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십자군 원정에서 넘어옴)

The Crusades

중세 교황청 주요사건
사건 카노사의 굴욕십자군 전쟁아비뇽 유수
벌어진 일파문을 통한 교황권의 강화교황권의 절정시기교황권 분열, 콘클라베 제도 정착

1 개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위시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 셀주크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혼란의 시기가 오고, 동로마 제국의 밥줄이던 아나톨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잃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한 다음 다시 제국을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노르만인, 북방의 페체네그 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투르크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1095년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에게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이 편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성지를 보호하고 탈환할 십자군을 모집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약 200년간 4차[1]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2 십자군 국가

Crusader states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 레반트 지역 : 기본적으로 1차 십자군에서 세워진 이 4개국을 십자군 국가라 부른다.
    • 에데사 백국 : 훗날 예루살렘의 첫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보두앵 1세[2]가 에데사 지역의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사의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건설되었다.
    • 트리폴리 백국 :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프랑스의 대귀족인 레몽 드 생질 백작이 건설했다.
    • 안티오키아 공국 :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인 보에몽 드 타란토 공작이 건설했다.
    • 예루살렘 왕국 : 예루살렘 함락 이후 하 로렌의 공작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성묘의 수호자 자리에 앉으면서 건설되었다.
    • 예루살렘 왕국 속령
      • 갈릴리 공국 :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불과 수십 기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을 점령하여 건설했다.
      • 자파와 아스칼론 주
      • 트란스 요르단 영지
      • 시돈 영지
    • 킬리키아 아르메이아 왕국 : 현재 터키 남부의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 인들을 중심으로 건국된 왕국이다. 안티오키아 공국 등 십자군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 키프로스 지역
    • 키프로스 왕국 : 원래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령이었으나 3차 십자군 전쟁 중에 키프로스의 지배자인 이사키우스가 사자심왕 리처드에게 겁 없이 개기다가 털린 이후로 잠시 영국령이 되었으나 리처드가 예루살렘 왕위를 빼앗긴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의 지배권을 보상으로 내주게 되면서 세워진 그리스도교 십자군 왕국이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병탄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 발칸 반도 : 4차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다.
  • 발트해 지역
  • 마샤프

3 소속된 기사단

4 왜 벌어졌나?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4.1 주동기

  • 1. '성지' 회복, 그리고 무슬림이 저지른 신성 모독을 단죄.

이슬람이 7세기에 생겨난 이후 그리스도교를 믿는 지역은 11세기까지 서아시아북아프리카를 잃는 등 그 영역이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거기에 유럽 지역은 이슬람이 발아한 7세기부터 프랑스알제리식민지배하는 19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에게 약탈을 당한 기록이 있으며, 1200년 동안 납치된 사람의 숫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문제는 이러한 해적들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어엿한 상인이면서 또한 이슬람 군주들의 해군이기도 했다는 것. 이슬람 군주들이 정권 차원에서 순례자들을 박해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이슬람의 세력권은 유목민(베르베르인 등)의 약탈이 일상화 된 지역이라 약탈당한 순례자들은 굉장히 많았으며,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천주교 순례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소문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원군을 얻기 위해 왜곡한 부분도 조금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천주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 10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돈지랄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인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적으로 보호해주었지만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투르크는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 감각이 없어서 초반에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고 이로 인해 서유럽 전체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정책적으로 순례자들이 탄압된 적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거짓된 것이라는 수정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었으나 순례자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고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모욕 당한 것도 사실이라서 수정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해석처럼 궁색한 주장은 아니었다. 사실 그 시대의 성지는 순례하기에 위험한 분쟁지역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슈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슈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슈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십자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

  • 2. 서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해결과 인구감소 효과.

당시 서유럽은 농업기술 자체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성이 형편없었으며, 지배자들은 인구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방법이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고로 전쟁을 통해 잉여인구를 처리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인데... 이에 대해서 토머스 매든 교수와 자크 르 고프 교수의 의견을 따르면, 서유럽은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수도원 운동에 힘입어 느리긴 하지만 식량 공급이 차츰 개선되고 있었으며, 전쟁 같은 대규모 학살을 통한 인구 감소 효과를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미 십자군 전쟁 이전에 서유럽은 지방 영주들의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서유럽의 인구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인구 감소는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지나친 전쟁으로 서유럽의 피해가 누적되어 이를 막기 위한 "하느님의 평화" 운동과 "하느님의 휴전"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성 그레고리오 7세는 차라리 해외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고 있었다. 이 개념을 이용하여 아예 성지를 탈환하자고 한 것이 우르바노 2세다. 하지만 인구감소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임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아래에서 서술할 돈이 덤으로 딸려왔다.

  • 3. 교황청 재산 증대.

당시 십자군 원정은 굉장히 길었으며, 어차피 돌아올 가능성도 낮을 거라고 예상한 교황과 사제들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재산을 위탁받으면 그냥 자기네 것이 될 거라고 계산했었다. 실제로 교황청이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지의 관리를 위탁받은 것은 사실이고, 당시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관리 시스템이라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들은 영주들에 비해 효과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운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황청이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하지만 다수의 빈농/농노와 소수의 영주(부자)가 있던 중세시대에 그지역 GDP를 날로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장사였다.그리고 훗날 이 장사수법을 약간 변형해서 마녀사냥을 시전했다.
그리고 영지를 "관리"만 하겠다던 이유는 그 귀족이 죽으면 그땅은 내땅!이라고 했다간 당시 봉건사회에서 왕이 영주에게 할당한 땅을 교회가 낼름 삼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한 국가의 영토가 강탈되는 건데, 그 나라에 대한 정면도전이랑 다를바가 없다) 그렇게되면 그 나라의 왕은 성지회복을 먼저할까? 바티칸을 먼저 쳐들어갈까?
오히려 국가주권을 간접적으로라도 찝쩍댈 정도로 당시 바티칸의 병크가 하늘을 찔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주가 출정하면 교회는 그 나라 왕에게 일시적 영지할양취소 혹은 그 처리를 위한 중재를 해야 되는거 아닌가?

  • 4. 교황청은 십자군을 권력 확대, 즉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동로마 제국을 누를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다.

1054년의 상호 파문으로 인한 동서 교회 대분열(정교회, 가톨릭)로 그리스도교 세계가 혼란스러웠는데 이 기회에 동방에 대한 우위를 점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 5. 2와 연관된 목적으로 호전적인 기사들과 영주들을 유럽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유럽의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서유럽 안에서의 지방 영주 간의 다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는 따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날까지 만들어서 반포할 정도였다. 오히려 실력자들의 부재로 인한 왕권찬탈 음모가 성행하였고, 각 왕조간의 대립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리처드 1세필리프 2세의 대립이다.

  • 6. 이 외에도 무장 순례 기원설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십자군 원정이 원정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성지순례를 한다는 개념인데, 카롤링거 왕조의 국왕들은 스스로 예루살렘 성지와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 왔으며, 11세기 후반까지는 이슬람 칼리프들도 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10세기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자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호위병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064~66년에는 7천 명의 독일인들이 중무장을 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였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1차 십자군 원정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 대부분의 원정군이 유럽으로 돌아가버렸다"를 꼽는다. 말 그대로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잦아서 예루살렘 왕국이나 여러 십자군 국가의 군주들은 십자군들을 성지에 말뚝 박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써댔다.

4.2 기타 동기

  • 1.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에서 주는 면벌부(대사)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성지탈환의 성전에 참여하면 교황청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면벌부를 준다고 홍보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의 경우 유달리 부랑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적으로는 교황청의 선언에 열성적으로 반응한 수도자들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은수자 피에르의 화려한 말빨에 의해서 우르바노 2세가 계획한 1차 십자군보다 몇 달 빠르게 민간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고해성사의 보속을 없애주는 '대사'를 행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이런 미친 그러니까 교황인 내가 하나님이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그깟 죄는 없애주겠다고 대대적으로 자랑하고 다닌것이다.

  • 2. 당시 유럽은 장자 상속제였으며, 차남 이하로는 권력이나 재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지를 얻기 위해 많은 기사들이 참여했다는 개독교 광신도의 개소리도 있다.

하지만 "당연히" 현대의 중세 연구 결과에서는 부정되는데, 당시 십자군에 참가했던 기사들의 목록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대개 당시에 세력깨나 있다는 영주들이었다. 당시 영주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셀주크 투르크와 싸워본 적이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은 3천 km의 원정길을 땅 좀 넓히자고 간다는 것은 설득력이 낮다. 당시 영주들은 자기 차남들에게 나눠줄 땅이 정 필요하면 그냥 옆동네의 천주교 영주들과 싸웠다.

  • 3. 성지와 성인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나는 셈.그러니까 이 혼란통에 나도 돈 벌어보겠다고 설쳐댔다는 것이다
  • 4.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오로지 주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은 물론 적인 이슬람도 칭송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교황청에 가진 돈 다 털리고 사기당한 뒤 사지로 내몰렸던 것이다.

5 본편

5.1 제0차 십자군 원정(민중 십자군)

해당 항목 참조.

5.2 제1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5.3 제2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5.4 제3차 십자군 원정

해당 항목 참조.

5.5 제4차 십자군 원정

중세 동-서유럽 관계 역사상 최악의 막장 드라마
가장 추악한 십자군[3]

가라는, 그리고 가겠다던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희대의 막장 전쟁. 전쟁 기간은 1202년부터 1204년까지 약 2년.

흔히 제4차 십자군 자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결성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베네치아 공화국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제4차 십자군의 전개는 우연에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마어마한 연쇄작용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그 연쇄작용이라는 것은 일단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게 된다.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4차 십자군을 결성한 프랑스 제후들의 군대를 중동까지 실어다 주기로 했다.[4]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미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받는 대신 십자군에 협조하지 않기로 살라딘의 후계자 알 아딜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즉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하기 싫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인답게 잔머리를 굴려서, 십자군에게 성지까지 실어다 주는 뱃삯을 요구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85세의 눈 먼 늙은 공작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들을 선동하며 당초의 약속과 달리 실제로 집결한 제후들이 적어 돈이 거의 없던 제후들은 결국 뱃삯을 몸빵으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뱃삯'은 십자군 출정 1년 전부터 합의되어 있던 것이고, 십자군에 참여했던 제노바나 피사 역시 뱃삯을 받았던 사례가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과도한 수준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5] 군사 35,000명과 말 5,000마리를 태울 수 있도록- 당시 돈으로 은화 8만 4천 마르크였다. 문제는 베네치아 공국은 이 대규모의 군대 운송을 준비하느라고 1년동안 돈이 되는 일들을 안하고 이것에만 몰빵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군대가 출발할 시기가 되자, 다들 베네치아로 모여들어서 출발하지 않고 각자가 편한 항구에서 제각기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러니 베네치아 측에서는 준비했던 만큼의 운송량만큼의 군대가 모여들지 않으니, 그만큼 운송비를 받을 수 없었고, 이것은 베네치아의 경제에 큰 타격이 될 판이었다. 비교하자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한항공에게 비행기를 다 없애버리고, 대한항공의 총력을 들여서 1년 안에 화성으로 갈 우주선를 만들면 비싼 여행비를 낼 화성 여행객들을 조달해주겠다고 했으면서 막상 우주선 준비가 되니까 다른 항공사로 화성 여행객들을 보낸다고 생각해보자. 대한항공은 파산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예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병력으로 인해 출항이 어려워지자[6] 베네치아 공화국은 '요금' 지불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십자군에게 헝가리 왕국에게 빼앗겼던 아드리아 해의 식민도시 자라 시[7][8]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군후들이 모였는데 '돈이 없어' 출발도 못한 채 돌아가는 것은 도저히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출정하자'는 지도부의 결정에 출정을 결정했다. 애초부터 강력한 방어 태세는 갖추지 못했던 자라는 사흘도 걸리지 않고 십자군에게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헝가리 왕은 교황에게 충성하는 영토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제4차 십자군은 막장테크를 탄 것이다.

흔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제4차 십자군이 파문당한 것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이미 4차 십자군의 막장성을 제대로 느낀 프랑스 출신의 시몬 드 몽포르란 양반이 자라 공격 이후 "이런건 주님의 뜻에 반하는 거다! 이딴 짓 때려 치우고 딴 살림 차릴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나서서 프랑스로 돌아간 뒤 알비 십자군에 참가도 하고, 아라곤 왕국 국왕의 목도 따고, 잉글랜드에 자기 아들도 보내면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

하지만 한 번 약탈과 재물의 맛을 본 십자군은 성지 따위는 잊어버리고[9] 동로마 제국의 제위계승전에 용병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점령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도시 자다르를 털어봤자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에게 빌렸던 돈을 지급할 수 없었다. 그 돈을 지급할 만한 도시는 단 한 군데 콘스탄티노플밖에 없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삼촌에 의해 쫓겨난 동로마 제국의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10]을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를 요청, 이를 받아들인 십자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이때 그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함락될 수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많을 텐데, 이 과정이 좀 막장이었다. 콘스탄티노플로 갔지만 한 줌 정도밖에 안 되는[11] 십자군의 규모로 함락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오히려 맞싸우러 뛰쳐나온 훨씬 많은 동로마군에게 역관광당할 위기에 놓였다.[12] 그러나 지속된 권력 투쟁과 왕위 찬탈로 제국 내부의 분위기와 여론은 막장 상태였고 십자군을 적당히 손봐줬다고 생각한 알렉시오스 3세가 군대를 성 안으로 불러들였는데[13], 이걸 황제가 무능해서 패주한다고 착각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황제를 쫓아내버리고 알렉시오스 4세를 맞이해버렸다.

그 결과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1203~1204)로 즉위하였으나, 애초에 그가 약속한 막대한 보상 자체가 무리였으며 (보상금은 은화 8만 4천마르크였다) 가톨릭 개종 강요와 보상금 징수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분노하여 봉기할 지경에 이르자 반대파에게 끔살당했다. 정권을 장악한 시민들은 "너네에게 보상 준다는 황제가 죽었으니 보상은 없다"고 십자군들을 문전박대했고, 이에 십자군은 꼭지가 돌아서 알렉시오스 4세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기어코 대가를 받아냈다.[14] 사실 아직도 베네치아에 가면 이때 약탈한 보물들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일단 멸망했으며, 그 남은 자리에 라틴 제국(1204~1261)과 몇 개의 부속국가가 들어섰다.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은 각지로 흩어져 망명국가를 건설하여[15]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해 진력했으며 결국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동로마 제국은 다시 부활하였지만, 이렇게 국력을 소모해버린 그들은 14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16] 수도 집중도가 높았던 동로마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한 국력 손실을 끝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동유럽(발칸 반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진격을 막아낼 지역 강국이 사라졌으며, 이 때문에 중부 유럽오스트리아 비엔나 근처까지 오스만 제국이 거침없이 확장할 수 있게 된 것.

결국 4차 십자군이 터지기 직전의 동로마는 마누엘 콤네노스 치하 중흥기를 구가하고, 국력의 최전성기는 지났음에도 여전히 동방 최강 단일 국가로서의 위세는 유지하고 있었고[17] 이미 수 차례나 동로마가 위기에서 회복해내고 동방에 대한 방어선의 역할을 계속해 온 것을 고려한다면 결국 십자군의 행동은 팀킬이었다. 근동의 이슬람 세력이 거대해지면 제일 먼저 노리는 목표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것은 예견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제국이건, 이슬람을 재통일한 셀주크 왕조건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면 다음 목표는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음은 4차 십자군 시대 당시에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 세기 전 프랑크 왕국 시대에도 이슬람의 침입을 격퇴한 동로마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냈고, 당장 십자군 자체가 셀주크 왕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위기감을 느끼고 시작한 것이다.

여하튼 십자군이 파문 받을 짓인 헝가리 침공에 이어서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크게 분노했다. 거기다 교황 특사가 십자군이 성지까지 향하기로 했던 맹세를 자의로 방면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리스 교회는 로마 가톨릭에서 오로지 지옥의 본보기와 암흑세계의 소행을 보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향이 강했던 바티칸은 곧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거기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귀중한 보물들을 약탈해서 일부를 교황에게도 진상했을 뿐 아니라 가톨릭과 갈라선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에 가톨릭 국가인 라틴 제국(라티노 크라티아)을 세워 명목상 로마 교황의 체면을 높여주었다. 제4차 십자군은 도덕적으로는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의 큰 수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인노첸치오 3세는 "콘스탄티노플이 좀 더 빨리 라틴인의 손에 들어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1187년 이래 계속 몰락하고 있던 중동의 십자군 국가들은 제4차 십자군으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약체화 된 이들 세력은 이미 무슬림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중개무역지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입장에서는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 더 득이었다. 따라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은 우트르메르(중동 십자군 국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편 이 원정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업적 라이벌이었던 동로마 제국이 몰락함과 동시에 이들이 동방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5.6 제5차 십자군 원정

원정기간은 1217년에서 1221년의 4년간.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제후들의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하지만 준비 와중에 인노첸시오 3세가 선종하면서 새로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준비해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에 헝가리 왕 안드라슈 2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키프로스 왕 위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후손)이 참가했다. 당시 독일 왕으로 몇 년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2세는 참가를 수 차례 재촉 받았으나 장기간의 해외 원정을 꺼려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18]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었는데, 이슬람 측이 미리 겁 먹고 도시를 비우고 허물어버린 탓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설레발이긴 했지만 십자군 역시 성벽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해서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둘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Damietta)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십자군은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 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시점쯤에는 동방의 수수께끼의 그리스도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5.7 제6차 십자군 원정

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역대 십자군 중 가장 평화로운 원정군은 아니고 협상단 겸 상단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가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1220~1250)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황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자 분노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기 전에 이미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일시 귀국하자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2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겨우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이슬람 지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정이었으나 당연히 교황이 납득할 리는 없었고, 술탄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미 알 카밀에 대항해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형제 알 아시라프는 물론, 이슬람 내에서도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큰 저항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 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당시 교황측은 이슬람 쪽이 약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협정 조건에서 이미 성벽이 존재하지 않던 예루살렘에 새로 축성하지 않는다라는 조약도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탈환해봤자 지키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 군대에게 공격[19]을 받으나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교황은 다시 한 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을 재파병했다. 나바라왕 테오발트 1세, 영국왕 헨리 3세의 남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 등이 이에 호응해서 갔으나, 재원정군의 규모는 소규모였다. 그들이 도착했던 시기는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왕조 간 휴전 협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는 하지 않았고 성지 순례와 아스칼론 쪽에 축성을 한 뒤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는 십자군 중 2번째(평화적으로 첫째)이자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5.8 제7차 십자군 원정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 간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제국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와 호라즘 연합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켜 친동생들인 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푸아투 백작 알퐁스, 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가는 길목인 만수라(Mansura)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바이바르스(Baibars)의 작전과 나일 강의 홍수에 말려들어 보급이 끊겨버렸고, 고립된 십자군은 괴멸당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그 와중에 친동생 로베르가 전사하는 불운도 겪었다. 여담이지만 루이 9세는 만일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성공하면 로베르를 이집트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석방 된 루이 9세는 남은 원정군의 몸값을 지불하느라고 꼬박 4년 동안이나 중동에 머물렀고, 이 일이 끝난 뒤에야 겨우 프랑스로 귀국했다.[20] 하지만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그 해(1250)에 살라딘 2세는 살해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으며, 만수라 전투를 지휘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5.9 제8차 십자군 원정

13세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였고, 호라즘 제국을 박살내고 달려오는 프레스터 존 몽골 제국은 유럽 세력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안티오크 공국은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몽골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바이바르스는 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안티오크를 함락시킨 뒤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아시아(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크(안티오키아)는 가뜩이나 십자군에게 점령되던 순간부터 꾸준한 하락세였다가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세는 1270년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세와 함께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앙주의 샤를)의 제안을 쫓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지원군으로 샤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사위인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의 군대 등이 합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이처럼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하고, 2번째 원정에서는 왕 자신이 병사까지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을 하여 루이 9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편 진중에서 필리프 3세는 왕위를 이어받고 대관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고, 또 나바라 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그리스도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목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5.10 제9차 십자군 원정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후에 에드워드 1세, 재위 1272~1307)는 뒷북을 친 격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 지원군들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아콘/아코)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 왕 위그 3세가 해군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일 칸국(1258~1353)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1271년 연합군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술탄은 암살자(어새신)를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상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이 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다(1289). 또한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했으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결국 십자군은 쿠칸에 이어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1291)당하면서 모든 거점을 잃게 되었고,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6 외전

6.1 노르웨이 십자군


노레기

1차 십자군이 끝난 직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가 일으킨 1107~1110년까지의 장거리 원정이다. 자그마치 노르웨이에서 중동 팔레스타인까지 원정을 했는데 바이킹의 원정에 버금가는 대원정이었다. 시구르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최초의 국왕급 인물이다.

1107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는 5,000명의 병력과 60척의 갤리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환대 속에 겨울을 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게 된다. 와중에 해적의 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해적들을 약탈하는가 하면 원조 해적 바이킹의 위엄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주변의 이슬람 소국들을 습격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한 뒤 보물들을 약탈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노르웨이 군은 1109년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국왕 루지에로 2세의 환대를 받은 뒤 키프로스를 거쳐 1110년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예루살렘왕 보두앵 1세의 따듯한 환대를 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 군과 합세하여 시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 십자가의 파편을 받는 등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받았다. 이후 육로로 귀환을 선택,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면회했다. 이때 많은 부하들이 바랑기안 친위대로 복무하길 원해 남겨졌고 해군과 보물들을 황제에게 바친 대가로 튼튼한 말을 얻어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을 주유하며 육로로 북상했다. 그 와중에 시구르드 1세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로타르 3세와 면회하기도 하였고, 이후 덴마크에 도착해서 국왕 닐스의 도움을 얻어 배를 빌려 1113년, 6년만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구경 한 번 잘 했네 유럽여행 참 쉽죠?

6.2 소년 십자군의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 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 이 계획 자체가 어른 사기꾼들이 꾸며낸 낚시로 밝혀졌는데,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 물론 성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서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모세의 기적처럼 지중해가 갈려서 도보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의 대부분이 고향으로 반송되었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신저로서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총자들은 알비파 십자군에 참전하는 정도로 끝났다. 사실 소년 십자군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영을 받은 용맹한 기사가..." 하는 식의 감상적 기록을 남긴 수도자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이고깽 판타지의 중세적 선조 그러다보니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가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유명한 이야기인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추측된다.[21]

6.3 알비주의 십자군

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Béziers) 시[22]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인과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의문을 던지자,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23]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24]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모두 죽여라. 주님은 누가 자신의 백성인지 아신다.[25] 귀축이 따로 없네(...) 할렐루야! 모조리 죽여라! 얏호!!!!!! 음... 나는 전장에서 맡는 피냄새와 비명이 너무 좋아♡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교황과 교황특사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는 것을 뒤늦게마나 깨닫고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개종을 목에다 칼을 들이댄 채 권유했다.내가 권유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나??-_-;; 물론 그래봤자 자기들도 미친 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시켰다.(...)

자... 이쯤에서 개종하면 사형인 이슬람교와 개종안하면 화형(...)인 현재(?) 기독교의 다른점을 찾을 수 없다면 정확하다.

알비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그리스도교라기 보다는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사실 항문을 통한 섹스를 뜻하는 BUGGER도 알비파의 한 분파에서 나왔다. 단명할 종파였다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계몽운동가라고 주장도 있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 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알비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후에는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알비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26],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톨루즈의 알비파 영주들[27]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이다.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28]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였다.

베지에 시의 학살과 뮈레 전투의 여파로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알비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기까지 한다. 결국 알비 십자군은 십수 년의 악전고투 끝에 1245년에야 남부 프랑스를 완전히 평정한다.

6.4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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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4년경의 시칠리아 왕국

이 전쟁은 크게 시칠리아 만종 사건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다. 위에도 설명한 7, 8, 9차 십자군에 참가한 시칠리아왕 샤를(앙주의 샤를)은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원래 앙주프로방스의 백작이었다. 근데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다스리던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계열이었던 섭정 만프레디[29]가 조카 콘라딘의 시칠리아 왕위를 강탈하고[30]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서 기벨린파(황제파)의 수장으로 중북부까지 세력을 뻗게 된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파문한다. 또 샤를에게 접근에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고[31], 샤를은 요시 그란도시즌을 외치며 형의 지원을 업고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패사시키고 왕권을 강탈하였다. 이듬해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였던 콘라딘이 또 처들어왔지만 쉽게 격파하고 붙잡아 나폴리에서 공개처형해 버린다. 이때 사실상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가 모두 사망하여 대공위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된다.[32]

야심에 불타던 샤를은 시칠리아 왕위에도 만족하지 않고 형과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고 헝가리, 제노바와 동맹을 맺은 뒤 크게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자리에도 욕심을 내어, 이미 붕괴해버린 라틴 제국을 지원해 알바니아로 침공을 가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나 이에 격노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아라곤페드로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주며 샤를을 치도록 종용했다.

한편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체와 결혼한 상태이므로 자신이 시칠리아의 적법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의 지원금까지 받자 샤를을 치고 시칠리아 왕위를 되찾을 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샤를은 계속된 원정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때문에 중과세의 세금을 물리고 시칠리아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에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상태였고 결국 반란을 배후조종하던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바치기로 하고 1282년 일제히 봉기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학살하였다(시칠리아 만종 사건). 샤를은 동로마 제국을 치려던 군대를 돌려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페드로 3세가 얼씨구나 하고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직접 처들어와 대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했다. 분노한 샤를은 교황과 프랑스 왕인 조카 필리프 3세(루이 9세의 아들)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과 전쟁에 돌입했고 교황은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샤를의 군대를 십자군으로 격상시켰다(1284년).

그러나 전쟁은 아라곤군의 강력한 공격에 샤를의 뜻대로 풀리지 않아 프랑스 함대가 아라곤 해군에 대패하고 나폴리를 봉쇄해 샤를의 아들 샤를 2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 악화일로에 빠젔다. 이에 마요르카의 왕이자 페드로 3세의 조카인 하이메 2세를 지원해 아라곤 내부 붕괴를 노리는 등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결국 육전에서도 프랑스-나폴리 연합군이 패퇴하여 샤를은 1285년 실의에 빠진 채 죽었다. 이후로도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샤를 2세가 1291년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고 나폴리 왕위만 차지하게 됨으로서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6.5 국토회복운동 (레콘키스타[33])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레온, 포르투갈, 나바라 등등의 국가가 참가했으며 결국 아라곤과 카스티야-레온의 동군연합으로 설립된 스페인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료한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때 산티아고 기사단이나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맹활약했다.

6.6 동방 십자군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현재의 폴란드 서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독일기사단이 싸웠다. 이때 독일기사단이 정복한 땅이 나중에 독일기사단이 세속국가화 되면서 프로이센 왕국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의 주요한 그리스도교 세력으로는 튜튼기사단이 있었고, 주요한 이교도 세력으로는 리투아니아가 있었다. 당시 튜튼기사단은 리투아니아를 들쑤시는 것으로 영토, 관광비[34], 무역 등으로 증흥했으나 튜튼기사단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에 의하여 리투아니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후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튜튼기사단이 대패하면서 100년에 걸친 튜튼기사단의 쇠락이 시작되었다.

6.7 북방 십자군

작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등이 주축이 되서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 핀란드, 독일 북부와 엘베강 동부, 폴란드 서부, 리투아니아 서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를 둘러싼 지역을 공격한 십자군을 말한다. 발트 십자군으로도 부르며 동방 십자군과 같이 취급되는 경우도 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3년 북방 지역의 이교도를 공격하라고 촉구하라고 한 게 공식적인 시작이지만, 그 이전에도 꾸준히 이미 성전을 명분으로 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있던 슬라브족을 동방식민운동과 함께 웬드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공격하여 정복하였고, 특히 핀란드에 살던 핀족은 1154년에서 1249년, 1293년까지 거의 100년간이나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정복당한다.

1193년에서 1227년에 리보니아 기사단이 에스토니아인, 리보니아인을 정복하고 기사단령을 세웠다. 또 러시아 동방정교회 국가들도 이 지역을 개종이란 명분으로 자주 침략하였다. 그 와중에 가톨릭 세력과 정교회 세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항목 참조.

6.8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불가리아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발칸반도를 탈환하기 위해 뭉친 십자군 연합군을 대파하였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전투도 공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35], 경우에 따라서는 2차 빈 포위를 계기로 결성된 신성동맹이 벌인 '대(大)투르크 전쟁(1683~1699)' 까지도 십자군으로 보기도 한다.

6.9 후스파 십자군

얀 후스의 사상을 따르는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지기스문트 황제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5차례에 걸쳐(1420∼1431) 보낸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황제와 교황은 후스파를 몰아내고 헝가리까지 아울러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는 야망을 품었던 모양이지만,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에게 십자군은 처참하게 털렸고 후스파는 보헤미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모라비아 등지까지 진격하게 된다. 얀 지슈카의 사망 이후에야 전장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436년 프라하 조약에서 보헤미아에서 후스파를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

사족이지만 이런 역사적 이유로 인해 체코 개신교회(ECCB)는 지금도 십자가를 잘 쓰지 않고 성만찬용 성작을 상징으로 사용하며, 교회에 가면 왠 큼직한 와인잔(...) 실루엣이 십자가 대신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7 영향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권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36]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보고르트 공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나... 싶었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4차 십자군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년간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고,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 같은 내부의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37]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순례자들에게 순례세금을 물리자 아예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한편 몽골군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던 몇몇 몽골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군이 처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 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38]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 전쟁의 병크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릿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 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8 평가

전쟁이 끝난 후 19세기 전까지는 사실 이슬람이나 그리스도교나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큰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교 측 또한 언급해서 좋을 게 없는 전쟁으로 여겼고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흑역사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이긴 유럽 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 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렇게 중동 침략을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로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하지만 살라딘 같은 영웅이 지금 이슬람권에 없다는게 함정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류는 현대에도 이어져와서, 걸프전으로 시작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에 서방세계의 다국적군이 중동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또 벌이고 있다!"라고 호도하며 언플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밑의 이해타산적 재평가와 맞물려서 '테러와의 전쟁'은 핑계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실제로는 석유를 노리고 중동을 침략하는 거라는 음모론 내지 선입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더불어 이라크 전쟁을 두고 조지 워커 부시가 십자군을 가리키는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쓰던 것도 문제였다. 결국 결과도 십자군 전쟁 꼬락서니가 났지만. 미국에서도 이 말에 유태계 정치가들이 매우 언짢아했는데 십자군은 십자군 전쟁 당시, 종파가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유태인들도 마구 학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민중 십자군 항목을 봐도 십자군이 억울한 유태인을 죽여놓고 되려 적반하장으로 유태인이 그리스도인 죽였다고 소문내며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 집단 학살을 일으키게 했다. 동로마와 중동에 살던 정교회의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라며 십자군한테 학살당했다. 그러다보니 정교회는 이슬람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라며 십자군을 증오할 정도. 이렇게 서구권은 십자군 전쟁을 잘난 듯이 종교 드립을 쓰거나 이렇게 멋지듯이 썼다.

식민지 시대가 저문 이후,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하느님의 뜻이란 이름하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용서를 구했다. 1년 후 2001년, 교황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9.11 테러가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서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라는 의문이 던져졌고 이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는데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첫 타자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것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류의 저서와 "관대한 이슬람" 떡밥이다.[39]

한국에서도 그리스도교 쪽이라고 종종 편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톨릭이 벌여놓은 전쟁이라 가톨릭의 학살극이라고 비난하는 개신교 측 의견도 많다. 기독교 죄악사란 책을 쓴 한 목사는 십자군 전쟁을 "예수님 얼굴에 똥칠한, 그리스도교 최악의 광란"이라고 분노 어리게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알아둘 점은, 가톨릭만 깐 게 아니라 이 책자에서 근현대 필리핀에서 벌인 필리핀인 학살을 두고 종교적 이념으로 정당화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를 현대판 십자군으로서 역시 개신교도 예수님 이름을 더럽힌 학살을 저질렀기에 이를 옹호하면 안 된다고 다같이 까고 있다.

9 재평가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는데,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40]으로 일어난 전쟁일지언정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계속 나오고 있다. 물론 재평가라고 하여 이 전쟁을 정의롭다느니 뭐니 좋게 평가한다는 건 아니다. 십자군을 '아무 정당한 이유 비슷한 것도 없는 미친 짓' 정도로 규정하는 시각은 부정되는 추세다.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는데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털어먹고 참 십자가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신흥세력으로 일어났고, '종교적 동기'에 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털어먹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서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해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십자군만 똑 떼어내어서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미친짓이네'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차지하면 '세력 확장'이고,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을 차지하면 '종교적 광기'라는건 이중잣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 자체도 단순한 '그리스도교 vs 이슬람'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그리스도인끼리도, 무슬림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 하지만 십자군들도 동로마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41]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이슬람 쪽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가 내분하는 것 보고 열심히 자극 받아 자기들도 시아파, 수니파,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나중에는 몽골계로 막 나누어져 서로 잘 싸웠다(...) 특히 이슬람 내부의 민족, 종파간의 분쟁은 기독교의 분쟁보다 더 심했다.[42] 애초에 그리스도교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촉발 시킨 정치적 계기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이었다면, 이슬람 쪽에서는 아바스조 치하든, 우마이야조 치하든 예전의 안정된 통합 칼리파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내부적인 '성서의 백성' 전통에 따라 적당히 돈만 받고 성지 인근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알아서 살게 내비두던 걸 중동 세계가 시아파 파티마조와 튀르크계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군벌들이 예루살렘을 번갈아가며 지배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도, 유대인들과 유지하던 첨예한 관계가 깨져 유럽의 귀에 들어갈 만큼 무슬림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기들끼리 싸워댔고 배신과 뒷치기도 흔했으며 시리아에선 아예 친 십자군 영주들이 반대 세력 없애겠다고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 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43] 기존의 유럽이 제국주의적이고 종교 근본주의적인 시각에 경도되어 일방적으로 칼 들고 쳐들어간 것이란 시각은 부당하다는 시각이다.[44] 여기에는 십자군을 미화한 당시 유럽인들의 책임도 있다. 그런데 현재는 정반대라 유럽 일반인들에게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광기로 무작정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의 수치 정도로만 여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 역시 편협하고 옳지 않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 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단순히 '기독교 vs 이슬람'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을 완전히 잘못 본 것이다. 사실 이런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십자군이 초반부터 가톨릭 열혈국가인 헝가리를 쳐들어가든지 이슬람을 친다면서 되려 같은 기독교인 동로마 제국을 쳐들어가 학살을 벌이던 것이라든지, 단순한 기독교 대 이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문제는 그거 십자군만 한 게 아니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애초에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다른 이슬람 종파들을 대상으로 허구한 날 학살과 약탈을 벌여 같은 무슬림들에게 악당으로 증오받았다.[45]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십자군 전쟁을 중세사회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자는 것이다. 재평가 이전 십자군 전쟁은 19세기 제국주의를 보는 시각으로 해석하거나 20세기의 종교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 시기와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전쟁과 크게 다를것도 없던 십자군 전쟁만이 유독 (다른 전쟁들과 구분되는) 광신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주목받아왔다.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보다 동시대 다른 전쟁들과 비교연구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의 연장선이라는 소리가 그게 곧 정의이고 옳다는 소리는 아니다.

즉 십자군 전쟁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유럽사의 많은 전쟁들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며, 실은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관련 역사학자, 문필가, 대중매체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고민, 세계관에 따라 해석 되었다. 서유럽 세계 전반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주의가 몰아 칠때는 비이성적인 광신으로 인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삽질로 평가했고, 그 이후 제국주의뽕을 쫙 빨아먹고 다른 문명과 인종을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 깔아 뭉겔때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현대 사회에 들어 서구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도전받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옥시덴탈리즘적 관점이 유행할 때는 다시 악랄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로 보았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 기존의 서구중심주의의 대항마로 부상했던 옥시덴탈리즘적 관점도 이제 혁파 되야할 낢은 관점이 되어버리고, 실증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이슬람권 내부에 대한 연구도 진행 되면서 기독교 vs 이슬람 같은 듣기에는 빠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단순화와 이분법적 관점 자체를 거부하고, 덤덤하게 후대의 관점에서 실제로 그 시대에 뛰며 먹고 살았던 개개인의 역사적 주체들의 (historical actors) 자발성을 (agency) 강조하는 현대의 시각이 부상한 것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분화가 깊게 진행되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뭉떵그려 단순화하는 거대한 프레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는 사실 11세기 부터 일러도 14세기, 관점에 따라 15세기, 16세기 까지, 매번 이름만 '십자군'이란 상표를 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발생 동기, 목적, 관련 세력, 진행 방향 모두 판이하게 달랐던 300~400년에 걸쳐 터졌다가 수그러지기를 반복했던 현상을 '십자군 전쟁'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뭉떵거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를 무리수로 본다.

10 대중매체 속의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영화의 소재로서 관심 있는 분야지만, 이슬람, 기독교와 얽혀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기 힘든 소재 중 하나이다.

현재로써는 킹덤 오브 헤븐이 십자군 전쟁의 일면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당시의 광기와 복잡다양한 힘의 역학관계를 느껴보고 싶다면 볼 만하다.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 시청시에는 반드시 감독판으로 찾아서 보는 것을 권한다. 무려 40여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건 둘째치고, 그 40분이 대부분 본편(편집본)의 '엉성한' 스토리 서브플롯을 연결해주는 부분들이다.

물론 <킹덤 오브 헤븐>도 영화이니만큼 실제 역사와 차이나는 점이 있다. 애초에 주인공 이벨린의 발리앙은 20대의 멋쟁이가 아니라 50대의 늙은이였으며, 예루살렘 왕국 공주 시빌라와의 로맨스도 사실과 다르다. 영화에서 시빌라 공주는 무능한 악역 기 드 뤼지냥과 억지로 결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얼굴만 잘생긴 희대의 무능남 기에게 반해서 왕관을 들어다 바쳤다. 그러나 발리앙이 살라딘과 싸웠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덤비면 주민이고 포로고 뭐고 다 죽이고 모스크 전부 때려부술 거야!" 하고 협박했던 것은 사실이고, 발리앙이 군사들에게 기사 작위를 줬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인원을 기사로 서임한 건 물론 아니고, 60명 정도를 날림으로 기사로 서임했다. 이는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사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 말하자면 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사들을 대충 골라서 장교로 임명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뭐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배경이기도 하다.

크루세이드 정벌기 근데 막상 이벤트 스테이지 기준 시간대와 배경이 오락가락하다 이벤트니까
게다가 나오는 소녀들이 과거~현대~미래 형 포스 등등..아니 배경이 중세시대 아니엿어? 시간여행식 소환으로 불러모앗다 카더라

홍콩 만화 <회전사>는 십자군이 서하국까지 쳐들어오는 스토리라는 판타지 만화이다(...)

미디블 토탈워 시리즈를 해보면 십자군과 지하드를 지겹게 경험할 수 있다. '할 수도 있고, 당할 수도 있고. 그리고 몽골과 티무르라는 핵폭탄이 따라온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도 살라딘 미션이 있어 플레이할 수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는 이름 그대로 십자군 전쟁시기 왕 또는 제후를 선택해서 가문의 번영을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당시 시대상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직접 십자군 또는 지하드에 참전이 가능하다.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칠왕국이 도른을 정복하고자 공격한 도른 원정십자군 전쟁을 모티브로 했다.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칠왕국과 중동을 모티브로 한 도른이니 십자군 전쟁이 딱 맞다. 결과는 역사와 비슷하게 실패로 끝났다.

워해머 판타지에서 중동을 모티브로 한 아라비를 침공한 제국과 브레토니아의 원정이 십자군 전쟁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이는 아라비가 제국의 동맹국인 에스탈리아를 병합시키고 브레토니아를 침공하다보니 선공은 아라비가 걸었다. 실패로 끝난 역사와 달리 십자군은 성공하여 아라비 제국은 멸망시키고 원흉인 아라비 술탄 자파르도 죽인다. 특히 아라비는 제국과 브레토니아에게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 이후 아라비는 여러 도시국가들, 유목 부족들로 조각나서 두번 다시는 통일된 제국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엔드 타임 때 그 영토까지 박살이 나면서 주민들은 용병이나 상인 노릇을 하며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11 참고 자료

국내 인문학 저변이 워낙 암울하다보니 연구서고 입문서고 간에 아래 서술할 3권 말고는 없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저, 김이선 역, 아침이슬 발행, 2002년): 아랍인의 관점에서 서술하여 그 쪽 입장에서 본 전쟁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사씬이라든지 아랍의 분열과 이슬람도 투르크와 아랍인의 대립이나 종파 문제를 다루면서 아랍 측 문제점도 좀 이야기하고 있기에 무조건 십자군은 개쌍놈, 이슬람군은 정의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여하튼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십자군 전쟁에 대한 최근 논쟁이나 연구성과를 담은 연구서는 단 한 권도 번역되어 있지 않다(사실 서양사 전반이 이 모양). 이 책도 절판되어서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이 서적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십자군을 라틴인이라 칭하기보다 프랑크인이라 칭했는데, 기사의 중장갑과 서유럽 군대의 우수한 장비에 놀랐지만 가장 걱정스럽게 여긴 것은 뜻밖에도 '법률과 행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 학자가 말하길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의 법률적 행정적 사안이 에미르의 독단으로 행해졌으나, 십자군들은 영주의 의견이 크더라도 '법률에 의거해' 처벌을 정한다는 점과 정확한 토지분배로 현지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한다. 학자는 십자군의 군대보다 이러한 법률과 행정제도가 이슬람의 진정한 적이 될 것이라며 걱정했다.

토머스 매든의 <십자군>이 그나마 최신 경향을 담고 있지만 그게 전부다. 게다가 이 책은 원서명 그대로 Concise History라 매우 간략하다. 입문용으로는 훌륭하나, 방대한 사건을 짧게 요약하였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 당시의 복잡한 정치역학과 문화, 군사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국내 인문학의 암울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외에는 W. B. 바틀릿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과 시공사가 내놓은 조르주 타트의 십자군 전쟁 -성지탈환의 시나리오가 있다. 있다.

한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인기를 끈 적은 있었는데... 좋게 표현해야 역사만화의 탈을 쓴 시사만화고 악의적 왜곡과 작가의 황당한 해석이 너무 많아서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읽을 것이 못된다. 특히 이걸로 입문하려 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

결국 십자군 전쟁에 대해 최근 20여년간 역사학계가 내놓은 새롭고 풍부한 연구성과를 접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1. 작은 규모로는 7차~8차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9차까지 정의하는 경우도 있으나, 8차와 9차를 묶어 8차까지라 보는 경우도 있다.
  2. 첫 지배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성묘의 수호자란 검소한 칭호에 만족했다.
  3. 십자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행적을 보인다. 십자군 자체가 추악하니 가장 추악할 게 따로 있냐는 말도 있는데, 십자군이나 중세 서방 세계가 유별나게 추악하다 그런 관점은 좀 낡은 감이 없잖아 있다. 어쨌든 4차 십자군은 그런 와중에도, 중세 세계의 눈에도 막장이었다.
  4. 십자군 대표단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계약'에서 목적지를 특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적이 방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곤 했지만. 계약서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5. '사전에 합의한' 계약 조건이었음을 상기하자. 더군다나 이들을 싣기 위한 각종 물자와 배를 만드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력이 총동원되었던 만큼 일정 수준의 뱃삯을 받지 못하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6. 십자군 참여를 약속했던 군후들 상당수가 참여하지 않았고, 지원병들은 최소한의 지참금도 가져오지 않아 군후들이 대신 내어주는 형편이었다.
  7. Zára, 현 크로아티아자다르-Zadar. 정확히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기 싫었던 자라 시가 헝가리 왕에게 청원해서 자발적으로 헝가리의 영토로 편입된 것. 자라는 전통적으로 베네치아에 반항적인 도시였다.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헝가리가 이후 베네치아를 족치지 않은 이유도 어차피 전통적으로 베네치아의 도시였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사실 당시 베네치아의 국력도 만만하지는 않았지만.
  8. 비슷한 상황으로 베네치아가 항상 눈독들이며 영유권을 주장했던 두브로브닉, 즉 라구사 공화국도 이렇게 헝가리에 의존하며 근세 까지 어찌 어찌 정치적 독립을 지키다가 베네치아를 막아줄 따거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게 망하니 아예 종교적 차이에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을 자처하고 알아서 수그리면서 베네치아에게 끝까지 독립을 유지하지만, 대신 크림 한국, 튀니지, 알제르, 몰다비아 같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중 유일한 카톨릭 라틴 문화권 공화국이라는 타이틀을 달다가 머나먼 훗날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조질 때 같이 해체되었다(...)
  9. 함께 재미를 본 교황 특사가 이들의 성지 수복 맹세를 무효화해버렸다.
  10. 십자군에게 거액의 일시불 지급,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성지 수복에 참여하는 것, 제위에 있는 동안 1천여 명의 기사를 보내 성지를 수호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동방의 정교회를 가톨릭으로 통합한다는 4가지 조건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양대 종교의 흡수 통합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1. 1453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이나 이전의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군 등의 규모를 볼 때 이때 십자군의 규모는 확실히 한 줌 정도의 수준이었다.
  12. 이때 십자군 측은 완전히 망했어요의 분위기라, 비전투 인력에게 대충 무기 쥐어주고 최후의 결전을 하려 했었다.
  13. 십자군 중기병들과 성 밖에서 싸우는 걸 두려워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14. 이번에는 해안가 쪽 낮은 성벽을 공격했고, 한 차례 도시가 뒤집어진 이후라 수비군이 상당히 막장화된 뒤였다.
  15.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레비존드 제국은 십자군 국가와는 별개로 건국되었다.
  16. 여담이지만,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 뒤 오스만 제국의 공격 대상이 된 나라들은 동로마 제국이 있었을 적에 제국을 무던히 골치 아프게 했던 불가리아, 세르비아, 베네치아 같은 나라들이었다. 결국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아예 정복당해 민족사에서 최악의 흑역사를 경험한다. 그야말로 순망치한이요, 역사의 인과응보. 베네치아의 경우 역시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4차 십자군으로 뜯어낸 동지중해가 오스만 제국의 주요 목표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치명적으로 노출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몰락한다.
  17. 다만 마누엘 1세 사후 안드로니코스 1세와 앙겔로스 황조의 막장 황제들을 거치며 동로마 제국이 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 최강 단일 국가의 힘이 남아있던 건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외국 용병을 동원해 황위쟁탈전에 이용한 건 4차 십자군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지만, 그러다 용병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까지 한 건 4차 십자군 시점 외에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출발시의 인원 부족과 라틴 제국의 부실함이 보여주듯 4차 십자군은 천 년이 넘도록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수많은 적들 중에선 별로 강한 편도 아니었다.
  18. 이 사람은 프랑스 출신 기사로, 예루살렘 왕 콘라드의 딸 마리와 결혼한 부마였다. 사실 이미 몰락 테크를 타고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좌에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과 프랑스 왕이 억지로 임명하여 보낸 인물이었다. 결국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후에 라틴 제국으로 가서 섭정이 된다.
  19. 교황이 무슨 공격을 감행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1870년까지 약 천 년 동안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의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이기도 했다. 당연히 주민을 징발하고 물자를 모아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그 힘으로 유명세를 떨친 것이다. 참고로 교황 뿐 아니라 주교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 또한 중세에는 실질적으로 영주이자 기사인 경우가 많았다.
  20. 물론 잡병들은 어림도 없었고 노예가 되느냐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의 선택을 강요 받았다.
  21. 독일 동부의 식민지 개척화 사례를 풍자한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22. 프랑스 남부 랑그도그루시옹(Languedoc-Roussillon)지역의 상업도시
  23. 시토 수도회 출신 수도원장으로 나중에는 대주교까지 올라갔다.
  24. 베지에 학살에서 20년 후에 독일 시토회 수도자가 적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25.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두 죽여라. 주께서 가려 내실 것이다(Kill them all. Let God sort them out.)"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이쪽의 번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다만 두 문장 모두 결국 뜻은 같다. 누가 이단인지는 주님이 알고 있을 테니, 일단 다 죽여서 하느님이 심판하게 하라는 것.
  26. 교회로서는 중대한 사항이다. 교리의 자의적인 해석은 교회의 일체성을 훼손하기 때문. 그러니까 당중앙주류교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건 문제 없지만, 알비파가 해석한 건 문제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내로남불사례. 교회가 시전한 자의적해석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 그 후에도 수십차례 시전한 공의회시리즈(...)를 참고하라
  27. 정말로 알비파를 믿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레몽 6세도 그렇고, 오히려 이해관계로 일해 가톨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파문당한 뒤 카타리파에게 연대감을 느낀 영주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28. 저 위에 4차 십자군에서 같은 그리스도교 왕국인 헝가리령 자라 공성 밑 약탈 이후 "더러워서 이런 막장 드라마 더 못 보겠다!"하고 때려친 인물이다. 우크르메르에서 6년간 싸우고 부친의 사망에 따라 몽포르로 돌아와 몽포르 백작이 되어 있었다.
  29.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로 정식 계승권이 없었다.
  30. 슈바벤의 공작이었던 콘라딘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독일에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프레디가 왕위에 올랐는데, 후에 오보인 것이 밝혀졌으나 왕위를 양도하지 않고 그대로 강탈했다.
  31. 처음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에게 제의했으나 최종적으론 샤를이 선택되었다.
  32. 프리드리히 2세의 장남 하인리히는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폐위된 뒤 비참히 죽었고 차남 콘라드 4세는 1250년 아버지가 죽자 독일왕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놓고 대립 황제들과 싸우다 4년만에 급사했다. 콘라딘이 바로 콘라드 4세의 아들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서자가 많았는데 만프레디와 더불어 또 다른 서자였던 엔조는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 와중에 볼로냐에서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대우는 받았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33. Reconquiesta 다시-정복하다. : 재수복
  34.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기사들이 동방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얼마의 돈을 지급한 뒤 성전을 뛰었다.
  35. 야노슈 후냐디가 지도한 긴 원정과 바르나 십자군, 베오그라드 전투
  36. 이러한 상권 이동 과 함께 폴로브치인들의 침입과 내전으로 타격을 입어 쇠퇴하고 말았다.
  37.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흑인 기사는 이걸 의식한 듯하다.
  38. 당연하게도 100의 영지를 10명이 농노가 경작하던 기존과 달리, 7~6명의 농노가 경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생산물이 증대되고,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농노들이 더 많은 부를 얻고자 하는 욕구로써 영주가 의도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들이 흑사병/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이전과 같은 요구를 할 수 없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39. 서구 미디어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가 마치 무작정 폭력을 숭상하는 종교인 것처럼 왜곡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이슬람교 자체가 굉장히 경직된 율법 위주로 돌아가는 종교인 것도 반박하기 힘든 사실이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의 추태로 갈수록 이슬람이 원래의 좋은 점을 인정못받고 있다.
  40. 사실상 대부분의 전쟁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났다.
  41. 서열상 알렉시오스가 위고 동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을 황제 책봉을 해준 일이 있기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 조공 책봉처럼 절대적이지 않았다.
  42. 지금도 이슬람 세계의 민족, 종파간의 분쟁은 다른 종교들보다 극심하다.
  43. 그런데 이런 시각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안달루시아에서는 히샴 2세가 사망한 이후 벌어진 내전으로 정복이나 원정은 커녕 각 정파가 북쪽의 기독교 세력과 각자 손을 잡고 내전을 벌이다 머지않아 여러 개의 타이파 국가로 나뉘었고, 그 중에서도 강한 편이었던 톨레도의 타이파는 인접 타이파와 전쟁을 위해 기독교 세력을 빌리다 되려 톨레도를 할양하는 등 이슬람 세력이 자멸하는 형국이었고, 시칠리아는 11세기 중엽에 노르만 인들에게 정복당했고 지중해 건너 이프리키야는 힐랄 침공으로 지르 조가 사실상 와해된 틈을 타서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이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였으며, 무엇보다 동방은 만지케르트 전투 전 약 2세기간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를 맞으면서 크레타를 시작으로 키프로스, 시리아, 아르메니아 일대를 석권한 상황이었다.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핑계가 통하려면 십자군 전쟁이 실제 역사보다 1~2백년 전 쯤에 일어났어야 한다.
  44. 무함마드 사망전 629년부터 이미 동로마 제국의 땅인 시리아에 원정대가 파견됐었다
  45. 다만 이슬람 측에서 관대함을 대표하는 건 살라흐 앗 딘이었지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이슬람 다른 종파에게도 악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였고 십자군을 까고 십자군 전쟁을 종교적인 미친 전쟁이라고 미치도록 비난하던 근현대 서구 역사가들도 살라흐 앗 딘을 '관대한 이슬람 대왕'이라고 찬양하던 거랑 달리 이 둘은 '십자군이랑 종교가 다르다 뿐 똑같은 학살자'라고 비난했었다는 걸 알아두자. 이들이라고 무조건 '이슬람은 죄다 관대하다능~ 기독교는 악마색히'라고 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