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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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Leônidas da Silva)
생년월일1913년 9월 6일
사망년월일2004년 1월 24일
국적브라질
출신지히우 지 자네이루
포지션스트라이커
신체조건175cm / 74kg
등번호-[1]
소속팀상 크리스토방 FR(1929)
시리우 리바네스 AC(1929)
술 아메리카(1929~1930)
봉수시에수 FC(1931~1932)
CA 페냐롤(1933)
CR 바스쿠 다 가마(1934)
SC 브라질(1935)
보타포구 FR(1935~1936)
CR 플라멩구(1936~1941)
상파울루 FC(1942~1950)
국가대표19경기 / 21골
감독상파울루 FC(1950)
상파울루 FC(1951)
상파울루 FC(1952)
상파울루 FC(1954~1955)
1938 FIFA 월드컵 득점왕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검은 다이아몬드
고무 인간

1 클럽 커리어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 태어난 레오니다스는 플라멩구의 팬이었던 아버지 마누엘 누니스 다 시우바의 영향으로 축구에 빠져들었다. 1929년 상 크리스토방 FR[2]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팀을 거치다 잠시 우루과이의 CA 페냐롤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시작부터 경기 당 한 골을 넘는 득점력을 뽐내었고 페냐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냐롤에서도 25경기에 출전 28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지만 다음해에 브라질의 CR 바스쿠 다 가마에 돌아왔고 도밍구스 다 기아 등과 함께 바스쿠 다 가마를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 공동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리그에 참가하던 도중에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당시에는 항공 교통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라 브라질 선수들은 전부 배를 타고 갔고 보름이 걸려서 도착한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팔아가며 근근이 경비를 충당해나갔다.[3] 그렇게 출전한 월드컵의 첫 상대는 스페인. 브라질 선수들은 분전했지만 리카르도 사모라하신토 킨코세스가 버티는 수비진을 공략하지 못했고 오히려 스페인에게 3골을 허용하며 끌려다녔다. 결국 레오니다스가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데 그쳤고 스페인에게 3:1로 패배하였다.[4]
SC 브라질을 거쳐 보타포구 FR에서도 활약을 하였다가 1936년 이후에는 CR 플라멩구상파울루 FC에서 활약을 하며 저니맨생활을 청산하였다.

2 1938년 월드컵

레오니다스의 가장 커리어에서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1938년 프랑스 월드컵일 것이다. 역시 커피를 팔아 충당하는 대표팀 운영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장소만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바뀌었을 뿐 브라질의 첫 상대는 폴란드. 비가 온 드 라 메이노 구장의 상태를 보면서 레오니다스는 맨발로 시합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심판은 그 요청을 간단히 거절하였다.레오니다스는 전반 18분, 자신의 장기인 왼발 슛으로 선제골을 뽑았다. 하지만 폴란드에는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가 있었다. 3:1로 브라질의 리드 가운데 전반전을 마쳤지만 빌리모프스키의 해트트릭으로 승부는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4:4. 레오니다스는 연장전에서 더욱 분전하여 연장 전반에만 2골을 추가하여 결국 해트트릭을 완성하였다. 빌리모프스키는 연장전 종료직전에서야 다시 골을 추가하여 추격의 불씨를 살렸지만 너무 늦었다. 결국 브라질이 6:5로 승리하며 2회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음 경기는 보르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일전. 경기 전 개최국 프랑스의 경기 다음으로 주목을 받았던 경기였지만 경기 내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무려 3명이 퇴장을 당하는 난투극이 펼쳐진 것이다. 레오니다스는 이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였지만 전반 끝날 무렵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비수와 충돌하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비록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여 재경기에 돌입하였고 2차전에서는 브라질에서는 9명, 체코슬로바키아도 6명의 선수를 바꾸고 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주장 완장도 레오니다스가 차고 경기에 임했다. 이 경기에서 레오니다스는 후반 12분, 동점골을 넣음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알렸고 브라질은 결국 호베르투의 헤딩 결승골로 난적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브라질은 역사상 첫 월드컵 4강에 진출하였다.
월드컵 4강전의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브라질 선수들은 재경기까지 치르며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투혼을 발휘했지만 이탈리아의 철벽 방어를 뚫지 못했고 결국 2:1로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레오니다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브라질의 감독이었던 아데마르 피멘타가 레오니다스의 체력을 배려한답시고 이탈리아전의 출전 명단에서 그를 제외시켰고 다른 공격수들의 슈팅은 번번이 이탈리아의 골키퍼 올리비에리에게 걸리며 결국 탈락하고 만 것이었다.[5]
이렇게 탈락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난 브라질은 스웨덴을 만났고 스웨덴에게 2골을 먼저 얻어맞았지만 레오니다스의 2골을 발판 삼아 4:2의 승리를 만들어냈다.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브라질은 비록 3위에 그쳤지만 레오니다스의 플레이는 축구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했고 우승팀이 아닌 선수로서 최초로 골든볼을 받은 선수가 되었다. 또한 월드컵 역사에서 골든볼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한 최초의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런 큰 활약을 펼쳐 다음 월드컵이 더욱 기대되는 선수였지만 아쉽게도 다음 2번의 월드컵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3 은퇴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상파울루에서 감독을 잠시 맡기도 했지만 그리 신통치는 않았고[6] 그 이후에는 라디오와 TV 등에서 해설을 맡으며 인지도를 쌓았다. 하지만 1974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면서 차츰 해설직에서도 멀어져 갔고 30년 간 각종 노인성 질병 등과의 사투를 벌이며 살아왔다. 2004년에 90세로 사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정교하고 강한 왼발 슈팅과 위치 선정 능력을 동시에 갖춘 무서운 공격수였다. 하지만 그를 상징하는 가장 큰 무기는 그의 탄력인데 이런 그의 모습을 빗대어 사람들은 검은 다이아몬드, 고무 인간 등의 별명을 붙이며 그의 실력을 인정하였다.
그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의 뒤를 이은 브라질 최고의 흑인 스타 운동선수였고, 바로 뒤의 지지뉴아데미르는 물론 펠레가린샤, 지지 등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우상이었다.

4.1 바이시클 킥

바이시클 킥. 다른 이름으로는 시저스 킥, 오버헤드 킥.자세가 어렵고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자세로 골을 넣으면 팬들은 보통 골보다 훨씬 더 큰 환호를 보낸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축구황제 펠레의 바이시클 킥을 보면서 그가 바이시클 킥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펠레는 이 이야기에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기술을 발명한 레오니다스라는 대선수가 있었다며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레오니다스는 이 기술을 1932년 자신이 국가대표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에 처음 사용했고 그 기술의 독창성에 대해서는 스스로 발명하였다 또는 친구인 페르토니뉴 데 브리투에게 배웠다는 설로 나뉘고 있다. 그 밖에도 칠레, 페루, 이탈리아 등에서 자신들이 바이시클 킥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바이시클 킥을 이용해 최초로 유명세를 탄 선수가 레오니다스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로 미루어 그의 탄력이 정말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밍구스 다 기아와 더불어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명예 멤버이기도 하다.

5 수상

5.1 클럽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 우승 3회: 1934(이상 바스쿠 다 가마), 1935(이상 보타포구), 1939(이상 플라멩구)
상파울루 주 리그 우승 5회: 1943, 1945, 1946, 1948, 1949(이상 상파울루)

5.2 국가대표

월드컵 3위 1회: 1938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회: 1946

5.3 개인

월드컵 골든볼: 1938
월드컵 골든슈: 1938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8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 득점왕 1회: 1940(이상 플라멩구)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명예 멤버 헌액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현대의 축구팬들에겐 페노메누 호나우두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팀으로 알려져 있다
  3. 30년대를 덮친 경제 대공황 때문에 브라질도 경제가 많이 어려웠고 그렇게 선수들은 대표팀을 꾸려나갔다.
  4.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포함한 은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였다
  5. 게다가 당시는 선수 교체라는게 없었으니 한 번 명단에 빠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6. 하필 상파울루가 레오니다스가 감독직을 잠시 내려놓은 1953년에만 우승을 차지해서 더 레오니다스 개인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이사이에 감독들이 잘려나가도 항상 돌아오던 감독은 레오니다스였으니 감독으로서 실력이 아주 없다고 폄하하기에는 억울하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