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부니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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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Levounion(Battle of Levunium)

레부니온 전투
날짜
1091년 4월 29일
장소
현재 터키에디르네 지방 Enez 부근
이유
페체네그인들의 침공 및 민족 대이동
교전국동로마 제국
쿠만 족
페체네그 족
지휘관알렉시오스 1세불명
결과
동로마 제국의 대승
영향
페체네그 족 약체화
병력동로마 20,000 이상
쿠만족 40,000 이상
용병 ?
80,000 ?
피해규모알 수 없음전사 5만이상

1 배경

1.1 동로마 제국의 상황

총체적으로 무너져가는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1081년 4월 1일, 알렉시오스 1세가 내부갈등을 수습하고 즉위했으나, 중흥은 쉽지가 않았다. 즉위 후 첫 출정이었던 1081년 10월의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큰타격을 입은 황제는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1085년에서야 노르만인들의 침공을 정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전선을 동쪽으로 한정시킨 제국은 다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쪽의 다뉴브 강 국경에서 페체네그 족이 침공해 들어왔다.

1.2 페체네그 족의 재침공

페체네그 족의 침공은 처음이 아니었다.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를 정복하여 다뉴브 강 국경이 재확립 된 뒤 제국은 1020년대부터 페체네그 족의 약탈에 노출 되었는데, 페체네그 족은 아예 1046년부터 콘스탄티노스 9세, 이사키오스 1세, 로마노스 4세의 치세동안 제국과 전면전[1]을 벌였으며 그 때마다 제국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혀왔다.

이러한 전력에서 알 수 있듯 페체네그 족은 풍요로운 제국령을 탐내어 종종 공격해 들어왔는데, 마침 1080년대의 약체화 된 제국은 그들이 보기에도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특히, 1081년~1085년간 노르만족과 막 전쟁을 끝내 지친 제국은 더더욱 그렇게 보였기에 제국내부가 보고밀파의 반란으로 소란스러워지자 1086년부터 제국을 침공하여 제국군을 섬멸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고, 1087년에는 8만에 달하는 벙력으로 트라키아까지 침공하여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군대[2]를 격파하고 제국으로부터 공물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제국을 압도했다고 판단했는지 페체네그 족은 다뉴브 강 너머에서 불가리아와 트라키아 일대로 여자,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내려와 대이동을 시작했다. 제국이 맞서야할 적은 사실상 페체네그 국가 혹은 민족 그 자체였다.

2 준비

단독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이이제이, 즉 다른 이민족과 손을 잡아 페체네그 족을 물리치기로 하였다. 그 상대로 페체네그 족과 적대중이던 쿠만 족이 선택되었고, 쿠만 족은 기세를 타던 페체네그 족을 제압할 기회라 여기고 동맹에 응했다.

반대로 페체네그 족은 제국의 적인 투르크인과 연대했다. 해군이 없었던 페체네그 족 대신 투르크 해군이 제국의 후방을 공격하고, 이외에는 정황상 제국령 유럽영토의 상당수를 페체네그 족의 것으로 인정하는 동맹이 체결되었다.

3 전개

1090년 12월, 페체네그 족이 트라키아를 재침공하자 제국군은 이에 응전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 30여km 근방까지 밀리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덕에 방어에 문제는 없었으나 동맹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해 황제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 되었다.

1091년 4월, 즉위 10년차의 알렉시오스 1세는 최후의 수를 던졌다. 새로 병사를 모집하고, 남아있던 중앙야전군은 물론 용병과 후방 수비군까지 총동원한 군대를 편성[3]한 황제는 對 페체네그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출정했다. 황제에게는 다행히도 서둘러 진군한 쿠만 족의 4만 5천의 군세와 트라키아에서 합류할 수 있었고, 연합군은 동등 혹은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4 전투

연합군은 곧 11만을 넘는 페체네그 '국가'와 조우했다. 마리차 강을 따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며 진군하던 연합군은 오후가 되어 인근 레부니온 산으로 전장을 옮겼다. 사실상 쌍방이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결전이 예상되고 있었고, 결국 그날 밤 전투가 일어났다.

객관적인 전력이 밀렸던 것인지, 혹은 비전투원이 많았기 때문인지 곧 페체네그 족의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원한이 많았던 연합군은 멸족시킬 기세로 대학살을 벌였다. 그날밤 5~6만이 넘는 페체네그 인들이 죽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5 영향

알렉시오스 1세는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전선이 안정화 되었으며, 위협이 되던 투르크 해군의 공세도 1091년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저지하고 1092년 스미르니의 에미르 챠카가 제국측의 모략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당장의 군비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승전으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까지 확보한 황제는 내부개혁에 착수하여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아시아를 향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서유럽을 향해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는 십자군 원정이라는 눈덩이가 되어서 돌아오지만...

페체네그 족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1040년대 부터 전면전을 걸어 제국을 비틀거리게했던 이들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1121년 다시 제국을 침공했으나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에게 1122년 베로이아 전투에서 괴멸당해 죽거나 제국민으로 흡수 당해 차차 소멸에 이르게 된다.
  1. 특히 콘스탄티노스 9세 시절 제국은 노르만, 투르크와 전면전을 치르면서도 페체네그 족과는 총력전에 가까운 전쟁을 벌여 큰 피해를 입었으며, 로마노스 4세도 투르크와 대적하면서도 이들과 전쟁을 치러야했다.
  2. 적어도 2만을 넘는, 급박한 상황치고는 상당한 대군이었다.
  3. 역시 2만~5만 5천에 이르는 대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