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출생 당시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 지정환은 현재의 이름이다. 가톨릭 서품을 받은 신부다.
벨기에계 한국인으로, 법무부에서 국적 증서를 받아 법적 한국인이 된건 2016년 2월 4일의 일.
오늘날의 치즈의 고장 임실을 있게 한 인물. 또한 동시에 오늘날 한국에 치즈가 있게 한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겠다.
2 생애
193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그는 당시 한국전쟁의 여파로 아프리카보다도 가난하다는 한국에 갈 결심을 하고, 그 이듬해 부산항에 발을 딛었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된 그는 전주시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어 부안군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구제하고자 3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 땅들은 고리대와 노름을 통해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이를 보며 분통이 터진 지정환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64년 척박한 산골 동네인 임실군에 부임한 그는 다시 가난으로 불쌍한 삶을 사는 농민들을 대면하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조금만 개입할 생각으로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 그 젖으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치즈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이탈리아 견학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와서야 69년에 비로소 치즈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치즈 공장 하나 없던 시절이었기에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혀갔다. 후에 지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겼다.
지 신부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70년 대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도 항거하여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시위중에 체포되어 국외 추방의 위기까지 갔으나 치즈 산업으로 농촌 육성에 이바지하는 그의 행적에, 농촌 육성에 힘쓰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추방 명령을 거두었다. 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에 제공할 우유를 싣고 홀로 광주에 내려가기도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한 탓인지, 그는 70년대 부터 오른 다리에 다발성신경경화증을 앓게 되었다. 몸의 신경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이병으로 인해 그는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3년 간 벨기에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84년 귀국하여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설립하여 지금까지도 운영하며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3 트리비아
한국에서 50년을 넘게 생활한 덕인지 한국어를 잘한다. 그것도 전라도 사투리를. 그러면서 스스로를 시골놈으로 칭한다고.
다발성신경경화증에 걸렸지만 날마다 3천보씩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중증 장애인을 위해 본인이 건립한 무지개 가족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비장애인도 미사 내내 앉아서 있게 한다. 장애인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지금은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활동했던 신부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해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언론에서 영웅처럼 다뤄지는 게 싫어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지라, e-mail을 통해서 간신히 몇가지 문답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관련 기사는 이곳. 2012년에 이뤄진 다른 인터뷰 기사도 있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