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최초의 세계적인 수비수
이름 | 도밍구스 안토니우 다 기아 (Domingos Antônio da Guia) |
생년월일 | 1912년 11월 19일 |
사망년월일 | 2000년 5월 18일 |
국적 | 브라질 |
출신지 | 히우 지 자네이루 |
포지션 | 풀백 |
신체조건 | 182cm / 81kg |
등번호 | -[1] |
소속팀 | 방구 AC(1929~1932) 클럽 나시오날(1932~1933) CR 바스쿠 다 가마(1934) 보카 주니어스(1935~1937) CR 플라멩구(1937~1943) SC 코린치안스(1943~1947) 방구 AC(1947~1948) |
국가대표 | 30경기 / 0골(1931~1946) |
1 선수 시절
도밍구스 다 기아의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은 핏줄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형제들 중 3명이 축구 선수로서 활동을 하였다.[2] 하지만 그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는 단연 도밍구스였다. 1929년 17세의 나이로 고향팀 방구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 그는 지역 공중 보건소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 축구 선수들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밍구스의 재능은 빛이 나서 데뷔한 지 2년만에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고 이듬해에는 우루과이 리그의 클럽 나시오날로 팀을 옮겼다. 호세 나사치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그는 1933년에 우루과이 리그의 우승을 이끌어냈고 그의 플레이에 감탄한 우루과이의 팬들은 그에게 divine master(신성한 마스터)라는 별명을 선물해주었다. 1934년에 브라질의 CR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하여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다시 이듬해에는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우승을 차지하여 3개 국가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진귀한 기록을 완성해냈다. 본격 축구로 남미 투어 다닐 기세
1937년에는 브라질의 CR 플라멩구로 다시 돌아왔고 그는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도밍구스는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지만 팀은 항상 똥줄 타는 승리를 챙겼다. 4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패배하여 결승에는 가지 못했지만 도밍구스는 월드컵 베스트 11 수비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편파판정이 자신들의 월드컵을 망쳤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자신의 파울로 인해 만들어진 주세페 메아차의 페널티 킥으로 인해 팀이 패배했고 그 장면에서 심판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눈치를 보느라 파울을 불었다고 강하게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의 있음!
월드컵에서 돌아온 도밍구스는 더욱 완숙한 플레이를 펼쳤고 호세 나사치 이후로 남미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 이후 도밍구스는 코파 아메리카에 브라질 대표로 출전하였고 비록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1945년 대회에서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1948년 36세의 나이로 은퇴한 도밍구스는 이후 축구에서 손을 떼고 세금 행정쪽의 업무를 보기도 하였으며 그의 아들 아데미르[3]는 파우메이라스에서 900경기나 출전하는 레전드가 되었다. 2000년 도밍구스는 87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레전드 선수들 중 특히 유명한 공격수들이 많은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나온 수비수. 그가 특히 유명했던 것은 수비 기술뿐만 아니라 발재간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 빠른 몸놀림을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 좋은 발재간을 이용하여 단순히 볼을 걷어내는 것보다는 더 안정적인 볼 처리를 선보였던 수비수였다. 그로 인해 divine master라는 별명이 생겼다.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와 더불어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명예 멤버이기도 하다.
3 수상
3.1 클럽
우루과이 리그 우승 1회: 1933(이상 나시오날)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 우승 4회: 1934(이상 바스쿠 다 가마), 1939, 1942, 1943(이상 플라멩구)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 1회: 1935(이상 보카 주니어스)
3.2 개인
FIFA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8
코파 아메리카 MVP 1회: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