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 사건

동백림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

1 개요

동백림 사건(東伯林[1]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공안사건이다.

2 내막

당시 중앙정보부는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음악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가 간첩으로 지목되었으며,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중정요원들이 해당 인물들을 다짜고짜 한국으로 납치하여 심문했다는 것이다. 당연 프랑스 정부나 서독정부와 외교적 갈등이 있을수 밖에 없었다. 동년 12월 3일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지만 그나마 대법원 최종심에서 다 간첩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1970년 광복절 사면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까지 사면했는데 서독 및 프랑스와의 외교마찰 해소차원에서 그랬다는 것이 중론.

당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해 국회의석을 2/3이상 끌어 올리려고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런 사회적 규탄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이런일을 벌였던 것, 결과적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애먼 사람들을 때려잡은 병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일을 주도한 서독대사 최덕신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주범이기도 한데 나중에 북한으로 튀어버린다.

3 서유럽 교민이 타겟이 된 이유

엄밀히 말하면 당시 일부 유학생들이나 재독인사들이 동독의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접촉한 사실은 분명히 있었다. 윤이상의 경우는 동베를린을 거쳐서 북한을 방문한 사실도 있다. 또한 이들에게 금품이나 향응을 베풀고 난수표를 준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원들이 난수표가 담긴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고 귀국하거나 아니면 아예 간첩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첩죄가 성립이 되지 않은것. 쉽게 말해 북한 사람들에게 신나게 얻어 먹기만 하고 실제로는 딱히 뭘 하지 않은 것이다.[2] 또한 서베를린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만난것은 단순한 접촉에 불과할 뿐 간첩을 목적으로 한 통신 및 회합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19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경에 유학을 떠난 사람들은, 국토 분단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3]이 상대적으로 약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4] 본국에 소환해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당신은 왜 동백림을 통해서 북한에 방문했는가"라고 묻자 "어? 다녀오면 안돼요?"라고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얼마 안 가 통일 되겠거니 내지는 원래 한 나라인데 좀 다녀오는게 뭐가 대수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없이 다녀온 것.

4 사건경과

4.1 혐의자 명단

임석진(명지대조교수 · 철학박사)
정하용(경희대조교수 · 철학박사)
조영수(전동국대학 및 외대 강사)
천병희(서울대사대전임강사 · 독문학석사)
황성모(서울대문리대부교수 · 철학박사)
최창진(전북대문리대조교수)
강빈구(서울대상대조교수 · 법학박사)
김중환(서울대의대조교수 · 한일병원피부과과장)
강하이드른(서강대전임강사)
김종대(프랑크푸르트대강사)
정규명(프랑크푸르트대이론물리과재학)
강성종(미국노트르담대회학연구소원 · 이박)
주석균(농업문제연구소장)
장덕상(중앙일보파리특파원)
이응노(재불화가)
윤이상(재서독음악가 · 전서독한인회장)
박민종(재서독음악가 · 전서독한인회장)
박민종(재서독음악가)
이희세(재불화가)
공광덕(오 살스부르크 대학생)
노봉유(재불유학생)
조상권(재불유학생회장)
박협(재불변호사)
이순자(국회도서관직원 · 정화용 처)
어준(현대계장회사전무)
김광옥(동양 카프로락탐 기술과장)
정성배(정박 · 재불)
방준(재불TWA항공회사근무)
김옥희(공무원)
어원(외기노조오산지구상무)

4.2 최종심/재상고심 판결사항

사형 : 정규명, 정하룡
무기징역 : 조영수
유기징역
어준, 임석훈 : 15년
천병희, 강빈구, 윤이상, 최정길 : 10년
김중환, 정상구 등 6명 : 7년 이하
집행유예 : 7명
선고유예 : 1명

형면제 : 3명
  1. 伯林은 독일, 영국, 불란서처럼 한자음만 따서 베를린을 표기한 한자차용음이다.
  2. 위에 링크된 다큐멘터리에도 나와있듯,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던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따뜻하게 대해줬고, 뭐 밥 한끼 얻어먹는게 대수냐 싶어서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3. 북한을 일종의 적성국가로 간주하는 개념을 말한다
  4. 조봉암 참조. 멸공이 국시로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전국민이 분단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부터다. 당장 당시 휴전선이 얼마나 허술했는가만 보아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