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사다

에도 막부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12대 도쿠가와 이에요시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14대 도쿠가와 이에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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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 とくがわ いえさだ)
생몰년도1824년 5월 6일 ~ 1858년 8월 14일(34세)
재위년도1853년 ~ 1858년(5년)

1 개요

일본의 정치가. 에도 막부의 제13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2 생애

1824년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이에요시는 정실과 측실 사이에서 14남 13녀의 후사를 두었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성장한 자식은 이에사다 뿐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영아사망률이 높은 시대였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고 눈 주위에 흉터가 남아서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이에요시는 이에사다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정하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베 마사히로 등의 가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탓에 결국 이에사다를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1853년 미국 제독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함대의 개항요구 소동(쿠로후네 사건)이 있던 차에 이에요시가 사망하고 이에사다가 쇼군직을 이어받았다.

쇼군이 교체되는 혼란기여서 막부에서는 페리 제독에게 "1년 후에 다시 보자"라고 하고 일단 돌려보냈다. 그러나 1년 뒤에 페리 제독이 다시 7척의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결국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노중수좌였던 아베 마사히로가 주관했으며 이에사다는 쇼군 취임 이후로 안 좋던 건강이 더 악화되어서 뭘 해볼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1857년에 아베 마사히로가 죽은 뒤로는 홋다 마사요시가 정치를 주도했다. 그래도 쇼군이라고 서력 1857년 12월 7일에 에도 성에서 미국총영사 타운젠트 해리스를 접견하기도 했다.

병약했던 탓에 3명의 정실부인와 1명의 측실 사이에서 후사가 없었다. 이에사다가 이 모양이다 보니, 쇼군직에 취임하자마자 차기 쇼군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이이 나오스케를 필두로 하는 이에사다의 친모인 오오쿠와 난키파 (南紀派)는 기슈의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민 반면에 이에사다의 세번째 정실 아츠히메의 양부 사츠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미토 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요시노부의 친부) 히토츠바시파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밀었다.


이이 나오스케가 오오쿠의 지지를 받고 대로(大老)로 임명되고, 권력은 나오스케가 쥐었다. 결국 오오쿠와 나오스케의 의향대로, 이에사다는 1858년 6월 25일에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망 전날에는 요시노부를 지지한 히토츠바시파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858년 7월 6일 사망했다. 이에사다의 지정에 의해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이름을 바꾸고 14대 쇼군이 되었다.

미국이 함대를 이끌고 개항 협박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로 갈 조짐이 일던 시점이라 매우 중대한 시점이었음에도 병약한 이에사다가 한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

그나마 몸이 좀 움직일만 한 날이면 '볶은 콩'이나 '고구마케잌(やふかし芋)' 같은 과자를 만들어 가신들에게 주곤 했다고 한다. 에치젠의 영주였던 마츠다이라 요시나가 같은 사람은 고구마 쇼군이라고 부르며 평범한 사람중에서도 최하등이라고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부의 신료였던 아사히나 마사히로는 메이지 시대에 "이에사다를 회고하면서 에치젠이나 사츠마(시마즈 나리아키라[1])와 비교하면 그렇지만, 300명 다이묘 중에 이에사다보다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라고 감싸주기도 했다.

뇌성마비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는데 그 근거는 이에사다를 접견했던 미국총영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회고하기를, 해리스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먼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로 바닥을 치곤 했는데 이는 뇌성마비의 전형적인 증세라는 것. 이것이 일종의 신호로 해리스에게 답변할 말을 지정받기 위한 사인이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나 신호를 줄 것 같으면 회담 도중에 이마를 만진다든지 등등 별내색 안 하고 보낼 수 있는 방법도 많은데, 굳이 이런 무식한(!?)방법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뇌성마비 주장이 일리가 있다. 천연두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연두의 후유증은 뇌손상이다.

죽음에 관해서 요시노부를 지지한 히토츠바시파에 대한 처분을 발표하겠다고 한 다음날에 사망했기 때문에 당시 히토츠바시파가 쇼군의 주치의를 매수해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워낙 병약했던 쇼군인 탓에 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된 결론이다. 사인은 지병인 각기병이 악화되었거나, 당시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렸을 것으로 분석.

세번째 정실인 아츠히메[2]가 NHK 사극에서 다뤄지는 덕분에 의외로 미화되기도 했다. 아내는 잘두고 볼일?

3 창작물 속 도쿠가와 이에사다

  1. 텐쇼인의 양아버지
  2. 첫번째, 두번째 정실은 병약해서 일찍 죽었다. 이에사다 사후에 오오쿠의 역대 정실, 측실처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텐쇼인이라는 법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