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조던 개틀링

파일:리처드 조던 개틀링.jpg

Richard Jordan Gatling
1818.09.12 - 1906.02.26

미국의 발명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30대에 세인트루이스로 이사 잡화점을 하던 중 발명에 흥미를 느껴 연구끝에 이앙기(볍씨나 밀의 씨를 심는 기계)를 발명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발명을 하던 도중, 천연두에 관심이 생겨서 의대에 입학하여 40대에 의사가 된다. 막상 의사가 되고 나서 평생동안 진료는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직업이라 의학 관련 도구도 많이 발명했다고 하며, 상기했듯 농업용 기기 개발로 발명 인생을 시작한지라 농업용 기기 발명도 계속 행하여 증기 트랙터도 발명해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발명한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아래의 개틀링건. 하도 유명한 나머지 이제는 이 '개틀링'이라는 단어는 그 본인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화기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더 잘 쓰인다. 아예 개틀링이 사람 이름인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정작 본직은 의사에다 본인의 발명품들 중 무기는 이것밖에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의 극치.

생각해보면 굉장히 뜬금없다고 볼 수있는게, 이 사람이 발명한 물건들은 상기한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갑자기 사람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의뢰가 들어와서 그런것도 아닌 자발적으로! 하지만 이걸 만든 이유를 알고 나면 어째서 이런 무기를 만들었는지를 납득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였다.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죽자 심각한 실의에 빠진 그는 갑자기 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개틀링건을 개발하는데, 그 목적은 "이게 있으면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소총수 수십명 분의 몫을 할테니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겠지!"라는 의도로 개발한 것이었다. 나아가서는 그 압도적인 화력에 국가들이 대량의 희생자를 우려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해서 아래 편지에 자세히 나와있다.

개틀링의 옆집에는 새뮤얼 콜트의 미망인이 살고 있었고 콜트 사는 여전히 개틀링 건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있었죠.

이런 덕분인지 콜트 부인의 질녀인 엘리자베스 자비스(Elizabeth Jarvis)가 이웃집인 개틀링 가를 방문했을 때, 왜 개틀링이 총을 만들었는가에 대해 설명을 듣게 됐답니다.

'친애하는 자비스 양에게.

내 이름을 딴 총을 발명한 것에 대한 너의 흥미에 답하마.
1861년, 전쟁이 시작될 때(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 중일 때란다.) 나는 거의 매일 전선으로 출발하는 부대와 부상당했고 죽은 자들이 귀환하는걸 목격했었지.
나중에 그들 대부분이 전투가 아닌 질병과 각종 사고에 목숨을 잃었다는걸 알게 됐지.
이 일로 인해 나는 기계, 그러니 빠르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어 1명이 100명처럼 싸울 수 있게 하려 했어.
이러면 대군의 필요성이 줄어들거고 그 결과 전투를 해야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거지.
그래서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개틀링 건을 발명했단다.

1877년 6월 15일, 하트퍼드
R.J. 개틀링

이에 대해 그의 손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다 하죠.
'할아버지는 평화로운 감성을 가지셨고 내가 기억하기론 저 흉기를 만드신건 전쟁을 끔찍하게 만들어서 끝내버리기 위해서였지.'

출처

그러고보니 모 장군님도 전쟁이 잔혹할수록 더 빨리 끝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결과는... 이걸 받아든 미 육군은 "화력 끝내주네? 우왕ㅋ굳ㅋ" 하는 반응만 보였을 뿐이다. 게다가 얼마동안은 지휘관들이 라이플이나 개틀링을 비롯한 신개념 무기의 압도적인 위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19세기 라인배틀 시절의 구시대적 전술로 보병들을 잘 보호된 기관총 진지에 무작정 꼬라박닥돌시키고, 보병들은 기관총의 화력 앞에 녹아내리는 전투가 크림 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사람의 인식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 생긴 지체 현상인 셈이다. 덕분에 개틀링의 의도와는 달리, 거꾸로 기관총이 생기자 더 많은 인해전술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무모한 전술은 기관총의 위력이 실증된 뒤 산개 및 엄폐가 기본으로 자리잡으면서 사장되었으나, 그럼에도 기관총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체계였다.

그런데 이 의사양반는 이런 꼴을 보고 개틀링건의 위력이 약해서인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전기모터를 장착하여 1800년대에 분당 무려 3000발급 사격능력을 가진 발칸포의 전신격인 기관총[1]을 만들었지만 당시 부족한 배터리 기술등으로 인하여 미 육군에는 채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개념은 지금도 살아 있다.

개틀링이 의도했던 바원자폭탄까지 가서야 일부 실현됐지만, 그리 되기까지는 도시 2개가 지도에서 지워질 뻔 해야 했으며, 그 이후로도 인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전 세계를 수십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으니 절대로 다행인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발명품은 또 다른 피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희대의 아이러니다. 비슷한 논리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지만 결국은... 여하간 그의 이 발명품이 없었다면 전쟁이 오히려 덜 잔혹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틀링이 없었어도 비슷한 무기체계는 결국 개발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개틀링의 노력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였다. 1차대전에서 기관총으로 인해 그렇게 많은 피를 보고 난 이후에야 유럽 - 북미 사회에서 드디어 시민들이 '전쟁 = 나쁘고 잔혹한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그 전까진 일반 시민들은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는 현장에 가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기사도 비스무리한 구시대적 신념 탓에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특히나 잘해야 소총 갖고 싸우던 이전 시절의 전쟁만을 경험한 부모 세대들이 이런 자부심이 강하여 자식들을 어느 정도 전쟁으로 내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런 잔혹한 무기의 도입으로 피가 곳곳에 산처럼 쌓이게 되었고, 이런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그제서야 시민들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 게 되었고 각국은 그제서야 전쟁을 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때 남은 처분 못한 & 잘못 처분한 잔재들이 살아남아 결국 한번 더 대대적으로 터지게 되지만...

그리고 일선의 지휘관들 역시 기관총에 대판 깨지고 난 후에야 '야 이거 안되겠다'하고 깨닫게 되면서 각종 전술교범을 대대적으로 수정, 이전처럼 무식하게 기관총 화망을 향해 병력을 밀어넣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 기관총이 없어서 보병들이 소총만 가지고 싸웠다고 생각해보자. 지휘관들은 1차 대전 이후로도 계속해서 적을 전면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했을 것이고 그러면 보병들의 피해가 계속해서 더 누적되어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개틀링의 바람대로 그의 신무기의 도입으로 전쟁이 쨘! 하고 끝난것은 아니였다만, 그의 무기가 이후 사람들이 피를 덜 보는 쪽으로 움직이게 만든것은 사실이었다.

강력한 무기에 의한 평화라는 것은 일견 아이러니해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무기 덕분에 사람들은 전쟁을 드디어 두려워하게 되었다. 현대에 과거와 같은 국가 규모의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 것 역시 핵무기라는 강력한 무기가 쌍방의 완전한 파멸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누가 터트릴 지 모를 폭탄더미 위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러한 폭탄더미의 위력을 사람들 역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 간의 사소한 칼부림은 일어날 지언정, 과거처럼 세계를 홀랑 태워먹을 불장난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쨌건 그의 목적이 꼭 틀렸던 것만은 아니다. 단지 보다 많은사람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바램과 다르게 굉장히 많은 피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1. 총구 앞에 서서 1초간 눈을 감고 총을 맞은 뒤 눈을 뜨면 배때기에 50개의 바람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단 소리다! 눈을 뜨면 좀비다. 그렇게 맞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냐 그보다 그런 속도로 총탄을 두드려맞으면 좀비로라도 눈 뜰 몸은 남아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