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년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간에 일어난 디라키움 전투(1018)에 관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081년 노르만족과 비잔틴 제국간에 일어난 디라키움 전투(1081)에 관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없는데 어떻게 해당 문서를 참조하라는거야..
Battle of Dyrrhachium / Siege of Dyrrachium
1 개요
디라키움 공방전은 기원전 48년 4월에서 7월까지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로써 벌어진 일련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방어측에는 디라키움 보급기지의 폼페이우스 군대가 있었으며, 공격측에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있었다. 디라키움 기지의 포위 이후 카이사르의 퇴각까지 전선에 큰 변동이 없었기때문에 포위전의 양상이 짙다.
폼페이우스의 막판 공세에 허점을 찔린 카이사르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일부러 져줬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가 추격을 중지시켰기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대는 보병 1000명, 기병이 200명정도의 경미한 손실만 입고 질서정연히 퇴각할수 있었고, 이때 살아돌아간 카이사르의 정예병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어난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하게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배경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발발한 내전에서 20개 대대로 이루어진 카이사르의 본대는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의 파벌을 성공적으로 분쇄한후 해전에서 9000명의 손실을 내가며 이베리아 반도를 정벌하는데 성공한다.
부관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이끄는 4개 군단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공략했지만 북아프리카 북부에서 누미디아의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와 조우해 궤멸에 가까운 손실을 당하고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 장악에 실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부관 쿠리오 본인도 전사한다.
제해권 장악에 실패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중요한 요충지인 디라키움 보급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본대를 돌린다.
3 포위
카이사르의 목적을 파악한 폼페이우스는 급히 본군을 디라키움 기지에 집결시킨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 주변으로 포위막을 형성하고, 디라키움 남부의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의 병력은 강의 북쪽에, 카이사르의 병력은 강의 남쪽강남에 진을 치고 대치하게된다. 비록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질도 훨씬 떨어지고, 사기도 충성도도 더 낮은 편이었지만[1] 수적으로 카이사르군을 압도했기때문에 카이사르는 병력 증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원래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2진 병력이 카이사르의 본대와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지만 내전초기의 제해권 장악 실패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해군병력때문에 쉽게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안토니우스는 크나큰 도박을 하게되는데, 카이사르가 압도당하기전에 도착하기위해 서둘러 출항했다간 계속 불고있는 남풍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위치보다 훨씬 북쪽에 상륙하기때문에 강 북쪽에 진을 치고있던 폼페이우스의 군대의 표적이 되기도 쉽고, 폼페이우스의 해군력이 막강했기때문에 자칫했다간 땅과 바다 양쪽에서부터 포위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안토니우스는 출항을 결심했고, 3월 26일 제 2진의 1만 보병과 800의 기병대가 브린디시항에서 출항한다.
출항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폼페이우스의 해군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받기 시작하지만 당시 로마의 배에 달린 돛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흘러가는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손놓고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상륙을 위해서는 남서풍이 필요했지만 야속하게도 바람은 남풍이었다. 그렇지만 사령관 안토니우스는 얼마간의 피해를 감소하고서라도 상륙을 강행하는데, 전쟁사에서 꽤나 자주 보듯이, 이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남서풍으로 바뀌었던 것.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피해가 전무한 채로 무사히 착륙한 데 반하여, 뒤에서 안토니우스를 추적하던 폼페이우스의 함선들 대다수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밀려가 근처의 해안 절벽에 부딪쳐서 침몰한다. 시밤쾅
극도의 운으로 안토니우스 휘하의 2진병력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7일에 무사히 상륙했고, 상륙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급히 진영지를 걷고 안토니우스와 합류하기위해 북진했다. 낌새를 챈 눈치백단 폼페이우스도 2진병력의 합류를 저지할수만 있으면 압도적인 우세를 얻게되는것을 알고 2진의 합류를 저지, 궤멸시키기위해 진군한다.
카이사르의 입장에서는 병력증원 없이는 큰 손실을 입을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북진했고, 성공적으로 2진병력과 합류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폼페이우스는 역공을 방지하기위해 재빨리 보급기지로 귀환해 방어진을 펼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포위 공방전이 시작된다.
4 공방전
포위를 당했다고는 하나 해안가 이미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을 틀어쥔 상황이어서 카이사르군과 달리 폼페이우스군은 꾸준한 보급을 받을수 있었다. 또한 정면을 따라 언덕 두개가 나란히 있었기때문에 방어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따라서 폼페이우스의 전략도 카이사르와의 지속적인 전면전을 통한 단기간의 승부보다는 교착된 전선에서 장기간의 소모전을 통해 카이사르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힘을 빼는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소모전중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같은 고관, 백부장들을 상당히 잃었다[2].
카이사르역시 바보는 아니어서, 폼페이우스가 원하는대로 소모전에 쉽게 응하지 않았고, 본인이 갈리아 정벌중 기술한 병법을 도입해 폼페이우스의 방어진 코앞에 포위진지를 구축함으로서 폼페이우스를 육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 바닷가로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3개월간의 교착상태가 지나면서 보급품이 많이 고갈된 상태긴 했지만 머지않아 수확철이었고,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기지에 병력을 집결하는데 집중했기때문에 청야전술같은 것도 구사할 시간이 없어서 농작지 등도 남아있던 상황이라 수확철이 다가온다는것은 카이사르군이 쉽게 주변에서 식량을 자충할 수 있게된다는것을 의미했다.
5 폼페이우스의 역습
이런 이유로 인해 더이상 시간을 끌며 버텨봤자 해안요새의 이점을 살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포위진의 약점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결국 우세한 머릿수를 이용해 포위진 남쪽에서 카이사르 제 9 군단을 쳐서 포위를 푸는데 성공한다.[3]
포위가 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바로 안토니우스 휘하에 증원병력을 보내서 구멍을 메우려 시도한다. 결국 임시적으로 포위망 파괴를 막는데 성공하지만 수적 열세로 인해 밀리는 상황이었고, 병력을 차출해 증원을 보낸사이 폼페이우스가 기존 돌파구의 우측에 새로운 돌파구를 형성해 측면공격을 감행했고, 카이사르의 군대는 우측 날개지점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병력이 혼란속에서 무너지는것을 보고 카이사르는 전열을 정비시켜 다시 맞서려고 시도하지만 부질없는 짓임을 바로 깨닫고 병력을 통솔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데 집중한다. 덕분에 (본의아니게) 폼페이우스를 기지밖으로 유인해내기 위해 퇴각하는듯한 기만술로 적의 추격을 방지하는데 성공했고, 상황에 비해 경미한 피해만을 입고 전열을 유지한채 탈출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