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나리

에도 막부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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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 とくがわ いえなり)
생몰년1773년 11월 18일 ~ 1841년 3월 22일(68세)
재위기간쇼군
(51년)
음력1786년 3월 6일 ~ 1837년 4월 2일
양력1786년 4월 23일 ~ 1837년 5월 6일
태정대신1827년 ~ 1841년(14년)
오고쇼1837년 ~ 1841년(4년)

일본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재임 기간이 51년이나 되는, 일본 사상 최장기간 집권한 쇼군으로, 그 엄청난 집권기간 동안의 치적보다는 일본사에서 알아주는 물개 쇼군으로 더 유명하다. 40명의 후궁을 두고 이중 16명으로부터 아들 28명, 딸 27명 등 총 5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813년에는 이 한 해에만 4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에나리는 자식들을 다이묘 가문에 양자로 입적시키거나 혼인시켰는데, 이런 관계가 무려 36건에 달해 에도 시대 최다 타이틀을 획득했다. 현재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상징인 아카몬(赤門)도 이에나리의 딸이 마에다 가문에 출가(出嫁)하면서 기념으로 신축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집정 초기에는 나이가 어려 중신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섭정하며 선정을 폈지만, 그의 칸세이 년간(1789~1800)의 개혁(칸세이의 개혁 寛政の改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에나리가 친정을 펴게 되자 방만한 통치를 이어나가 세기 전환기(18세기 -> 19세기)의 에도 막부에 그다지 좋은 영향은 남기지 못했다.

1804년부터 1829년까지의 사반세기를 분카분세이기(文化文政期, 문화문정기)[1]라고 하는데, 18세기와 달리 자연재해도 잠시 줄어들고 정치도 안정되어 일본의 서민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로 꼽힌다. 장수한 군주와 나아지는게 많지 않지만 풍성한 문화라는 측면에서 왠지 조선의 영조 필이 나기도 한다. 정력은 빼놓고

1799년부터 몇 년간 사다노부 섭정시절 바쿠후 관리와 다테 가문을 비롯한 몇몇 다이묘에게 지시하여 사할린 남부지역과 쿠릴 4도를 탐험케 하여 땅을 얻어낸다.[2]

문제는 그의 말년이 바로 에도 시대 몰락의 상징인 텐포(天保, 천보-하늘의 보살핌, 1829~1843)년간이었다는 것. 일찌기 12세기부터 "일대인지십 一大人只十"으로 파자해 "따르는 사람이 고작 열명뿐"이라는 흉한 연호라고 피했던거였다.. 안습. [3]

방만하기 짝이 없는 통치를 50년이 넘게 한 뒤 이젠 물렸는지 1837년 물러나 오고쇼大御所(상왕 격)가 되었다. 차남 이에요시(家慶)가 계승하여 12대 쇼군에 취임(재임 1837~1853)했지만, 부친인 이에나리가 사망한 1841년까지 4년 동안은 사실상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였던 듯하다. 이후에도 별다른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고 여기에 무능력자가 다음 쇼군이 되기까지 했으니, 이는 에도 막부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나리 역시 긴 재임기간에 점차 잊혀졌는지 그가 숨을 거두었을때는 누구 하나 알아챈 사람이 없어 주치의인 요시다 세이보우치가 그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면 쇼군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실제로는 막부 내 실력자들이 통치를 하는 상황이라서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이에나리의 재임기는 조선정조, 순조, 헌종 재위기와 일치한다.

그의 재임 때인 1811년(순조 11년) 마지막 조선 통신사쓰시마까지만 온 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일 간의 공식 국교는 사실상 끊어졌다. 사실 마츠다이라 섭정기인 정조년간에 이미 통신사를 요청했으나, 에도(江戸、えど)가 아닌 쓰시마(対馬、つしま) 까지로만 통신사를 요청했다. 원인은 경비 절감.. 그만큼 일본에게 조선 필요성이 떨어진 탓도 있었다. 결국 순조때 어찌어찌 보내긴 했지만, 그게 마지막 통신사.
  1. 연호를 딴 것이다. 분카(1804~1818)는 39년을 제위한 고가쿠 덴노(1780~1817)의 후반기 연호이고, 분세이(1818~1829)는 닌코 덴노(1817~1846)의 전반기 연호이다.
  2. 몰론 그에 따른 포상도 지급했다고 한다. 바쿠후가 망한 뒤 쿠릴 열도 둘러싼 러일대립이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었다.
  3. 여담으로 중국 북제 문선제와 그 괴뢰정권인 양(육조)의 후신 후량 명제의 연호이기도 하다. 두 나라 모두 오래가지 못했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