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생활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1991년 월드시리즈 6차전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환호하는 모습.
And we'll see you tomorrow night. -그리고 저희는 내일 밤에 뵙겠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당시 중계 아나운서 잭 벅의 마지막 코멘트.)
이름 | Kirby Puckett |
생몰월일 | 1960년 3월 14일 - 2006년 3월 6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일리노이주 시카고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2년 1월 드래프트 1라운드 3번(미네소타 트윈스) |
소속팀 | 미네소타 트윈스(1984~1996)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커비 퍼켓 | |
헌액 연도 | 2001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2.1% (1회) |
미네소타 트윈스의 영구결번 | |||
3 | 6 | 10 | 14 |
하먼 킬러브루 | 토니 올리바 | 톰 켈리 | 켄트 허벡 |
28 | 29 | 34 | 42 |
버트 블라일레븐 | 로드 커류 | 커비 퍼켓 | 재키 로빈슨 |
1993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 ||||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 → | 프레드 맥그리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1 개요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중견수. 미네소타의 1987년과 1991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자, 배드볼 히터로서 컨택과 장타력을 동시에 겸비한 타자. 조 디마지오가 은퇴한 1951년 이후 가장 높은 커리어 타율을 기록한 우타자로 남아있다.
미네소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팬들에게 친절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선수였다. 비운의 녹내장으로 인해 조기 은퇴를 했고, 그 뒤 사생활을 둘러싼 여러 구설수와 너무 일찍 은퇴한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건강이 악화되어 겨우 만 45세에 타계했다.
통산 성적은 0.318 2,304안타 207홈런 1,085타점.
2 선수 생활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야구를 접하고, 야구에 인생을 걸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키. 고교 시절 평범했던 성적에 키도 고작 173cm에 몸무게도 100Kg가 나가는 그의 체구를 보고,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고, 고교 졸업 무렵에 결국 프로는 커녕 대학에서는 그를 찾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포드 자동차의 공장에 취직해서 야구 선수로서의 삶도 포기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년 후에 기어이 브래들리 대학에 입학해서 야구 선수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했고, 대학에서 실력이 급상승하며, 마침내 1982년 1월 드래프트에서[1] 미네소타의 1라운드 3번 지명을 받는데 성공한다.
마이너리그는 일찍 졸업한 후, 1984년 데뷔하는데 데뷔전에서 4안타를 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미네소타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해 신인치고 훌륭한 0.296 165안타의 성적을 기록했다. 신인 시절 컨택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찰리 매뉴얼의 지도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 다만 문제는 거대한 체구에 비해 장타력이 형편없었다는 것. 데뷔 첫 해 단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했고, 이듬 해인 1985년에도 단 4개의 홈런에 그쳤다.
그런데 1986년 미네소타 트윈스의 또 다른 레전드인 토니 올리바의 지도를 받아 장타력이 급상승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파워히터가 된 것은 아니고, 컨택은 그대로 유지한 채, 무려 30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퍼켓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500타수 이상 무홈런 시즌(1984년)과 30홈런 시즌을 모두 보낸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후로도 20홈런 정도는 꾸준히 기록해 주면서 퍼켓은 완전히 미네소타의 주전 중견수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퍼켓의 활약 속에 미네소타는 점차 성적이 상승하며, 1987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승 3패로 누르고 미네소타 이전 이후 최초이자, 무려 63년만의 정상 등극에 성공했다. 퍼켓은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0.357의 타율을 기록했다. 정규시즌에서도 빛나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최다안타왕 3연패를 기록하며 2006~2011년 스즈키 이치로가 5연패를 할 때까지 최다안타왕 3연패를 달성한 마지막 선수가 되었고, 1989년에는 타격왕에도 올랐다.
1987년 우승 이후, 주춤했던 미네소타는 1990년 꼴찌를 딛고 1991년 월드시리즈에 다시 오르는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극적인 승부에서 퍼켓은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상대의 역전 적시타를 호수비로 막아내고, 역전 희생플라이를 쳤으며, 11회말 끝내기 홈런을 작렬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만든 것. 7차전에서 잭 모리스의 10이닝 완봉승에 힘입어 미네소타는 다시 월드시리즈를 차지했다.
그 뒤 퍼켓은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팀의 주축들은 모두 떠났지만, 퍼켓만이 홀로 남아 미네소타의 중견수와 3번 타자 자리를 지키며 변함없는 활약을 선보였다. 1992년 최대안타왕, 파업으로 조기 중단된 1994년에는 108경기에서 112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에 올랐다.
1995년 9월 2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와의 경기 1회말 때 상대팀 선발투수 데니스 마르티네즈의 공에 턱을 정통으로 맞는 부상으로 시즌을 종료했지만(어차피 정규시즌 막판이었다), 1996년 시범 경기에서 0.346의 타율을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던 그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1996년 3월 28일 아침에 일어난 퍼켓은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오른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청천벽력 같은 악성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거듭된 수술과 치료에도 녹내장이 회복되지 않자 퍼켓은 허망하게 커리어를 접어야 했다. 그리고 이게 퍼켓 개인으로서의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3 은퇴 이후의 삶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전국구 스타 퍼켓은 은퇴 이후, 마음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비극적인 은퇴 때문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쉽게 입성했지만, 한 번 흔들린 마음은 결국 여러 구설수로 이어졌다. 아내와의 이혼 소송 및 여러 보도를 통해 팬들과 동료들에게 친절했던 그가 여자에게만은 폭군처럼 굴고 폭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 알려졌다.
그리고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해 재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비록 무죄 선고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와중에서 또 다시 앞의 여자에게 폭력적이었다는 보도와 맞물리면서 퍼켓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그 사이 퍼켓은 그렇지 않아도 적지 않던 100Kg의 몸무게가 절제를 잃으면서 점차 불어 135kg로 늘어났다. 비록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약혼하면서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어난 몸무게는 결국 가족력인 뇌졸중과 만나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결국 살고 있던 애리조나주의 자택에서 그는 갑자기 쓰려졌고, 결국 2006년 3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나이로 볼 때, 갓 은퇴해서 미네소타에서 행복하게 존경받으면서 가끔 구장에도 오고 그랬어야 할 인물이 불의의 은퇴와 여러 구설수로 흔들린 것이 결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4 선수 스타일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다. 통산 볼넷 개수는 고작 450개. 12시즌을 뛰면서 얻은 수치가 그 정도였다.[2] [3] 하지만 들어오는 공은 일단 다 맞추는 컨택 능력이 있었고, 20개 홈런을 바라볼 수 있는 장타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또 그가 1번 타자가 아니라 중심 타선에 위치한 선수였기 때문에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다. 234안타를 친 시즌에 그가 얻은 볼넷은 고작 23개. 대신 삼진도 적게 당하는 선수라 단 한 번도 100삼진 이상 당한 적이 없다. 물론 볼넷보다 항상 삼진은 조금 많았지만 심하게 삼진만 당하는 공갈포 유형의 타자도 아니었던 것.
안타제조기라서 첫 10년간 안타 개수는 메이저리그 역대 5위이며, 그가 뛴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안타 개수로 따지면 메이저리그 1위다. 비운의 은퇴만 아니었다면, 3,000안타는 무난했을 것이다. 나이 35세 시즌에 0.314에 169안타를 친 실력에 비춰볼 때, 녹내장이 아니었다면, 4년 정도 더 뛰면 충분히 700안타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웨이드 보그스와 토니 그윈이 3000안타를 때려내는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퍼켓을 상징하는 것은 뛰어난 컨택과 준수한 장타력도 있지만, 수비력이 빼어났다. 체구는 있었지만, 의외로 민첩하고 날렵해서 타구 판단을 잘 했고, 무엇보다 송구 능력이 기가 막혔다.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그의 송구 능력을 얕잡아보고 뛰다가 걸린 상황이 많았다. 데뷔 년도인 1984년 어시스트 숫자가 16개, 그 이듬 해에는 19개를 기록했고, 그 뒤로는 퍼켓의 어깨를 의식해서 주자들이 알아서 자제하면서 어시스트 숫자는 줄어들었다. 대신 골드글러브를 6번 차지했다.
무엇보다 그를 상징하는 것은 인품이었다. 팀 동료들의 리더였고, 동료와의 사이도 정말 좋았다. 아울러 팬들에게도 항상 친절했고, 언제나 팬들의 싸인에 흔쾌히 응한 선수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그는 10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고,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로도 선정되었다. 비록 은퇴 이후 사생활 때문에 이미지를 많이 깎아 먹었지만, 적어도 현역 시절의 퍼켓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선수였던 것은 틀림 없다.
- ↑ 제프 쇼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는, 정식 드래프트가 아닌 JUCO 출신나 퍼켓처럼 사정이 있어서 정식 드래프트에 지원 못한 선수를 구제하기 위해 있었던 추가 드래프트이다.
- ↑ 얼마나 적은 수치냐면 국내프로야구 심정수 선수가 2003년 한 시즌에 얻어낸 볼넷 갯수는 124개이다.
- ↑ 테드 윌리엄스가 3년만 뛰어도 460개를 넘게 얻어내던것과 비교해보면 그가 눈야구에 능한 출루형 타자와는 반대라는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는 선구안이 나쁘다기보단 퍼켓이 때려서 나가는것을 선호했다고 보는게 낫다. 그는 시즌 100삼진을 한차례도 당하지 않은 타자중 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