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폼이 매우 간결하다.[1]캐치볼?
이름 | Timothy Stephen Wakefield 티모시 스티븐 웨이크필드 |
생년월일 | 1966년 8월 2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플로리다주 멜번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8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아마추어 드래프트 8라운드 |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리츠 (1992~1993) 보스턴 레드삭스 (1995~2011) |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동했던 우완투수. 대한민국 한정 별명은 웩옹.
1 메이저리그 커리어
대학 때는 주로 3루수로 뛴 포지션 플레이어였고[2]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8라운드에 지명하여 계약한 1988년 싱글A 리그에서도 3루수와 1루수[3]로 뛰었지만 마이너 리그에서 1년 반을 뛰며 타자로서 가능성이 없다[4]는 말을 듣고 바로 다음 해부터 투수로 전향했다.
스프링캠프때 팀의 다른 1루수와 캐칭볼을 하는데 너클볼성 송구를 하는 것을 본 우디 하이키 감독이 "어이, 방금 그건 꽤 쓸만한데? 스트라이크도 던질수 있겠나?" 라고 물어서 "네, 고등학교때 투수도 했어요. 못 할것도 없죠." 라고 답했고, 시합 종료후 마운드에서 약간 던져봤는데 잠시 후 감독이 다시 사무실로 불러서 가봤더니 다른 코치들이 우루루 앉아서 그의 투구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고 감독이 말하길 "나도 이런 말하는거 뭣하긴한데... 이런 말은 나도 하고 싶어서 이런 말하는 건 아니고... 구단에서 자네가 1루를 맡는 걸 원하지 않나봐. 투수로 변신했으면 하는 모양이야..." 라고 말하길래 처음에는 자기를 이런 식으로 포기하나 싶어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난 아직 칠수 있는데...' 라고 생각중인데 감독이 대뜸 "안 돼!" 라고 말한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즉, '투수로 전향 할래? 아니면 집으로 갈래?(그리고 돌아오지마.)' 라는 이야기라서 눈물을 머금고 "좋습니다." 라고 승낙 했다고...[5]
그리고 1992년 26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당시에는 준수한 외모와 겹쳐 13경기에서 8승1패 2.15를 기록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내셔널리그 챔피온쉽에서도 팀이 2연패를 당한 상태에서 3차전에 등판하여 승리한다. 하지만 소포모어 시즌엔 6승 11패 평균자책점 5.61로 배팅볼 기계화(...) 되었고[6] 그 이듬해엔 마이너리그로 강등을 당하고 만다.
이후 1994년엔 스프링캠프에도 참가하지 못하며 피츠버그는 그를 방출하게 되었고, 1995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며[7][8] 2011년까지 17년 동안 한 팀에서만 뛴 레드삭스의 간판투수가 된다. 비록 데뷔는 레드삭스에서 하지 않았지만 거의 20년을 레드삭스와 함께 했으니 명실상부한 레드삭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볼 수 있다[9]. 레드삭스 팬들에게의 위상은 성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한화 이글스의 송회장님 급이라고 보면 된다.
2005년에는 레드삭스와 종신계약을 맺었었다[10].
2007-08년에는 2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며 노익장을 과시했고, 2009년에는 AL 올스타에까지 선발되었으나 부상으로 시즌의 1/3을 날려 먹었다. 부상의 여파는 2010년까지 계속되었고, 2011시즌에도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정작 현지 팬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11] 나이가 들어 더는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시즌 초반에는 실제로 중계진으로 나와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부상으로 아웃된 자리를 땜빵했다. 마쓰자카가 돌아올려면 한 세월이기 때문에
2 너클볼러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11년에 만 45세를 넘기면서 제이미 모이어 옹을 대신해 메이저리그 현역 최고령 투수가 되었으며[12] 최고 구속도 130Km 대에서 노는 이 선수가[13] 20년간 장수하며 200승-2000탈삼진-3000이닝 소화 등의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많은 야덕들에게 로망의 화신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아닌 너클볼 투수이기 때문이다. 필 니크로의 대를 잇는 너클볼 투수이자 2010년 뉴욕 메츠의 R.A. 디키가 너클볼을 장착해 활약하기 전까지는 21세기 메이저리그에서 너클볼을 주 구종으로 삼는 유일한 투수였다. 너클볼러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정교한 9분할 제구로 유명했다. 타자의 히팅을 유도하는 너클볼 투수의 특성상 카운트 승부가 중요한데 평소엔 불규칙한 궤도로 느릿느릿하게 날아오는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상대할 준비를 하던 타자를 갑작스레그래봤자 130km지만 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는 투심으로 잡아버리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그리고 그 패턴을 대비하고 있으면 60마일로 휘청거리며 기어오는 너클볼 애당초 너클볼 자체가 작은 변화로도 회전이 들어가면 평범한 배팅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손의 감각이 중요한데 그런 너클을 능숙히 다루는 만큼 제구력도 좋았다고 한다.
다만 너클볼을 안정적으로 받아낼 수 있는 포수는 메이저리그에도 많지 않기 때문에 포수 궁합에 따라 성적이 널을 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 과거 보스턴의 주전 포수였던 제이슨 배리텍[14] 대신 덕 미라벨리를 전담 포수로 두었던 것도 이 때문. 미라벨리도 정상적인 포수 미트를 쓰지 않고 훨씬 큰 소프트볼 1루수 미트를 써야 했다고.
주전 포수와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로 2006년의 트레이드 소동이 있다. 2005년 시즌 후 더스틴 페드로이아의 콜업까지 남은 1년을 땜빵하려고 2루수 마크 로레타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너클볼 캐칭 말고는 도대체 빅리그급의 기량이 아니었던 나이 든 포수 미라벨리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시켰는데, 새 전담포수 조시 바드와 웨잌옹이 2006년 4월 한달 간 거둔 성적은 1승 4패에 포일이 무려 10개(…)였다. 결국 트레이드 5개월, 시즌 개막 한 달만인 5월 1일. 보스턴은 미라벨리를 다시 트레이드해왔다. 그리고 역시나 이때 악의 제국은 보스턴이 미라벨리를 못 가져가게 하기 위해(…) 고추가루 경쟁입찰을 했다. 트레이드 당일 오후 7시에 양키스는 시즌 첫 펜웨이 파크 원정이 잡혀 있었고, 레드삭스 선발이 웨이크필드였기 때문에 트레이드가 성사되면 당연히 미라벨리가 그 경기에 나설 것이었기 때문. 케빈 타워스와 테오 엡스타인 두 GM은 평소 친분도 있었고, 파드리스에는 베테랑 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있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트레이드[15]를 성사시켰고, 레드삭스 프런트는 미라벨리를 구단주의 전용기를 띄워 샌디에고부터 보스턴까지[16] 데려왔고, 6시 48분에 공항에 도착하자 경찰차를 동원하여 경기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미라벨리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경찰차 안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고 인사를 나눈 동료가 웨이크필드를 제외하면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천하의 개쌍놈 소리를 들으며 1번타자로 첫 타석에 들어섰던 자니 데이먼 밖에 없었다고.(…) 당시 사진을 보면 삭스 동료들이 매우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모셔온 보람이 있었는지 웨이크필드는 7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를 거뒀으며 미라벨리는 삭스 팬들에게 the Savior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17]
3 통산 200승
월급이야 어쨌든(...) 2011년을 193승으로 시작한 웱옹은, 저주받은 레드삭스의 2011년 선발 로테이션[18] 덕에 선발 한 자리를 맡게 되어 그럭저럭 순항, 시즌 중반 200승 달성이 무난해 보였으나, 7월 26일 199승 달성 이후 불펜의 열렬한 불질에 힘입어 7번의 선발등판에서 모두 승수 추가에 실패했다. 결국 9월 13일, 팀의 5연패 후 펜웨이 복귀전에 등판, 초반 홈런 2방으로 2-3, 4-5로 끌려갔으나, 보스턴 타선의 폭발에 힘입어 18-6으로 승리, 통산 200승 달성에 성공했다. 올레! 자 이제 영구결번 가나요
그러나 2011년, 어메이징한 추락을 경험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몰락[19]에 큰 영향을 끼친 콩가루 팀워크를 다잡을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개인 기록에만 신경썼다는 주장이 나오며 한국과 현지에서 모두 고참으로서의 리더십이 아쉽다는 평이 늘었다.
결국 2012년 2월 17일, 은퇴 선언을 하며 20년 동안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4 사회공헌
웨이크필드가 삭스팬뿐 아니라 많은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꾸준한 성적이나 특이한 구질 뿐 아니라 훌륭한 인품덕분이기도 한데,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후보로 8번(!) 추천되다가 2010년 드디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오오 대인배.
- ↑ 아닌게 아니라 최훈은 본인의 카툰에서 타자로 하여금 치고자 하는 의욕을 뻇어가려고 저런 폼을 만든게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솔직히 관중이 봐도 매우 대충대충하는것처럼 보인다. - ↑ 대학교 2학년때는 홈런을 22개나 쳐서 그때부터 스카우터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 본인은 프로에서 장타력 있는 1루수가 되고 싶었다고...
- ↑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뀐 것에 대한 적응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웨이크필드 본인 말을 빌리자면 2할도 친적이 없다고 스스로 말함
- ↑ 출처 : E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EIDF 2012 스포츠 다큐멘터리 '너클볼!' 에서의 본인 인터뷰. 앞의 1~3번 주석도 동일 출처. 참고로 이 다큐멘터리는 너클볼항목의 6번 문항에서도 거론된다.
- ↑ 개막전에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를 상대로 선발 출장했는데 9회까지 완투하며 승리투수는 되었지만 볼넷을 10개나 내줬다고 한다. 옆에서 그 얘기를 듣던 R.A. 디키가 "10개라구요?" 라면서 반문하며 "믿을 수가 없어요. 제 영웅이신데..." 라며 놀라워 한다. 웨이크필드옹은 다 지난일이라 그런지 영웅이란 말에 기분이 좋은건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허허허허" 웃는다. 역시나 출처는 다큐멘터리 '너클볼!'
- ↑ 웨이크필드보다 더 이전 세대의 너클볼 레전드인 필 니크로는 그가 92년 내셔널리그 챔피온쉽 3차전에서 호투한 것을 눈여겨 봤었고, 피츠버그가 방출하자 "아직 어린 투수를 왜 방출하는거지?" 라며 이해 하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보스턴에서 웨이크필드를 영입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자 "두 번 생각할것도 없으니 꼭 잡으라!" 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후계자를 알아본 레전드그래서 보스턴이 그를 잡았고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역시 출처는 다큐멘터리 '너클볼!' - ↑ 보스턴에서 웨이크 필드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과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고 싶은데 지금 우리 스프링 캠프가 있는 포트 마이어스에서 니크로 형제가 여자 야구팀을 가르치고 있어요. 우린 당신이 그들과 연습을 좀 했으면 하는데 (정확히는 그들에게 좀 배워보자는 뜻)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라며 오라고 하며 계약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내용 역시 출처는 다큐멘터리 '너클볼!'
- ↑ 짬밥 뿐 아니라 스탯상으로도 삭스에서만 184승으로 192승의 로저 클레멘스와 사이 영에 이어 3위다.
- ↑ 구단이 원하는 한 영원히(…) 웨이크필드와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옵션을 보유했었다. 지금은 다시 일반 계약으로 복귀. 2011년까지 계약
- ↑ 아니, 테오 엡스타인과 레드삭스 수뇌부의 반응이 먼저 냉담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간 4m에 무제한 연장 옵션까지 달았던 것을 2010년 3.5m 2011년 1.5m으로 후려치면서 레전드에 대한 예우는커녕 피도 눈물도 없는 보사구팽의 극치를 보여준 것. 그렇게계약하고 땜빵 선발 또는 불펜으로 막 굴려먹었다. 그 때문에 함께 연봉이 후려쳐진 제이슨 배리텍과 함께 뉴욕 양키스 팬들에게 동정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 ↑ 웨이크필드가 은퇴한 2012년 제이미 모이어가 잠시 현역으로 뛰기도 했다. 최고령 타이틀은 다시 모이어가...
- ↑ 2005년 당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중 가장 느린 직구의 소유자.
- ↑ 배리텍에 따르면 너클볼 캐치는 데이비드 오티즈 같은 왼손잡이 1루수를 유격수로 놓는 것과 같다고 한다. 흠좀무.
- ↑ 대가는 조시 바드, 클라 메러디스 + 현금 10만 불
- ↑ 말 그대로 미국의 남서쪽 끝에서 북동쪽 끝까지
- ↑ 여담으로 당시 이 영입 때문에 최희섭이 미라벨리에게 28번을 도로 빼앗기고 로스터에서 제외되었다.
- ↑ 믿었던 3선발은 평균자책점 6점대, 1억불짜리 괴물은 토미 존 서저리로 시즌아웃, 삭스빠들의 총애를 받는 영건은 척추 피로골절로 재활, 거기에 부동의 원투펀치마저 8월 하순에 부상 휴업...
- ↑ 8월 이후 엄청난 속도로 DTD를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