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1 2003년 제작된 호러 영화

파일:Attachment/더 로드/Dead End.jpg

Dead End

크리스마스 이브, 차를 타고 외가에 가던 프랭크 가족은 프랭크가 깜박 조는 통에 낯선 길에 들어선다. 방향도 목적지도 없는 길을 헤메는 프랭크 가족들 앞에 아기를 안은 여인 등 이상한 환상들이 나타나고, 차가 멈출 때마다 의문의 검은 차를 탄 누군가에 의해 차례대로 한 명씩 살해당하는데...

2003년 제작된 미스테리 호러영화. 감독은 쟝 밥티스트 안드레아.

원제는 Dead End(막다른 길)지만 한국 제목은 "더 로드"가 되어 동명의 다른 영화, 소설 때문에 헷갈릴 소지가 많다. 제작비 90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로, 극장 개봉되지 않고 DVD로만 출시되었으나 77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비범한 작품이다. 2003~2004년 각종 환상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7개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꽤 유명했던 영화.

환상특급 에피소드를 장편화시킨 듯한 "낯선 길" 괴담. 저예산 호러의 경우 제작비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아예 쌈마이스러운 특수효과로 떡칠을 하거나,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공포감을 들게 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이 경우 제작비 아낀 티를 최대한 덜내면서 분위기와 연출만으로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입시키는 것이 관건이며, 이 영화는 이 부분에 있어 탁월하다. 다만 그 반전의 경우 호러 영화 팬이라면 시놉시스만 읽어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이라든지 일부 부자연스러운 등장인물의 행동[1] 등이 흠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말보다 과정, 즉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길을 가며 느끼는 불안함과 공포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쪽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훌륭한 환상 호러.

2 코맥 매카시의 소설과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코맥 매카시의 10번째 소설과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소설은 2006년에 출간된 뒤에 퓰리처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상을 수상. 매카시가 자신의 어린 아들[2]과 자기가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다는 가정 하에 아들을 생각하며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서문에 이 책을 아들에게 바친다는 글이 있다. 일반적으로 코맥 매카시가 한 작품을 쓰는 데 몇 년의 시간을 쏟는데 반해 이 작품은 거의 1년 만에 완성되었다. 작가 본인도 누군가가 대신 써주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2009년에 영화화되었다. 홍보문구가 매우 비범한데, "감히 성서에 비견되는 소설".[3]

장르문학순수문학의 경계가 희미해진, 혹은 더 이상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미국 문학의 대표적 작가답게 외연적으로는 완연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출간년도가 2006년으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비롯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영화, 소설, 만화, 게임 등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여 중요 장르로 부상하기 몇 년 전인 것을 보면 역시 비범하다고 해야 할 듯.

어떤 일에 의해 몰락하고 황폐해진 지구에서 두 명의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서 떠도는 이야기이다. 마치 북두의 권의 세계처럼 모든 문명이 파괴되고 온갖 무법자들이 판치는 세상으로 식량이 부족해 사람마저 잡아먹는 암울한 세계이다. 심지어 여자를 임신시켜 아이를 낳게해 그 아이를 잡아먹는, 아주아주 끔찍한 묘사도 나온다. 매드 맥스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남자들은 노예로 부리고, 여자들은 임신시키며, 소년들은 성노리개로 사용하는 무법자들, 광신에 빠져 인간을 산제물로 제사지내는 광신자들, 덫을 만들어놓고 건물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았다가 팔다리를 조금씩 잘라 먹는 식인종들을 비롯,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많은 인간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주인공 일행은 무력하게 도망칠 뿐이며, 결정적으로 인간군상들 역시 거의 몰락하고 스러져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 중에서도 완전히 인류멸망으로 가기 바로 직전의 상태.

물조차 함부로 먹을 수 없어서 여간 조심하는 것이 아니며, 검정색의 강물은 너무나도 흔하게 나온다. 거대한 화재가 있었고 사방이 재로 뒤덮이며 구름에 가려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상황. 지구 생태계 자체가 통째로 죽어나가는 상황으로 동식물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멸종했고 심지어 버섯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정도로, 말 그대로 인류에게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정도다.

작중 상황은 이미 문명이 멸망한 뒤로도 몇 년이 지난 상태. '멸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시계가 동시에 멈추고, 창밖이 장미색으로 물들었으며 땅이 녹고 재가 세상을 뒤덮고, 세상이 추워지고 있다는 묘사 등을 보면 핵전쟁으로 인한 뉴클리어 아포칼립스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주인공들은 켄시로같은 강자가 아니고 일반 소시민이라 살아남기 위해 이동하는 주인공들의 행보는 그저 시궁창. 이런저런 물품들을 구해보려고 해도 이미 다 털리고 남은 찌꺼기나 겨우겨우 얻어서 살아가는 수준이고 다른 집단에게 잘못 잡혀서 험한 꼴 당할까봐 행동거지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총도 리볼버에다가 총알마저 한 발(소설의 시작 시점에는 두 발이 있었으나 초중반부에 아들을 구하느라 한 발을 써버린다.)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나무를 깎아 실린더에 넣어서 총알이 다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상표도, 색채도 묘사되지 않아 그저 칙칙한 이 소설에 유독 코카콜라만은 제대로 나와서 코멕 메카시가 힘들던 시절에 코카콜라에게 지원받은게 있어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소리가 있다. 그것도 그렇지만, 코카콜라 자체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과거 문명의 풍요를 알려주는 일종의 매개 역할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의 칙칙함, 곳곳에 널리고 날리는 재와, 시꺼먼 환경과 아포칼립스 이전의 풍요로움을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에 이만한 연출이 있을까? 코카콜라(탄산음료)를 처음 접한 아들이 캔 개봉시 탄산이 끓어오르는 현상을 보고 경계하면서 입을 대는 장면을 통해, 아들이 '사건' 이전의 문명의 풍요를 누려보지 못한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온통 회색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빨간색으로 빛나는 코카콜라의 이미지. 특히 코카콜라는 미국을 대표하는 아주 이름있는 상표이기도 하다.

사실 주인공과 아들은 서로 다른 문명의 사람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주인공은 세상이 멸망하기 전의 삶을 겪었고, 아들은 세상이 멸망한 후 태어났다. 영화에서도 보면 매우 잘 관리된 조그만 방공호에서 상당한 양의 식량과 과거 문명의 흔적(몇 갤런들이 통에 담긴 물과 각종 통조림, 마카로니에 화학처리 간이 변기도 있었다.)을 발견한 주인공은 하루만이라도 사람답게 살자는 의미였는지 아들과 깨끗이 목욕하고 이발하고 어디서 양복까지 구해와서 입은 다음에 촛불을 켜고, 술과 담배까지 곁들인 저녁식사를 한다. 아들은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주인공은 아들에게 "너에게는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라며 씁쓸한 감정을 표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주제로 다룬 게임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라스트 오브 어스를 보면 등장인물 엘리의 가방에 더 로드를 패러디한 책이 들어있다. 멸망한 세상을 가족애(아니면 그에 준하는 유대감)의 힘으로 두 사람이 헤쳐 나간다는 주제도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엔딩과 영화의 엔딩의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게 막을 내린다. 게임 폴아웃 3를 제작할 당시 주요 모티브를 제공하였던 영화로도 개발진에 의해 직접 언급된바 있다. 당장 봐도 핵전쟁, 아버지, 콜라, 정신나간 실내장식을 선호하는 레이더 등등 딱 보면 착 오는 요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영화판이 은근히 캐스팅에 신경을 썼다. 5분 이상 나오는 사람이 주인공과 아내와 아들이라서 3명만 신경써도 됐을텐데, 지나가는 조연도 꽤 유명한 배우들을 썼다. 주인공 비고 모텐슨이야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고른으로 나온 배우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샤를리즈 테론, 잠깐 주인공 일행과 지낸 노인은 로버트 듀발, 나중에 주인공 아들을 거둬들이는 여행자 남성은 가이 피어스 등 출연진들의 명성이 쟁쟁하다.

주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이 틀 아래의 내용은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의 줄거리나 결말, 반전 요소가 직,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 누설을 원치 않으시면 이하 내용을 읽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문서를 닫아주세요.


주인공은 어느날부터 누군가 자신들을 쫓는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게 되고 어느 폐허가 된 마을에서 약탈자로 오해받아 다리에 화살을 맞는다. 이에 주인공은 자신을 공격한 남자에게 어느 폐선에서 주은 조명탄을 쏘아 죽이고 살아남은 여자에게 왜 우리를 따라다녔느냐! 라고 추궁하지만 그 여자는 쫓긴 뭘 쫓아 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자신들을 추격하는 자들을 해치운 게 아니란 걸 안 주인공은 아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지만 부상당한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사망한다. 주인공의 아들은 좋은(묘사를 보면 조금 무뚝뚝하나 친절하고 착한) 여행자들을 만나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동안 주인공을 쫓았던 사람들은 바로 그 여행자들이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판에서는 가족으로[4] 구성된 여행자들과 합류한다. 이들은 어쩌다가 가는 방향이 겹쳤는지 주인공 일행의 뒤를 따르다가[5], 주인공이 부상당해서 며칠동안 쓰러지자 혹시라도 혼자 남을 아이가 걱정돼서 멀찌감치서 지켜보고, 주인공이 죽자 주인공의 아들을 일행에 합류시켜 준다.
  1. 가족들이 죽어가는데 숲에서 여자 알몸 사진을 보며 자위행위나 하고 있는 아들이라든지... 결말을 생각하면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2. 코맥 매카시는 60대에 아들을 낳았다.
  3. 소설 자체가 성경, 특히 요한묵시록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4. 주인공보다는 젊은 남녀와 그들의 자녀와 개로 구성된 일행이다. 주인공의 아들의 꿈이 또래의 아이를 만나는 것인데, 이 일행에는 주인공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두명이나 있다.
  5. 주인공과 아들이 방공호에서 머물때 들리던 개의 기척이 이 일행의 개일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