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 강게이
김시진 감독을 닮은 것 같기도..[1]
이름 | 호세 데니스 마르티네스 에밀리아 (José Dennis Martínez Emilia) |
생년월일 | 1955년 5월 14일 |
국적 | 니카라과 |
출신지 | 그라나다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볼티모어 오리올스 (1976-1986) 몬트리올 엑스포스 (1986-199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4-1996) 시애틀 매리너스 (199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98) |
1 개요
전직 메이저리그 투수이자, 니카라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를 밟은 선수이다. 니카라과에서는 대통령보다 더 인기가 많았으며, 그래서 별명도 "엘 프레지덴테", 즉 가카 대통령이다. 게다가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 있는 야구장의 이름은 "데니스 마르티네즈 내셔널 스타디움"...이 정도면 말 다했다. (..) 어쨌든 남미 출신 투수로는 레전드 반열에 올라있는 명투수.
1970년대 후반 볼티모어의 리즈시절에 이바지하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지만 20대 청년 시절부터 술을 심하게 좋아했던 그의 알콜 탐닉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그를 옥죄게 된다. 조금씩 하락하던 성적은 팀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1983년에 최악(7승 16패 ERA 5.53)을 찍게 되고, 설상가상 오프시즌엔 음주운전이 적발돼 150시간 봉사명령까지 받는 흑역사까지 연출한다. 절치부심한 그는 알콜중독은 털어냈지만 이번엔 어깨와 팔에 차례로 부상을 당하며 예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1986년 약체 몬트리올로 트레이드된다. 이후 FA를 선언했으나 퇴물로 전락한 그에게 오퍼가 올리가 없었고 결국 독립리그 팀에 입단하는 신세에 이르게 된다.
야구 인생의 밑바닥을 뚫고 커리어를 그대로 마감할 뻔했던 마르티네스는 전성기 시절 90마일 중반대의 힘있는 속구로 승부하던 스타일을 버리고 하드싱커와 슬라이더를 통한 맞춰잡는 투수로 변신, 87년 시즌 중반에 몬트리올에 합류해 11승 4패 ERA 3.30의 쾌투를 보여주며 커리어 반전에 대성공을 거두게 되며,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1991년 7월 28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13번째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El Presidente, El Perfecto!
1995년에는 오렐 허샤이저와 함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기도 했지만, 둘 다 전성기가 지난 탓에 절정의 기량을 뽐냈던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의 에이스 삼총사를 앞세운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패했다.
통산 245승. 볼티모어의 전성기를 함께 한 투수이기 때문에 볼티모어의 자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2 이야깃거리
- 몬트리올 에이스 시절, 돈에 쪼들리던 구단이 스타드 올랭피크에서 마르티네즈의 이름이 붙은 핫도그를 팔기도 했다. 몬트리올이 핫도그로 좀 유명한 동네이다 보니 잘 팔렸다고..
- 통산 200승 이상을 거두었지만, 단 한번도 20승을 거두지 못한 투수 중 한 명. 척 핀리, 케니 로저스, 팀 웨이크필드도 여기에 들어간다. 대신, 몬스터 시즌은 없지만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 1995년 커비 퍼켓의 턱을 실수로 공으로 맞추어 죄책감에 덕아웃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정작 이 사건은 이 바로 뒤의 일 때문에 내용이 있는 듯? 자세한 건 알버트 벨 마지막 부분 참고[2]
- 은퇴 후 볼티모어의 스프링 캠프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지냈으며, 그 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소속된 마이너리그 팀에서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또, 자기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세워 불우한 환경에 처한 어린이들 (특히 중남미)을 돕고 있다고 한다.
- 현역 시절, 배리 본즈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배리 본즈와의 100번의 맞대결에서 21안타 8볼넷을 기록했고 피홈런은 1개뿐이다.
- ↑ 201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재직중이던 시절의 모습.
- ↑ 퍼켓은 이 다음 시즌 갑작스런 녹내장으로 인해 일찍 은퇴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건과 녹내장 발병과는 무관하다고 봐야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