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전쟁

2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샛별은 사푼 산의 산마루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깜박이던 별들은 서서히 하얘져 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 한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줏빛의 긴 구름이 엷은 야청빛 지평선을 따라 흩어져 달려갔다.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이, 생기에 찬 온누리에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며,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 이야기

1 개요

1853년부터 1856년까지 4년간 러시아 제국에 맞서 오스만 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피에몬테 4국 연합국간에 벌어진 전쟁. 전쟁 이름은 전쟁 중후반기 이후의 주전장인 크림 반도에서 따온 것으로, 크림 반도 이외에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877~78년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또 있기 때문에 상호 구분을 위해 제1차 동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뭔지는 몰라도 이름쯤은 한 번 들어봤을 전쟁.

크림전쟁
날짜
1853년 ~ 1856년
장소
크림 반도, 캄차카 반도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러시아 제국
불가리아 군단
지휘관나폴레옹 3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빅토리아 여왕
윌리엄 윌리엄스 경
압될메지트 1세
카밀로 카보우르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1]
병력프랑스군 40만명
영국군 25만명
오스만 제국군 30만명
사르데냐 왕국군 1만 8천명
총합 968,000명
러시아군 70만명
불가리아군 4천명
총합 704,000명
피해 규모50만명 이상 사망522,200명 사망
결과
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 연합군의 승리
기타
파리조약 체결


2 배경

근본적인 배경은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 확보 문제였다. 러시아는 1771년 크림 칸국을 정복한 이래 크림 반도를 거점삼아 흑해에서 세력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는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축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적대관계로 변했으며, 러시아는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제국 치하 동방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로스,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최대 주적으로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오스만 제국과 불평등한 통상협정을 맺어 오스만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오스만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조약을 체결,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로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0년대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속셈으로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자 러시아는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성지의 관할권을 요구하고 있었던 차에 프랑스의 요구 관철이 러시아의 지금까지의 요구와 정면으로 충돌, 때문에 프랑스는 슬라브 교회의 압력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게 된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은 해협 통제권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리즈시절의 위엄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왕자에서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누구도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 관철을 용납치 않았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이스탄불까지 코 앞인 터라, 러시아의 계속되는 남하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3 전개

기세등등하게 선전포고한 것은 좋았으나, 골골거리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나폴레옹을 꺾었다고 자부하며 한껏 기세등등한 러시아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11월 30일 벌어진 소아시아 반도의 항구 시노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러시아 해군에 참패, 투입한 12척의 함선 중 단 1척의 코르벳만이 살아남아 도망쳐야 했다. 뒤이어 캅카스 지역에서의 국지전에서도 오스만 육군은 러시아 육군에 참패, 후퇴해야 했다.

해가 바뀐 1854년, 시노페 해전으로 괴멸된 오스만 해군을 대신하여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흑해에 진입, 오스만 제국의 흑해 통상로를 보호해주기 시작했다.[2] 결국 양국은 3월 28일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러시아는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 3국 연합군 약 20만 대군이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이를 요격하려던 러시아군은 알마 강 전투에서 패했고, 10월 17일, 크림 반도의 핵심 전략요충지인 세바스토폴 요새가 연합군에 포위되었다. 포위된 요새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나 모두 연합군에게 격퇴되었으며, 오히려 연합군은 아조프 해 등에 위치한 러시아군의 다른 요새를 추가적으로 포위 공략하는 등의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1855년 1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훗날의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 열강의 지원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러시아에 선전포고,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약 1만의 병력을 파병했는데, 연합군 사이에서 비교적 유능한 군대로 평가받았다 이탈리아 군대 맞나. 사르데냐 군대라니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늠자였던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에 불리해졌다. 비록 그러는 동안 발라클라바 경기병대의 돌격같은 개뻘짓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연합군의 압도적 우세에 있었고, 마침내 9월 11일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되었다.

핵심거점인 크림 반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전세는 연합군에게 완전히 기울었다. 여기에 영국은 그 특유의 전방위적 공격을 단행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캄차카 반도의 요충지인 페트로파블로크스크 요새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아울러 발트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초로 영국 함대가 작전을 개시해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핀란드의 남부 해안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근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고, 인근 요새들은 포격에 무참히 박살났다. 러시아 함대는 대응은 커녕 제대로 요격조차 하지 못했다. 백해에서도 영국 함대가 출몰해 아르항겔스크 등을 포격했다. 자국령 주요 항만에 가해지는 영국의 전방위 공세에 러시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3]

1856년이 되자 러시아는 전쟁수행의지를 상실했다. 병력손실은 급격하게 늘어만 갔고, 국가 재정이 나빠졌으며 패전에 따른 민심이반도 심각했다. 연합군이 크림 반도를 넘어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밀고 올 가능성이 있었으며, 수도 일대의 해상물류는 영국 해군에 의해 마비되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공개적으로 참전 위협을 했고, 프로이센과 스웨덴도 이에 동조할 조짐을 보이자 더 이상의 전쟁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3월 30일,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났다.


4 결과

인명피해가 유달리 큰 전쟁이었는데, 러시아만 해도 최소 14만에서 최대 5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이 10만~17만, 프랑스가 10만, 영국이 2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의 차이는 병력투입 수준에 비례하는 편으로 사상률은 전반적으로 비슷했으나 질병에 의한 사망자 수는 나이팅 게일이 활약한 영국이 1만 6천 정도였던 반면 프랑스는 최대 6만에 달하는 차이를 보여줬다.

이런 대규모 인명피해로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유럽이 겪은 최근의 전쟁 중 이 정도 인명피해를 낸 것은 나폴레옹 전쟁뿐인데, 이는 전쟁지역이나 참전국가 및 병력면에서 크림 전쟁과 수준이 달랐다. 그러나 당시 유럽 지도자들은 이를 전염병 때문으로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갔다.[4] 물론 크림 열병 등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상당히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크림 전쟁부터 전쟁 중 사상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파리 강화조약으로 러시아는 엄청난 양보를 해야 했다. 국경은 전쟁 발발 이전으로 복귀당했으며, 흑해에 함대를 둘 수 없었다. 몰도바 및 왈라키아[5]에 대해 영유권을 영구히 포기해야 했고, 이들 지역은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만에 형식상 예속된 자치령이 되었다. 여기에 러시아는 도나우 강 유역의 자유통행권도 인접국에게 내줘야 했다.[6]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권리도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 패배가 러시아에게선 큰 충격이었다. 니콜라이 1세도 패전으로 인해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져살다가 사망했다.

그나마 러시아는 이후 역시 여러 문제로 시달리던 청나라를 압박하여 1860년 연해주를 비롯한 300만 평방 킬로미터가 넘는 엄청난 땅을 손에 넣고 동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함으로서 크림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이후 패전 원인을 분석하며 근본적으로 국가체제 및 사회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대대적인 개혁정치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농노 해방령. 그러나 러시아의 개혁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주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의 저항도 거세었다. 무엇보다 황제들이 개혁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7]

오스만 제국은 승리에 도움을 준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 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 강화 및 권리증진을 약속했고 그 외에 갖가지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연합국 없이 단독으로 싸운 전투는 모조리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며 3류에 가까운 2류국임을 재확인시켰다. 이후 오스만은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5 영향

그러나 러시아로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러시아 편을 들어주는 나라가 없었다. 1849년 혁명 당시 대군을 투입해 내란 진압을 도와주었던 나라인 오스트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러시아의 도나우 강 연안 점령을 발칸 반도에서의 자국 기득권 침해로 생각하고 강력하게 반발하여 참전의사까지 보였던 것. 러시아는 전면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포기함으로서 간신히 무마시켰다. 결국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점령했다.[8]

여기에 프로이센 왕국도 러시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1850년 올뮈츠 협약에서 자국에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내심으로는 러시아의 패배를 원했다.

그래서 크림 전쟁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프로이센으로 평가받는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막대한 전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었고, 훗날 독일 통일 과정에서 이 중립을 고수한 덕분에 러시아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점도 프로이센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부올 백작 Count Karl Ferdinand von Buol 이 중립을 깨고 프랑스를 편들어 줘야지만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지역의 영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불연합군이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차르에 대해 최후통첩하면서, 러시아가 몰바디아(몰도바)와 왈라키아로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정작 이건 자충수였고, 프랑스는 왈라키아를 인정하지 않는 건 물론 이후 카우보르의 샤르데냐 왕국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지방 영토를 모두 빼앗는데 공헌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오스트리아가 스스로 빈 체제신성동맹을 깨뜨렸고, 이탈리아 왕국과 독일 제국의 탄생의 산파(;;)가 되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또 하나의 승자는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1848~49년의 혁명 기간 중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분투했지만 오스트리아군에 패배하여 국왕이 퇴위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는 다른 열강을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자국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참전했던 것이다.

샤르데냐는 파리 강화조약에서 당장 눈에 띄는 이익을 얻어내지는 못 했지만, 재상 카보우르의 예측대로 사르데냐의 이런 행보는 훗날 이탈리아 통일과정에서 각국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엔 특히 영국이 사르데냐의 참전을 환영했다. 크림 반도에 투입된 자국 병력이 프랑스군보다 적었던지라, 동방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는 프랑스에 대한 쓸모 있는 견제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1859~60년의 이탈리아 통일 때는 영국은 중립을 지킨 반면, 프랑스는 사르데냐 편으로 적극개입했다. 본격 현실 정치의 제전 사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삽질도 한몫했지만.


6 여담

  • 이 전쟁은 러시아, 연합군 할 것 없이 무능한 지휘관들이 넘친 전쟁으로 악명이 높다. 영국 언론은 이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을 올빼미로 묘사하며 머리가 텅텅 비었다고 조롱했다.[9]
  • 발라클라바 전투는 전장에서의 의사 소통 및 명령 체계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대표적 사례로 이후 전쟁사 및 부대 지휘 체계 교육에 꼬박꼬박 등장하게 된다. 이 전투는 또한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전쟁 중 추위를 견디기 위해 방한의류인 발라클라바가 발명되었다.
  • 전쟁 중과 그 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부각되었다. 나이팅게일은 야전 병원 및 군의료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전 야전 병원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게 병원이냐 화장실이냐? 할 정도였는데, 나이팅게일의 개혁으로 근대적인 야전 병원 체계가 구축되었다.
  • 미국 장군 조지 매클렐런은 관전무관으로 참가했다. 이 때는 매클렐런이 엄청 유능하게 느껴질 때라...
  • 이 전쟁에 참전한 사람 중 영국의 장군이자 제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드넬]은 평소에 단추 달린 스웨터를 즐겨 입었는데, 이것이 가디건의 유래다.
  • 전쟁이 터지기 20여 년 전에 독립한 그리스는 오스만에 대한 적대감 및 아직 오스만령인 그리스 영토 회복을 위해 친러시아 정책을 펼치며 나서려 했으나 자국의 독립을 도와준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배.
  • 역사상 최초로 사진이 촬영된 전쟁이다. 다만 사진 기술이 좋지 못해서 사진 1장을 찍을려면 20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해서 움직이는 전투 동작 같은것은 찍을 수 없었고 전투전의 군복을 착용한 병사들이나, 전투가 끝난 후 현장을 찍은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나먼 고국에서 전쟁을 접하는 이들로 여금 전쟁을 실감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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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전장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담은 영국군 선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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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군 보병대

  • 세계 최초로 종군 기자가 활약한 전쟁이기도 하다.윌리엄 하워드 러셀(1820~1907)이란 영국 기자가 바로 그 인물로 나이팅게일도 그의 취재로 알려지게 된다.
  • 버윅-어폰-트위드[#][10]라는 마을이 크림 전쟁의 종전협정 서명에서 누락된 관계로 이 마을이 100여년간 러시아 및 그 후신인 소련과 계속 전쟁을 벌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마을 하나정도야 누락되어도 상관없지 않나 싶겠지만 이 마을은 브리튼 섬 역사상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사이에서 몇번이나 그 주인이 바뀌었고, 그때문에 두 나라가 연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을때 버윅 시는 상징적으로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치시로 인정받았다. 이때문에 영국 국왕은 관습적으로 외교 문서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더불어 버윅의 군주임을 명시했는데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이 크림 전쟁 선전 포고에 서명할때 "빅토리아, 대 브리튼, 아일랜드, 버윅과 모든 브리튼 세력권의 국왕"이라고 하였다. 정작 종전 협정에서는 버윅을 빼먹고 "빅토리아, 대 브리튼, 아일랜드와 모든 브리튼 세력권의 국왕"이라고 적어넣어 버윅 시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는 소련이 등장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언론사 등지에서 이 사실이 알려졌고 당시 버윅의 녹스 시장이 소련의 관리를 초대하여 1966년 버윅-어폰-트위드 시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간의 종전 협정을 주도했고, 영국 촌동네와 소련간의 전쟁은 그렇게 끝나 이를 기념하는 크림 전쟁 리인액트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지만 이 이야기는 상당한 영국식 과장이다. 1970년대에 BBC에서 다시 확인한 결과 사실 버윅 시를 외교 공문에 포함시키는 관습은 1746년부터 아무도 쓰지 않는 관습이 되었고 이 해에 '웨일즈 및 버윅 법'이 통과되어 법해석상 버윅 시는 잉글랜드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 게다가 사실 선전 포고 때조차 버윅 시는 서명에 빠져있었다. 소련 사람을 초대한 건 맞지만, 사실 관리가 아니라 프라우다 기자를 초청한 것이었다. 그래도 녹스 시장은 기자에게 "러시아 사람들에게 더 이상 버윅과의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신문에 써달라"는 말을 남겼다.. 전형적인 영국식 블랙 코미디. [보충글]
  • UMA 중 유명한 모스맨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 것이 이 전쟁 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관련 포스트]
  1. 둘이 같이 출전한 것은 아니고 니콜라이 1세의 자리를 알렉산드르 2세가 물려받았다.
  2. 본격 최후의 기독교-이슬람 공동투쟁의 시작.
  3. 이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전쟁수행에서의 특징이자 주특기였다. 7년 전쟁 때도 영국은 스페인을 상대로 쿠바, 필리핀, 우루과이, 포르투갈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였다. 당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해군 전력도 부족한데다가 이를 분산시켜야 했으니 속수무책. 제해권을 쥔 나라만이 가능한 전략이었다.
  4. 실제 전투에 의한 사망자보다 전염병 사망자가 훨씬 많았던건 사실이다. 괜히 나이팅게일이 부각된게 아니다.
  5. 루마니아 지역
  6. 말이 인접국이지, 사실상 오스트리아를 배려한 조항.
  7. 개혁군주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2세도 농노해방령 외에는 뚜렷한 개혁조치가 보이지 않으며, 의외로 해방령 자체도 농민들의 현실개선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토지의 소유주인 귀족을 상대로 한 토지 취득과 농지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 지원이 절대적이었지만 재정이 빈곤한 러시아 정부가 열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 결국 농민들의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이 상태에서 제2차 동방전쟁에서 얻은 승리마저 비스마르크의 농락으로 수포로 돌아가면서 정부의 무능에 대한 러시아 지식층의 불만과 불신이 팽배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자생적인 반체제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훗날 알렉산드로 2세도 무정부주의자의 폭탄테러로 사망한다.
  8. 다만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군사적 공백지나 다름없게 된 땅을 집어먹은 것이라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 지역은 프랑스의 후원으로 1862년 루마니아가 성립된다.
  9. 그나마 낫다고 평가받은 건 프랑스군이었다.
  10. 발음이 어려워서 세간에는 베어윅, 버윅, 베릭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