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1843년 12월 11일 ~ 1910년 5월 27일
1 소개
독일의 세균학자. 무서운 전염병을 3개나 발견한 박사로 알려졌다.
1876년에 역사상 최초로 예방이 가능한 박테리아성 질병인 '탄저병'을, 1882년엔 '폐결핵'균을 발견했으며 1885년엔 위장병의 일종인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결핵의 경우 1890년에 연구의 성과로 '투베르쿨린 반응요법'을 창제했다. 본래 결핵 치료를 목적으로 결핵균에서 추출한 글리세린을 투약하는 것이었으나 결핵 치료의 효과는 없었고, 대신 피부 반응을 통한 결핵 진단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져 이후 전세계적으로 결핵 진단을 위해 사용된다. 코흐는 결핵을 발견한 것만이 아니라, 결핵균이 병의 원인임을 증명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술.
또한 '아프리카 재귀열'의 전염경로를 동아프리카에서 찾아냈으며 체체파리라는 곤충에 물려서 생기는 병인 '수면병'의 연구보고서와 치료법도 밝혀냈다.
파스퇴르 이후 등장한 세균 감염설[1]을 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위생학의 선구자이자 체질설[2]을 주장하던 독일의 위생학자 막스 폰 페텐코퍼와 대립하였다. 1883년 코흐가 인도의 캘커타에서 비브리오균이 콜레라의 원인균이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나, 이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페텐코퍼는 1892년 10월 콜레라 환자의 설사에서 찾아낸 세균들을 한데 모아 먹기도 했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증명하고자 마셨다. 그런데 페텐코퍼는 약간의 설사증만 보였을 뿐 멀쩡했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신이 난 그는 세균과 콜레라는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며 돌아다녔다. 당시 페텐코퍼가 실험을 조작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페텐코퍼가 멀쩡한 이유에 대해선 몇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중에는 페텐코퍼의 위장이 콜레라 원인균을 분해할 정도로 튼튼해서(...) 감염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페텐코퍼가 목숨을 건 행동을 한 이유는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이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위생 상태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에야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맞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예민한 정치적 문제였다. 천민자본주의가 극에 달했던 19세기 말, 자본가들은 ‘세균병인설’을 적극 환영했다.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맞게 활용하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각종 질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 반면 반대쪽에서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세균 감염설이 맞기는 하지만 그 기저 원인에는 환경이 있다는, 결국 둘다 맞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05년, 결핵균 발견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고 5년 뒤인 1910년에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2 코흐의 공리
코흐가 결핵을 발견하면서 찾아낸, 어떤 질환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간의 관계를 확립시키기 위한 4가지의 간단한 기준을 일컫는다.
- 1. 환자에게서 병원균을 분리한다. (환자에게 병원균이 있어야 하며, 건강한 개체에서는 검출되지 않아야 한다.)
- 2. 실험실에서 그 세균을 배양한다.
- 3. 배양한 그 세균을 실험동물에 넣어주면 같은 병에 걸린다.
- 4. 3의 병에 걸린 동물에게서 다시 병원균을 분리한다. (같은 균이 발견되어야 한다.)
코흐의 공리는 세균이 병의 원인임을 증명하는 과학적 방법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미생물학의 발전에 따라, 코흐의 공리로 증명할 수 없는 감염의 존재도 밝혀졌다.
-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성 미생물이 반드시 실험 동물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3과 어긋남)
- 자궁경부암의 인유두종 바이러스처럼 반드시 모든 임상예에서 병원체가 검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1과 어긋남)
- 기회감염[3]처럼 그 미생물이 존재하더라도 반드시 발병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