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메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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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초의 판타지스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클래식 시대를 제패한 전설적인 선수.

저는 펠레가 축구하는 것 역시 보았습니다만 메아차만큼 아름다운 플레이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루는 저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는데 2미터 쯤 되는 높이[1]에서 바이시클 킥 자세로 공을 받았죠. 그리고 그는 볼을 발에 붙인듯 착지했고, 놀라 자빠진 수비수를 드리블로 제낀 후 그의 특징적인 슈팅, 냉소적이고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 루이지 베로넬리(이탈리아의 미식가, 와인 평론가)[2]

이름주세페 메아차
(Giuseppe Meazza)
생년월일1910년 8월 23일
사망년월일1979년 8월 21일
국적이탈리아
출신지밀라노
포지션인사이드 포워드, 스트라이커
신체조건169cm / 73kg
등번호-[3]
소속팀인테르나치오날레(1927~1940)
AC 밀란(1940~1942)
유벤투스 FC(1942~1943)
AS 바레세(1943~1944)
아탈란타 BC(1944~1946)[4]
인테르나치오날레(1946~1947)
국가대표53경기 / 33골
감독아탈란타 BC(1945~1946)
인테르나치오날레(1946~1948)
베식타쉬 JK(1949)
프로 파르티아(1949~1951)
이탈리아(1952~1953)
인테르나치오날레(1955~1956)
인테르나치오날레(1957)

1 어린 시절

주세페 메아차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며 어린 메아차를 키웠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하는 메아차였지만 메아차가 축구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던 메아차의 어머니는 축구화를 매일 감춰버렸다. 메아차는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 맨발로 축구하는게 일이었다고..

처음 메아차가 동경하던 클럽은 AC 밀란이었다. 그리고 13살 되던 해 메아차는 AC 밀란에서 뛰고 싶다고 찾아갔지만 AC 밀란은 제발로 찾아온 메아차를 말랐다는 이유로 내쳤다. AC 밀란 역사상 최악의 뻘짓. 만약 처음에 AC 밀란측에서 데려갔으면 AC 밀란 측에서 경기장 이름을 주세페 메아차로 헌정했을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맨발로 볼을 다루던 그를 주목하던 클럽이 처음 나타났으니 그 클럽이 바로 인테르나치오날레였다. 길거리에서 맨발로 공을 다루던 그의 기술에 꽂힌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스카우터는 구단에 그를 영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구단 측에서 그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렇게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속의 선수가 되었다.

2 초기 선수 생활

메아차는 곧바로 재능을 보였고 17살에 처음으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1군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그를 팀에서는 썩 내켜하지 않았었고, 이 때 그의 별명인 발릴라[5]가 붙었다. 이 별명을 붙인 사람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선배였던 레오폴도 콘티.[6] 콘티는 어린 메아차가 마음에 안들었고 '이제 우리팀이 유치원이 되는군'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에서 파시스트 선전용으로 밀어주던 발릴라란 오페라가 있었는데 그것은 8살에서 14살의 소년들이 공연하던 것이었던터라 콘티는 그것을 이용해서 비아냥거렸고, 그의 별명이 되었다.[7]

하지만 메아차는 데뷔 시즌에만 12골을 넣음으로서 실력으로 의문부호를 떼었고, 세리에 A의 창설 시즌인 1929년[8]에는 33경기에 출전 31골을 넣어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의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때 메아차의 나이 19살. 베네치아와의 경기에서 10대 2로 이길 때에는 6골을 집어넣기도 하였고, AS 로마와의 경기에서는 3분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활약으로 메아차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파란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전설을 써내려갔다.

1930년 2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메아차는 스위스와의 데뷔전에서 2골을 넣어버렸고, 3달 후의 헝가리 원정에서는 아예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리에 A와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메아차에게 안방에서 열린 1934년 월드컵은 그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3 1934년 월드컵

하지만 월드컵 직전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기세에 눌려 유럽 최강의 칭호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34년 2월에 토리노에서 있었던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에이스 공격수 마티아스 진델라가 빠진 오스트리아에게 4대2로 패함으로써 월드컵 우승도전에 찬물이 제대로 끼얹어진 상황이었다. 반면 이탈리아는 메아차, 콤비, 칼리가리스, 몬티, 로세타 등을 내세워 총력전을 펼쳤지만 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해결된 문제기는 하지만 인테르나치오날레유벤투스 선수들 사이의 지역감정 문제도 있었다. 처음 메아차는 자신을 은근히 깔보던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와 사이가 안좋았는데 콤비와의 내기[9]를 통해 사이를 회복시켰다. 처음에는 메아차를 무시하던 콤비도 차츰 메아차를 인정했고 이렇게 인테르나치오날레 출신의 주전 공격수와 유벤투스 출신의 주전 골키퍼의 사이가 좋아지니 팀의 지역감정 문제는 자연스럽게 완화되었다.

이탈리아는 그래서 다소 암울하게 월드컵을 준비했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만난 미국은 이탈리아가 7대1로 압살했다. 다음 상대는 스페인. 브라질을 이기고 올라온 스페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차전에서는 리카르도 사모라의 신들린 선방으로 조반니 페라리의 한 골[10]에 그쳐 1대1로 비겼고, 2차전에서야 메아차의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를 거두어 4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오스트리아. 월드컵이 열리기 3달전에 이탈리아에게 공개 망신을 주었던 그 팀이었다. 이번에는 진델라까지 참가하여 이탈리아를 확실히 보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망신 당했던 기억을 갚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결과는 이탈리아의 1대0 승리.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엔리코 구아이타의 골로 1대0 승리를 거두어 3달전의 망신을 갚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결승전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공수 밸런스가 완벽한 팀으로 콤비, 사모라 등과 함께 유럽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프란티세크 플라니츠카를 축으로 한 수비진과 올드리히 네예들리가 버티고 있는 공격진 역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경기 자체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었기 때문에[11] 이탈리아의 공격에는 다소 날카로움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결승전 후반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푸치에서 선제골을 내주자 이탈리아의 관중들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폭해지기 시작해다. 응원구호였던 '이탈리아를 위해 죽어라'는 아예 죽어라!!!로 바뀌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라이문도 오르시의 기적같은 동점골이 터져 연장전에 들어갔고 메아차의 어시스트를 받은 스키아비오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전경기에 걸쳐 뛰어난 활약을 보인 메아차는 골든볼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계속된 국가대표팀에서의 득점 행진으로 메아차는 국가대표팀에 데뷔한지 4년만인 1934년 12월. 25골로 아돌포 발론치에리의 종전 기록을 돌파하였다.

4 1938년 월드컵

1931년 이후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주장이 된 메아차는 1938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역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단 한마디를 남겼다. 우승이 아니면 죽음을!!

4강전에서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붙었고 브라질의 수비수 도밍구스 다 기아의 파울로 페널티 킥을 얻은 이탈리아. 키커로는 메아차가 나섰다. 하지만 페널티킥을 차려고 달려오는 순간 메아차의 바지 고무줄이 끊어져 버렸고 메아차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왼쪽으로 슈팅을 날렸다. 그리고 그 공은 마치 파넨카 킥처럼 천천히 날아갔고, 브라질 골키퍼 바우테르는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12]

결승전에서 피올라 등 신진 선수들의 활약으로 이탈리아는 월드컵 2연패라는 대기록을 수립했고 메아차는 월드컵 2연패를 이룬 4명의 선수[13] 중 한 명이 되었다.

5 이후

메아차는 1938년 월드컵 이후 입은 부상 때문에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40년 11월 28일, AC 밀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AC 밀란 소속으로 뛰던 첫 밀란 더비 당시 메아차는 라커룸에서 울었다고.. 그리고 인테르나치오날레와 AC 밀란의 앙금을 희석시키려 노력한 거의 유일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2년간의 평범한 활약 끝에 유벤투스 FC로 이적한[14] 그는 이후 바레세, 아탈란타 등을 떠돌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플레잉 코치로 은퇴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에 17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는데 이 두 골이 아니었으면 인테르나치오날레는 강등당했을 것이다.[15]

6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1979년 메아차가 사망하고 1980년에 인테르나치오날레 측은 그의 이름을 자신의 홈구장에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메아차가 AC 밀란에서 뛰긴 했지만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남긴 족적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크다보니 AC 밀란 측에서는 구장이 있는 거리 이름인 산 시로를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러게 왔을 때 받지 그랬어

7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기술이 매우 빼어난 선수로 알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맨발로 축구를 연습하다보니 남들보다 순간적인 상황 판단력이 매우 빨랐다. 그가 주로 쓰던 기술이 바로 골키퍼 제끼기였으며[16] 예술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드리블해 들어와서 수비수들 벗기고 골넣는것. 터닝 능력도 매우 좋았고 양발로 뿌려주는 패스도 일품인데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탄력도 좋아서 공중볼에도 강했다고.. 도대체 못하는게 뭐냐?

사생활면에서는 대단한 골초였고, 카브리올레샴페인. 그리고 여자를 무지하게 밝혔다고 한다. 홍등가에 참 자주 들락거렸다고... 브라질의 전설적인 모 스트라이커가 생각난다

내 트릭을 이해 못하는 골키퍼들에게 페널티킥을 막히는 것이 최악의 수치이다.

- 주세페 메아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기술적인 선수들과 대등히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인.

- 잔니 브레라(이탈리아 축구 저널리스트)

그는 가끔 강렬한 성적 에너지와 지나친 게임에 대한 열정때문에 심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훌륭하고 막을 수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필드를 지배하면서 쉴새없이 입을 놀렸다.

- 페피노 프리스코(인테르나치오날레 전 부회장)

페피노는 전술에 대한것을 절대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펠레와 비견될만한 기술로 페널티 박스 안에 들어가면 왕이 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 브루노 아카리 4세(전 AC 밀란 선수, 코치)

8 여담

  • 메아차가 터키의 베식타쉬로 건너간 것은 역대 최초의 이탈리아 코치의 해외 부임이다.
  •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코치로 있을 때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7살 때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를 비행기 사고로 잃었다. 그 아이는 메아차에서 아버지의 향기를 느꼈는지 메아차의 기술에 큰 흥미를 보였고. 그것을 연습했다. 결국 메아차는 그 아이를 자신이 가르쳤고 결국 인테르나치오날레와 사인시키는데 성공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60년대 그란드 인테르의 최고 핵심 선수. 산드로 마촐라이다.[17]
  • 1973년 루이지 리바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자신의 골 기록을 돌파하자 메아차는 리바의 골 기록은 키프로스터키같은 애들 상대로 넣은 골이라며 깠다. 그리고 메아차의 골 기록인 33골은 아직도 이탈리아 대표팀 역대 2위이다.

9 수상

9.1 클럽

세리에 A 우승 3회: 1929–30, 1937–38, 1939–40(이상 인테르나치오날레)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 1939

9.2 국가대표

월드컵 우승 2회: 1934, 1938
닥터 게로 컵 우승 2회: 1927/1930, 1933/1935

9.3 개인

월드컵 골든볼 1회: 1934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4

세리에 A 득점왕 3회: 1929-30, 1935-36, 1937-38(이상 인테르나치오날레)
  1. 원문에는 2미터 쯤 뛰어올랐다고 되어있다.
  2. 출처는 이곳
  3.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4. 1945년 이후로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5. 원래는 테이블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6.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속으로 300경기나 출전한 스타 스트라이커였다. 1924년 올림픽에도 나간 경력이 있다.
  7. 하지만 또 다른 별명인 페피노도 콘티가 붙인 것이다. 즉, 메아차의 유명한 2개 별명은 둘 다 콘티가 붙여준 것.
  8. 이탈리아 정부의 정책에 의해 이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암브로시아나 인테르
  9. 자신의 기술이 통하는지의 여부로 내기를 했다.
  10. 하지만 이 골은 파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1. 구아이타가 결승골을 넣을 때 메아차가 오스트리아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공이 흘렀고 이것을 구아이타가 놓치지 않고 넣은 것이다. 메아차는 이 때 부상을 당했다.
  12. 이 페널티킥이 메아차의 마지막 A매치 득점이다
  13. 메아차 외에는 조반니 페라리, 귀도 마세티, 에랄도 몬첼리오가 있다.
  14. 세리에 A 3대 명문을 최초로 뛰어본 선수가 바로 메아차다.
  15. 순위는 10위지만 강등 턱밑인 17위와의 승점차가 4점밖에 나지 않았다.
  16. 앞에서 이야기한 잔피에로 콤비와의 내기도 이를 기초로 했다. 골키퍼가 각을 좁히기 위해서 메아차를 향해 나오면 그는 골키퍼를 피해 빈 골대로 유유히 달려가 골을 넣었다.
  17. 설명을 덧붙인다면 산드로의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토리노 FC세리에 A 역사상 최초의 4연패를 토리노에 안겨 준 전설적인 선수였다. 그러나 5연패가 유력한 시점에서 '수페르가의 비극'이라 불리는 비행기 사고로 토리노의 성인팀 선수들이 전원 사망했을 때 마촐라도 사망했다. 산드로 마촐라가 라이벌 팀잔니 리베라와 더불어 6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는데, 발렌티노가 살아있었다면 아들보다 더 위대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으리라는 평도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