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알렉시오스 1세 | ← | 요안니스 2세 | → | 마누일 1세 | |
콤니노스 왕조 | 콤니노스 왕조 | 콤니노스 왕조 |
생애 : 1087 ~ 1143
재위 : 1118 ~ 1143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와 아들 마누일 1세와 함께 '콤니노스 3현제'로 불리는 명군이다. 다만 아버지 알렉시오스가 주변국으로부터 외교적인 신뢰를 상실할만한 행동으로 지탄받은 점이나, 아들 마누일이 주요한 원정[1] 실패, 부패 문제, 반서구 여론, 후계자 문제 등 몰락의 단초를 남겨둔 점으로 비판 받아 '3현제가 아니다'란 평을 받는 것과는 달리 요안니스 2세는 큰 실패랄 만한 것을 저지르지 않아 그러한 점에서는 자유롭다 할 수 있겠다.
콤니노스 3현제 100년 중흥기의 재건 로마군을 상징하는 황제.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내전기와 디라히온 공방전으로부터 페체네그 전쟁기를 거치며 소멸해버린 중앙야전군은 1091년 레부니온 전투에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후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투르크와의 전면적인 야전에서 승리 할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요안니스의 치세에 동방에 대한 공세에 나서 대부분의 야전[2]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요안니스 자신도 전투 중에 부상을 입기도 하는 등 전장을 직접 누비는 군인같은 사람이었던 모양.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치럼 제국의 위기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중흥을 이룩한 극적인 면이나 아들처럼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최대판도를 이룬 것 같은 화려한 업적이 없어 영 존재감이 부족한 황제이다(...). 거기다 누이이자 역사가인 안나 콤니니도 아버지 알렉시오스와 요안니스의 아들인 조카 마누일의 이야기는 많이 남겼음에도 정작 친동생이자 제위 경쟁자였던 그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기록을 적게 남겨 더더욱 이러한 현상에 부채질 하고 있다. 그러나 견실하고 흠잡을데 없는 황제임에는 분명하다.
2 즉위 이전의 생애
알렉시오스 1세와 이리니 두케나의 셋째 자식이자 장남으로 콤니노스 가문 최초의 포르피로예니토스였다. 그러나 누이 둘이 이미 태어나 있었고, 그 중 장녀이던 안나와 공동황제로 선정되어 있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약혼한 상태로 두카스 가문의 차기 제위가 유력했기에 확고한 후계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제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1092년 그를 공동황제로 지목하고 헝가리의 왕녀인 이리니[3]와 약혼하게 된데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1094년 사망하게 되자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부계로 대를 잇게 하려는 욕심인지, 족벌주의를 실시할 정도인 알렉시오스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안정성을 추구한 것인지, 혹은 자질이 뛰어난 후계자를 갖고 싶었던 것인지 알렉시오스의 속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가지 의도 모두 그의 사후 충족되었다는 점이다.
1104년 약혼녀인 헝가리의 이리니와 결혼하였고 2년 뒤인 1106년 첫 자녀로 쌍둥이 남매를 보았다. 금슬이 좋았는지 이후 제위를 계승하게 되는 1118년까지 막내 마누일을 볼 정도로 8명이라는 많은 자식을 두었다.
3 제위 계승
알렉시오스 1세는 평생에 걸쳐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정작 황궁 내부는 안정시키지 못했다. 황후 이리니와 장녀 안나가 공모하여[4][5] 요안니스의 매형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제위에 올리려 요안니스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18년 건강이 악화되자 노황제는 아내와 장녀를 배제하고 사위가 아닌 요안니스를 후계자로 재차 지목, 얼마 못가 붕어하였다. 이는 옳은 선택이었으나 좋은 마무리는 못 되었는데, 제위를 위협하는 반대파를 궁정 내부에 남긴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요안니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모후와 누이 그리고 매형이 얽힌 쿠데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암살의 위협을 피하고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진압한 요안니스는 모후와 누이를 수도원으로 보내고 스스로 쿠데타에 반대한 매형의 충성심을 높이 사 관용을 베풀어 장군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장남인 알렉시오스를 공동황제로 지목해 후계구도를 안정시킨 요안니스에게는 부황에게 물려받은 안정적인, 그러나 과거에 비해 형편없이 줄어든 제국이 있었다. 황제에게는 다시 이를 키워낼 의무가 있었다.
4 재위 초반, 성공과 좌절
재위 초반 제국의 안보는 나름대로 안정적이었다. 주변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고 있거나,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었다. 황제는 바로 동방에 눈을 돌려 룸 술탄국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남부를 수복했으나(1119~1121), 페체네그인들이 도나우 강을 넘어 트라키아 지방을 침공하자 유럽지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들을 베로이아 전투에서 궤멸시키자[6] 곧바로 통상특권을 보장하는 조약[7]의 갱신을 강요하는 베네치아의 위협에 직면하였는데(1122년), 요안니스는 조약 갱신을 거절하였으나 4년의 전쟁끝에 결국 베네치아의 해군력에 굴복하였다.[8] 1128년에는 황후의 친정인 헝가리로부터 침략을 받았으나 하람 전투에서 격퇴해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재위 10년을 소비하게 되었다. 수복해야할 영토는 산더미 같은데도...
5 재위 중반, 치세의 절정
서방이 다시 안정되자 황제는 다시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룸 술탄국이 몰락하고 다니슈멘드 왕조가 강성해지고 있었는데, 다니슈멘드 왕조는 1130년에 안티오키아를 제압하고 안티오키아의 공작인 보에몽 2세[9]의 목을 은상자에 담아 칼리프에게 보낼 정도가 되었다. 요안니스는 1130년부터 원정에 나서 1135년까지 다니슈멘드와 다섯 차례 이상의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대체로 승리로 끝나 파플라고니아, 강그라 등의 아나톨리아 중부를 수복하였고 1133년에는 황제가 직접 참가하는 개선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 정도가 되었다. 더군다나 1134년 다니슈멘드에서는 수장인 가지 아미르가 죽게되어 혼란이 일어났고 1136년에는 시칠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모략이 성공하여 제국의 후방은 다시금 안정되었다.
1137년 황제는 염원하던 안티오키아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킬리키아[10]의 레오 1세는 요안니스의 대군에 대항하지 못하여 산악 지대로 숨어 들어갔고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 또한 마찬가지여서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 목표를 달성한 요안니스는 킬리키아에서 레오 1세의 잔당을 소탕하고 의기양양하게 수도로 귀환했다. 이 시기 제국의 경제는 호황이었고, 외교 관계는 원만했으며, 또한 서방으로부터 위협도 없었고 동방의 영토는 소아시아 해안 일대와 아나톨리아 내륙 중부에 이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굴러가는 듯 했다.
6 재위 후반, 좌절과 죽음
1138년 요안니스는 명목상 제국의 신하가 된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에게 안티오키아 대신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다시 원정에 나섰다. 목표로 한 곳은 알레포 등의 북시리아 였는데, 이곳은 이슬람 군주 사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장기의 영토였다. 안티오키아의 항복 이후 자신이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한 장기에 의해 알레포 일대는 잘 수비되고 있었고 결국 그중에 선택 된 작은 요새인 사이자르 공방전마저 레몽과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의 태업속에 질질 끌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장기가 요청한 이슬람 원군들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모험을 할 수 없었던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만 취하고는 물러나야 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지 못했기에 레몽을 안티오키아에서 몰아내지 못한채로.
요안니스는 다시 동방원정을 바랐으나 주변 상황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에미르 가지의 후계자인 말리크 모하메드 가지(Melik Mehmed Gazi)가 새로이 부상하여 트레비존드 공작이 일으킨 반란과 연대를 꾀했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죽는 등 악재가 겹쳤고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1143년 최후의 원정에 나섰으나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길목인 킬리키아에서 사냥을 하던 중 화살에 맞게 되었고 패혈증으로 악화 된 상처는 요안니스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삼남 이사키오스 대신 진중에 있던 막내 마누일을 후계자로 지목한 황제는 곧 사망하였다.
7 여담
재위내내 황궁의 분위기는 검소하고 경건하였으며 보수적이었다고 한다.[11] 8남매나 봤으면서 황제가 되고 난 이후에는 자식을 한명도 못 본점이나, 말년까지 영토수복의지를 불태웠던 것 까지 보면 숨막히게 성실한 사람이었던 듯(...). 덕분에 안정적인 기반을 물려받은 마누일은 편했을 것이다.다만 마누일이 바람도 피우고 서방 문화를 받아들이고 앞장서서 전공을 쌓는 등 화려한(...) 행보를 이어간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 ↑ 재위 초반의 이코니온 공략과 이탈리아 원정의 실패, 그리고 미리오케팔론 전투로 대표되는 동방십자군.
- ↑ 야전이 아닌 베네치아와의 해전이나 사이자르 공방전 정도를 제외하면 1140년의 네오케사리아(Neo Caesarea) 전투 정도만이 예외가 된다.
- ↑ 개명전의 이름은 피로스카이며, 아르파드 왕조의 라디슬라우(라즐로) 1세의 딸이다. 유년기에 부모를 잃어 고아였으며 사후 정교회에서 시성되었다.
- ↑ 황후인 이리니는 두카스 가문의 여식이었는데, 아마 이리니를 비롯한 두카스 가문사람들은 전대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렉시오스에게 잠시 제위를 양보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알렉시오스가 황제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고, 족벌주의에 의해 콤니노스 가문의 힘이 강해진데다 황자인 요안니스를 보게 되자 점점 차기 제위가 위태로워 지게 되었고, 결정타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후 1094년 사망하자 이러한 구상은 무너지게 된다.
- ↑ 안나는 어린시절을 약혼자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시어머니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지냈다. 어렸을 때 부터 황후가 되리라 믿고 있던데다 머리도 비상한 그녀는 그 믿음이 친동생에 의해 깨어지고 친근했던 약혼자가 사망하자 아마 본래 자신의 것인 제위를 빼앗긴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이랬으니 모녀는 뭉치기 쉬웠으리라.
- ↑ 페체네그인들이 더이상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고 포로들은 제국 내부로 이주시킨 뒤에 군대로 편입했다.
- ↑ 알렉시오스 1세는 남이탈리아에서 쳐들어온 노르만인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베네치아로부터 해군력을 지원 받았는데, 대가로 통상특권을 부여하였다.
- ↑ 당시 제국 해군은 재건 중 이었기에 효과적인 대응을 못하였다. 그러나 해군 재건책은 이후 꽃을 피워 1171년에는 제국해군이 베네치아 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 ↑ 타란토의 보에몽으로도 불리우는 그 유명한 보에몽 1세의 아들이다.
- ↑ 아나톨리아 동남부에 있으며,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소(小) 아르메니아(Armenia Minor) 왕국이 들어서게 되는 지역.
- ↑ 친족들이나 관료들이 화려한 저택을 짓고 부를 과시하며 여기에 황제를 초대하면 황제가 사치에 대해 잔소리하는 것을 들어야했었다고 한다.
- ↑ 이는 과거 제국 중기 등장인물들의 외모묘사가 노르드-슬라브인들과 비슷하여 이들과의 혼혈이 있었다는 주장과 대조되는 이시기 아랍-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 사이의 혼혈이 많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 ↑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의 어원이다. 칼로얀의 본명은 이반이었고, 이반은 그리스어 요안니스의 키릴 문자식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