숙명신한첩'(보물 1629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공주의 부모인 효종 내외 뿐만 아니라 남동생인 현종명성왕후 김씨 내외, 양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당대 왕족 등의 고위층 생활상과 왕실 가족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도 하거니와 한글서예 쪽에서도 조선초의 판본체에서 조선 후기의 궁체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자료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상당히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그리고 효종의 왕비이자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도 편지를 보냈는데 인선왕후는 "네 여동생은 벌써 임신해서 아기 베개에 수 놓는다고 수선 떨고 있는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식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7 대중매체에서의 이미지

7.1 드라마 추노에서의 효종

이인이 연기했다. 형인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생존한 조카 석견을 제치고 세자에 오른다. 그에게 있어 석견은 가엾은 조카이자 어쩔 수 없는 정적이다.

석견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송태하가 동궁전 내관을 통해 은밀히 연락하자 잠행을 핑계로 만나게 되는데, 석견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자가 이제와서 석견의 사면을 요청한다고 일갈하며 돌아간다. 이전 항목에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석견과 송태하를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하게 된다'고 작성되었지만, 효종은 송태하를 추적하는 황철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대며 송태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황철웅마저도 훈련원 관원을 동원하여 세자인 효종의 주변을 감시하고 미행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효종이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송태하와 이대길을 잡으려했지만 눈치빠른 이대길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아마 이대길이 송태하에게 말한 대사때문에 착각을 한 듯. 하지만 끝내 독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석견의 죄를 사면해 달라 인조에게 간청하나 인조가 거부하고(여기서 명대사를 날려주신다.) 결국 마지막회 나래이션을 통해서 즉위 후 십여년 뒤에 석견을 사면해주었다고 언급된다.

형과 조카를 제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죄책감과,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욕심 때문에 항상 속으로 괴로워 하는 인물이다.

7.2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의 효종

탤런트 김주영이 연기 했다.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지만 신문물에 관심을 갖고 예친왕과 친구로 지내며 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이는 형과는 달리 그 곳에서 청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더욱 갈고 닦은 인물. 이런 경향이 인조와 코드가 맞았는지 소현세자보다 인조에게 더 총애받는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독살을 당한 후 조카들을 지켜야겠다는 숙부로서의 마음과 그래도 한편으로 보위에 오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선군민회빈 강씨가 죽지는 않도록 노력하는 마음은 진심이라 강빈에게 충고를 해 주기도 하고 경선군 석철을 지키겠다고 몇번이나 다짐을 한다. 하지만 강빈은 석철이 죽으면 가장 유리해지는 그를 믿지 않는데다가 소용 조씨의 계략을 막으려고 한 일들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경안군 석견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안습...

극 초창기에는 심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날더러 어쩌라고' 하며 갈등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나 극이 계속될 수록 점점 소용 조씨의 계획에 태클을 걸면서도 미꾸라지처럼 위험에서는 빠져나가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발톱을 숨긴 범. 43화에서는 아예 소용 조씨는 송충이보다 징그러운 봉림대군이라고 하며 치를 떨 정도.

48화에서는 조씨의 처소로부터 인조를 데려오기 위해 내관 김인을 위시한 병력을 보내는 한편, 조씨를 중전 책봉 교지를 미끼로 꾀어내는데 이 때의 모습이 그야말로 끝판왕 포스가 풍긴다. 계획대로 인조 구출 작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22] 조씨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다과상을 차려오라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봉림대군의 진짜 모습을 단적으로 요약해 보여주는 장면. 김자점의 역모를 처리하는 장면 역시 폭풍간지.

결국 인조도 빼앗기고 첩지도 빼앗긴 조씨를 처단할 기회가 왔지만 그래도 묘호처럼 효자라서 그런지 조씨를 살려주라는 인조의 고명을 어길 수 없기에, 또 조씨를 죽여 분을 풀고 주도권을 가지려는 장렬왕후 조씨를 견제하기 위해 조씨를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성은이 망극함을 느끼기는 커녕 자신에게 역으로 죽으라고 저주를 하는 조씨를 용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결국 사형시키기로 하는데, 현실보다 더 가혹한 처분이 내려졌다.

장렬왕후 조씨와 더불어 이 드라마 최후의 승자 중 하나. 또 조 귀인, 민회빈 강씨 등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이 강해 상대적으로 남성 캐릭터가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았던 이 드라마에서 김자점, 내관 김인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남성 캐릭터들 중 하나이다.

7.3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2 : 조선왕조실톡

손진영이 연기하여 벨테브레가 만든 총을 쏘며 "나이쓰"를 외치며 벨테브레를 칭찬한다.
  1. 원나라고려 충선왕에게 내린 시호한자까지 똑같다. 효종이라는 묘호는 청나라 몰래 쓴 것이다. 인조부터 철종까지 모든 왕이 다 그랬다.
  2.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은 2개가 있는데, 인조가 즉위 전에 살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왕자 시절 효종이 살던 '하어의궁(下於義宮)'이다. 효종이 태어난 곳은 상어의궁. 하어의궁 터는 오늘날 혜화동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
  3. 군호는 황해도 봉산에서 유래했다
  4. 이 시헌력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음력이다.
  5. 이 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시점은 숙종 1년으로, 예송을 잘못 이끈 죄로 유배된 데다 남인에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송시열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독대 내용을 공개한 것인데... 과연? 내용을 보면 효종은 실질적인 군사북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반대로 유교적인 수신책만을 얘기하고 있으니 뭐...(…)
  6. 현대 의학으로 해석하면 치료 전 종기가 악화되면서 혈관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침이 혈관을 손상시켜서 과다 출혈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7. 유후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현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후 다시 어의로 복귀했다.
  8. 더하여 만일 들통나면 싹다 대역죄를 입어 능지형+친철까지 연좌+효수형에 처해져 가문이 씨가 마를수도 있다. 이런 도박을 하는쪽은 대게 권력에서 밀려난 쪽이다.
  9. 당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뒷날 흥선대원군이 재건축할 때까지 폐허가 되어 있었다.
  10. 효종실록 효종 10년(1659년) 윤3월 26일
  11. 선조 때부터 궁중생활을 했을 것이다.
  12. 원래 절차는 왕이 죽은 후, 제대로 치수를 세서 거기에 맞추어 며칠 동안 관을 짜는게 관례다.
  13. 1990년대에는 세종의 영릉과 구별하기 위해 '녕릉'이라고 표기했었다. 오늘날에는 어법대로 '영릉'이라고 써 놓고 한자를 함께 달아 놓았다.
  14. 오늘날에는 화성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5. 무덤의 원래 주인의 관을 옮겨 생긴 빈 묫자리.
  16. 그리고 작품을 보면 효종 미남설을 반영한 것인지 외형도 제법 준수하게 묘사되었다. 딱 봐도 무능하게 생긴 아버지나 어째 뚱뚱하게 묘사된 아들에 비한다면.
  17. 역으로 그 때문에 강희제가 오삼계 일족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관대한 처벌을 한 것이지만.
  18. 과거에는 현대와는 달리 큰 키와 후덕한 체구, 발달한 골격을 부와 건강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특히 남자라면 건장한 체구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 경향이 있었다. 왕후 간택시 턱과 볼살이 두드러져 복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선호했던 것도 이 때문. 게다가 무예연마에 힘쓴 왕이었으니 활력이나 근육도 발달했을 터, 지금 식으로 분류하자면 짐승남 같은 터프가이미남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 정확한 출처는 청장관전서 제57권 <양엽기> 4의 '팔장사'편.
  20. 오죽하면 효종 이후 대군으로 봉해진 왕자가 전무할 정도.
  21.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여담으로 효종의 손자이자 숙명공주의 조카인 숙종도 애묘가였다.
  22. 사실 이 시점에서는 조씨도 끝판왕 포스를 내뿜던 시절이라 봉림대군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은 계산하고 있었다.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없는 사이 인조 구하려고? 그게 잘 될 것 같냐?" 라고 일갈한 게 증거. 실제로 조씨는 인조를 꽁꽁 숨겨놓은 것으로 모자라 인조 주변에 무장병력을 왕창 깔아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이 자기를 배신할 것과 내관 김인이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인간흉기라는 것은 계산하지 못했고, 그것이 조씨의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