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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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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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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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모습. 그렇다 카더라
엉덩이턱을 가릴려고 수염을 길렀다 카더라
하드록 밴드 레드제플린보컬리스트 탬버리니스트[1].

로버트 플랜트, 신의 목소리를 가진 보컬리스트 - 오지 오스본

많은 하드록/헤비메탈 보컬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준 명 보컬리스트.

1 생애

1948년 8월 20일 영국의 웨스트 미들랜드에서 기술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에 나이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로버트 플랜트는 어려서부터 로큰롤에 푹 빠졌고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동네에서 엘비스 흉내를 제일 잘 내는 소년으로 꼽혔을 정도.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엘비스 노래를 커튼 뒤에 숨어서 들으며 커튼이 되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일찌감치 로큰롤 가수를 꿈꿨지만,학교 공부도 머리가 좋아 꽤 잘했던 편이었기에 아버지는 로버트 플랜트가 회계사가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 회계사 학교에 집어넣었지만 얼마 못견디고 뛰쳐나왔다. 따라서 그는 낮에는 도로 포장하는 일을 하고 저녁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밴드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와중, 버밍엄에 있던 지미 페이지는 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흡족해 해 '나와 함께 며칠 지내보자'동거라고 제의를 한다. 그렇게 해서 지미와 로버트는 며칠간의 생활 후 서로가 매우 잘맞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로버트 플랜트는 레드제플린의 보컬리스트가 된다.

2 가창력과 창법

헤비메탈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 그만큼 그를 추앙하는 뮤지션들은 무진장 많다. 대표적으로 오지 오스본. 역대 최고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를 논할 때 로버트 플랜트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미 페이지는 처음 로버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사람이 지금껏 무명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고음역대를 굵은 팔세토로 처리하는 높은 기교를 부리며 다듬어진 허스키 위에서 하이톤을 뽑아낸다. 또한 거대한 성량의 소유자여서 리즈시절엔 라이브 때 스피커를 찢어버린 일화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 4집까지의 창법을 일반적인 로버트의 목소리로 알고 있으나, 사실 로버트의 창법은 이후 몇 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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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인 현재에도 관리를 잘 하였기 때문에 수준급의 가창력을 유지하고 있다. 노년의 인상과는 전혀 매치가 불가능한 목소리는 덤이다. 흡연자에 음주까지 하는데도 이 정도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은 다 하면서도 관리는 엄청나게 하였다는 의미.간단하게 코로 노래하게 된 리암 갤러거를 보면 알 수 있다. 젊었을 적처럼 날카롭진 않지만 그동안 창법을 꽤나 바꿔오며 적응해냈기 때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액슬 로즈처럼 락밴드의 보컬들이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엄청 나빠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락 보컬리스트로서 얼마나 열심히 임하고 있을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플랜트의 진정한 전성기는 레드제플린 가입부터 1972년까지의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겨우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목소리에 한계가 온 것. 초창기에 사용하던 독창적이지만 무리가 많이 가는 테크닉과 매 공연마다 질러댄 무수한 높은 라(!) 이상의 고음들, 부족한 자기관리 그리고 이상징후를 무시한 지속적인 투어 강행이 합쳐지면서 5집 투어인 1973년부터 플랜트의 고음역은 현격하게 죽어버리고 만다. 당장 1973년 Black dog 라이브와 1971년 Black dog 라이브를 들어보면 창법도 다르지만 음역대의 차이가 꽤 크다. 이 영상을 보면 G5(3옥타브 솔)[2]이상의 고음만 40개...

이후로 창법을 변경하면서 고음역 회복을 줄기차게 꾀하였으나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물론 그래도 워낙 기본이 엄청난 보컬리스트라 제 몫은 해냈지만, 커리어 중반이었던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 같은 공연에서는 거의 노래를 소화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감을 되찾은 플랜트는 90년대 중반의 페이지&플랜트 투어들에서 전성기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로 돌아왔다.

창법과 스타일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 소니 보이 윌리엄슨, 하울링 울프, 재니스 조플린, 스티브 매리엇(스몰 페이시스), 로저 달트리(더 후) 등의 보컬리스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리스트인 스티브 매리엇의 열렬한 팬이어서 무대뒤, 대기실 등에까지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자연히 창법에 있어서도 스티브 매리엇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발표한 이 곡을 들어보면 로버트 플랜트가 매리엇의 창법 스타일을 얼마나 많이 벤치마킹했는지를 알 수 있다.[3]
진성 음역대는 C#2(0옥타브 도#)~B5(3옥타브 시), 가성은 A#6(4옥타브 라#)까지이다.

3 여담

  • 매우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74년 5월에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와 존 본햄은 어릴적부터의 우상이자 오랜 팬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직접 보러 당시 엘비스의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연을 관람한 뒤에 호텔을 방문하여 엘비스를 만난적이 있었다. 당시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잠깐만 시간을 내주려 했으나, 로버트의 재치있는 입담에 푹 빠져서 결국 2시간 동안이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계속 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때 엘비스의 매니저는 그들이 있는 방 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잠그면서까지 대화를 계속했다고..
엘비스와의 만남 에피소드를 추가하자면, 엘비스는 레드 제플린이 인기 밴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플린의 음악보다는 당시에 제플린에 관해 매스컴에 많이 나오던 가십성 소문들에 대해 관심있어 했는데, 특히 순회공연 때마다 수많은 그루피족과 질펀하게 어울린다는 소문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한다. 가정이 있는 기혼자였던 플랜트로서는 답변하기가 곤란한 처지였는데, 다음과 같은 재치있는 답변으로 잘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건 소문일 뿐이고 우리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린 호텔에 머물 때 딴 짓 안 하고 오직 당신의 노래를 부르면서 휴식시간을 보내는게 유일한 즐거움입니다."(일동 웃음). 곤란한 질문도 서로 기분 좋게 넘어가게 하는 플랜트의 재치있는 언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플랜트의 장기였던 엘비스 흉내 모창을 보여줬는데, 특히 엘비스의 ‘Love Me’를 부를 때 노래나 표정이나 워낙 비슷하게 흉내내서 엘비스를 포함한 모두가 폭소를 터트렸다고 한다.
  • 스무살이란 어린 나이에 모린이란 여성과 결혼했으나, 당대의 많은 록스타들이 그러하듯 결혼생활 내내 여러 그루피 등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심지어 아내 모린의 여동생 즉 처제와도 관계를 맺어서 플랜트와 처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4] 몇년 전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Band Of Joy 활동을 같이 하기도 한 가수 Patty Griffin과 교제중이었으나 2014년에 결별했다고 밝혔다.
  • 창법 때문일진 몰라도 노래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많이 야한 편이다. 또 무대에서 성적매력을 과시한다며 설쳐대서 레드제플린 무명시절엔 안티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당시 레드제플린의 노래를 듣던 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오시면 소리를 줄였다고 한다.(...)
  • 1977년에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인 카락 플랜트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로버트 플랜트는 이 당시 투어 도중이라 아들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이 슬픔을 토대로 만든 노래가 In Through the Out Door 앨범에 수록된 All My Love이다.
  • 서구에서 플라워 무브먼트가 한창이던 1967년에 로버트 플랜트 역시 히피즘에 도취되어 있었다.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의 웬즈베리 법원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마리화나 합법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일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 지미 페이지와는 매우 사랑하는 각별한 사이다. 서양에선 실제로 둘의 친분에 착안하여 브로맨스를 만끽하는 여성팬들이 적지 않다 카더라. 이 둘의 끈끈한 우정은 록계 최고라고 회자될 정도이다. 둘이서만 별장으로 여행을 가서 지미 페이지가 리프를 만들고, 로버트가 가사를 붙이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둘의 사이가 친밀했다는 증거.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의 역할이 반주자로만 되어가는 것에 불만을 느낀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가 활동 후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다.
  • 헤어스타일에 애착이 강하다. 오죽하면 외모나 노래실력에 대한 칭찬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더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을정도. 아무튼 애착을 갖고 신경써서 관리했던 덕분인지 그 풍성한 금빛 머리의 효과까지 더해져 20대 리즈시절 무대 위 그의 모습은 여심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그 당시 별명도 황금빛 신(The Golden God)이었던데다 키도 185cm의 장신. 금삐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배 나온 할아버지
  1. 라이브에서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솔로 때 가끔 탬버린을 치곤 했었다.
  2. 소찬휘의 tears, 스틸하트의 she's gone의 최고음과 같다.
  3. 이 곡은 윌리 딕슨이 작곡하고 머디 워터스가 1962년에 녹음해서 발표한 'You Need Love'란 곡을 스몰 페이시스가 1966년에 커버한 곡이다. 이 스몰 페이시스의 커버 버전과 머디 워터스의 원곡을 레드 제플린이 짜깁기 한 뒤 편곡해서 녹음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Whole Lotta Love'다.
  4. 그렇게 태어난 아들과 본처와의 아들은 서로 외사촌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한 셈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