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펭귄드럼/떡밥 및 의견

1 떡밥

9화에서 히마리가 도서관에서 찾던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는 실제로 존재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9화에서 보여준 브로일러처럼 다닥다닥 모여있는 어린아이들도 떡밥 중 하나.

작중 반복해서 나타나는 95란 숫자를 년도라고 가정한다면 (추정)1995년이 되는데, 이는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오옴진리교 사린가스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이 사건은 마루노우치선 15번째 역에서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14화나 15화쯤에서 시청자들을 경악에 빠뜨릴 전개가 예상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또한 위의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도 작중 배경이 1995년 2월이다. 칸바와 쇼마, 그리고 링고가 태어난 해도 1995년이 된다.

12화에서의 급진전으로 인해 핑드럼은 인연의 끈과 관련이 있다는 설.

18화 타부키의 회상 중에 투명한 존재가 언급된다.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행 성명문이 떠오르는 대목. 또한 2번째 PV에서도 쇼마의 목소리로 투명한 존재가 언급된다. 그리고 이 투명한 존재에 대해서는 동일 감독의 후속작인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도 '투명한 폭풍'이라는 이름으로 유사하게 등장한다.

작중 시점은 2011년 10월 중순부터 시작한다. 1화에 나오는 수업 장면에선 10월 15일이 토요일이라고 나오는데, 10월 15일이 토요일인 해는 2009년 이후 근래에는 2011년 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1화에서 쇼마가 유기농 양배추를 살때 평성 23년이란 문구가 나온다.

타카쿠라 히마리가 과거 트리플 H란 이름으로 아이돌 대회 신청을 하고 학교를 마지막으로 간 해는 2007년이다. 신청서를 쓸 때 평성 19년이란 문구가 나왔고, 그 2년 후라고 나온 과거 회상 장면 중 "아날로그 방송 종료 앞으로 2년"이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일본에서 아날로그 공중파 방송이 종료된 건 2011년이다.

1.1 이하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떡밥들

  • 벌로 추정되는 사과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만 이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사람과 사람으로서 지게 되는 연대책임이라는 해설이 가장 그럴싸하다.)
  • KIGA가 타파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하철 테러 딱 한건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그냥 좌파계열 운동이라기보단, 이면에 다른 목적을 둔 듯한 액션을 자주 취한다.)
  • 어린이 브로일러를 현실에 대응 시킨다면 무엇에 대응시켜야 하는가?
  • 양과 관련된 동화 : 사과나무, 신전의 재, 검은 토끼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도서관은 대체 어떤 곳인가?
  • 타카쿠라 형제는 어째서 갇혀 있었는가?
  • 펭귄 삼남매는 무엇인가? (일단 펭귄들이 각 남매의 심리를 대변하고, 주인 개개인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등장 동기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떡밥인 일기장은 무엇인가? 또 어째서 타부키 케이주와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가?
  • 핑그룹은 그냥 세계관 내 기업일 뿐인가? KIGA/핑포스와는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2 평가

2.1 비판

위처럼 핵심적인 떡밥 중에 해명되지 않고 넘어간 게 너무 많았고, 도서관, 어린이 브레일러처럼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배경이었던 장소도 일언반구 없이 슥슥 넘어간다. 도서관 같은 경우 펭귄이나 사과가 보내진 장소일 터인데, 설명은 불충분했다.

이렇듯 설명되지 않고 넘어간 요소가 너무 많으며 그것 때문에 세계관의 이해나 떡밥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며 감상해온 시청자들은 모두 데꿀멍. 동화 같은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펭귄, 사과, 운명일기, 투명한 존재, 여신님 이렇게 다양한 떡밥을 끌어와 그냥 묻어버리면 동화 서너권을 가져와 뒤섞은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판하는 입장에서의 평가로 보면 플롯을 짜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를 무시했으며, 소재를 잘 살리지도 못했고, 급박한 전개, 완급조절 실패, 인물들의 가치관 및 동기 부여등등의 사소한 부분에서도 삐걱댔다. 인물이 정말 살아있도록 만들지 못했으며, 아침드라마의 느낌이 나는 씁쓸한 멜로물, 혹은 가족애가 느껴지는 최루계열 작품으로의 노선도 실패했다는 평가다. 상품을 팔기 위해서인지 전면에는, 스토리상 아무런 연관이 없는 펭귄 캐릭터를 등장시켜서,[1] 시청자의 몰입을 깨버리고 시선을 분산시켰다는 평(이는, 진지해야 할 장면이나 대놓고 감동을 노리는 장면등에서 펭귄 캐릭터들이 맥락에 맞지 않는 돌발행동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이 대다수이며, 각 등장인물들의 행동양식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판타지적, 동화적 요소를 보기 좋게 다듬어내지도 못했고, 결국 사네토시와 쇼우마의 친부모의 동기는 맹목적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따지고보면, 초장부터 종장까지 병에 걸린 히마리를 살리느니 마느니, 주문이 어떻느니 하면서 단조로운 구성에 지나치게 끌었다는 평가도 어느 정도는 맞는 편이다. 떡밥이, 링고의 스토킹에서 히마리의 치료를 위한 형제의 눈물나는 노력으로 옮겨가고, 거기서 의외의 가정사까지 드러난다. 무게중심이 고르지 못해서, 한 형식의 플롯에 마음을 두고 볼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상당한 문제다.

후반부에 벌려놓은 떡밥을 회수하지 못하고, 시나리오 라이터가 허덕대며 대사를 고른 듯한(다른 말로는 '작위적'인.) 느낌과, 마지막에 가서 연이어 추가되는 타카쿠라가의 설정들은 보는 시청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를테면, 뒤의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거기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식의 전개라, 이는 플롯 짜는 법의 개론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이고, 시나리오 라이터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호흡이 너무 거칠었다. 혹은, 24화의 화수가 부담 되었을 수도. 차라리 초중장 부분의 지나치게 전위적인 연출 요소분량을 조금씩만 줄이고, 튀지 않게 했어도 분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주제부터 연출까지, 지나치게 전위적이었다는 평가가 커뮤니티 코어 덕후들에 의해 제기 되고 있다. 후술하는, 이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서도 언급되는 바이지만, 이 작품은 동화적 분위기와 은유, 상징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한 작품이다. 중구 난방으로.

요약하자면, 지나치게 단조로우며, 대사는 시청자에게 가족애를 느껴달라고 강요라도 하는 듯이 오글거리고 작위적이었으며, 설정 및 캐릭터도 완성 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완결 내버렸으며,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연관관계 및 논리의 기초가 부실한 작품. 시나리오 작가의 언급처럼, 아침 드라마 같으나 씁쓸한 작품이었다. 동화로서 보기로도 껄끄러웠단 평가가 비판 여론도 있다.

또한 초반부를 너무 질질 끌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확실히 10화 이전까지는 핑드럼 이야기보다는 그저 링고의 스토킹 이야기다. 이 때문에 1화에서 3화정도까진 재밌게 봤지만 4화부터 반복되는 링고의 이야기 때문에 초반부에 많은 팬들이 떨어져 나가, 결국 후반부에서는 초반의 입소문이 매우 많이 줄어들어 버렸다. 2쿨로 나눈 건 좋은 선택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10화까지 너무 질질 끌었단 의견들이 보편적이며, 이것이 이 작품이 크게 흥행하지 못하게 된 요인중 하나.

반대로, 감동을 추구한 동화적인 면과 전위적 연출에 박수치는 시청자도 있는 편.
애초에 애니메이션을 주로 감상하는 사람들은 플롯이니, 이야기 전개느니 하는 것보단 연출에 신경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 펭귄드럼은 변신씬도 상당히 파격적이고 군데군데 영화를 찍는 듯한 카메라 앵글 셋팅으로 묘한 '공기'가 작중에 흐르도록 만들었단 평이 이 작품을 긍정하는 쪽의 평가이다. 애초에 노리고 나온 판타지, 동화적 작품이니만큼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자는 입장이다.

그리고 1쿨의 링고의 이야기는 정상적이었던 가족을 원래대로 돌리고 싶어하는 링고의 이야기로써 2쿨의 남남이었던 사람들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으려고 하는 삼남매의 이야기와 대비된다고 보면 그렇게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극 중 사과를 건네주고 받은 사람들이 하나도 맺어지지 않고 운명이 적혀진 일기장이 나중에 가선 파괴되는 걸로 보아 사람은 희생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것도 같은데, 이렇게 보면 결국 일기장에 적혀진 운명을 거부하고 제정신을 찾은 링고나 자기희생으로 죽을 운명이었던 히마리를 살린 두 형제의 이야기는 작품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냥 링고 묘사가 좀 무섭고 많아서 그렇지(...).

추가로 은유적인 요소에 자세한 해석 및 현실과의 대응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첫단추를 잘못 매는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확실히 시청자의 해석의 폭을 넓히고 은유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많다. 모자-일기-사과 만으로도 포화상태인 작품에 어린이 브레일러, 동화, 사네토시, 도서관 등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잔뜩이다. 은유적인 소재도 이야기를 토대로 해석해나가는 것인데, 이미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이 바닥인 상황에서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이러한 여론에 대한 답변인지, 돌아가는 펭귄드럼 제작진측에서 공식적으로 가이드북을 낸다고 발표했다. 2012년 3월 28일 공식가이드북이 발매되었다. 이 가이드북의 내용에 대해 추가바람

2.2 반론

기본적으로 비판 항목은 작품의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펭귄드럼에 떡밥이라고 불리는 것, 즉 이야기 전개를 위한 복선은 많지 않다. 비판이 그런 요소들을 떡밥이라고 보는 것은 애초에 첫걸음을 잘못 내딛은 것이다. 펭귄드럼 내의 설명이 안되는 요소들은 떡밥이 아니라 상징 또는 은유가 대부분이며 이는 딱 맞아떨어지는 설명이 도리어 있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풍부한 해석을 의도한 작품 내 상징들을 떡밥으로 파악하고 단선적인 설명이 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하면 작품의 성격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이 브로일러를 현실에 어떤 하나에 대응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어린이 브로일러는 작품 내내 이것이 현실의 어떤 것을 일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몽상적 연출과 투명하게 된다는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어린이 브로일러를 어린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린이 브로일러가 실존하는 어떤 시설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려는 것은 무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관심을 박탈당한 어린이의 심성 또는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 내 장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과 일대일 대응하려는 것은 잘못된 감상 방식이다.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표현 방식이 분명하게 일정한 노선을 걸을 경우 그 노선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감상은 무지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케이온을 감상하는 사람이 액션도 없고 치정극도 없는 심심한 애니라며 비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대적인 서사작품에는 이렇게 일대일 대응의 설명을 거부하는 상징적 장치들이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감상자는 자신의 작품 감상 범위를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프란츠 카프카나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에 나오는 상징들이 구체적인 현실과 대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작품이 엉성하다고 할 것인가? 그런 작품들의 숨은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는 평론들이 수없이 출판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 작품이 엉성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해석의 가능성이 풍부한 훌륭한 작품이기 때문인 것이다.

2.3 결론

현대미술 정확히는 개념미술
마사토끼의 펭귄드럼 감상만화
정리하자면 "내용은 뭔지 모르겠지만,감동적이었던것 같아." 로 요약할 수 있다.

대체로 작품의 구성, 화수 배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옹호측과 반대측 모두 동의하는 점으로, 템포가 전반부는 과도하게 늘어지고, 반대로 후반부는 약간 빠른 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덕택에 전반에 결과적으로 의미 없던 떡밥이 과하게 뿌려지고, 이것이 크게 중요치 않은 전개로 인해 과도한 기대감을 낳았으며, 그 결말에서 충실히 응답하지 못하여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다만 상기 제시된 "풀리지 않은 떡밥"이 모두 "풀려야 했던 것"인지는 견해가 대립되며, 이것에 대해 응답을 요구하는 측과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측이 비판과 옹호를 가르는 축이자 감상법의 차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와타세 사네토시타카쿠라 부부의 과거 관계 같은 경우 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아니지만(사네토시는 모모카에 대비되는 파괴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상징적 행위자일 뿐 그 이상이 아니다), 스토리의 개연성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이를 요구하는 식이다.

결론적으로 이는 감상법에 의한 차이로 볼 수 있으며, 스릴러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드라마였다는, 장대한 장르적 낚시가 낳은 부산물이라 하겠다.
  1. 펭귄캐릭터가 친근하게 다가오지도 못했고, 꼭 펭귄을 보러 간 것을 강조할 이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