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chancha[1]
이름 | 마누엘 세오아네 (Manuel Seoane) |
생년월일[2] | 1902년 3월 19일 |
사망년월일 | 1975년 8월 21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피녜이로 |
포지션 | 스트라이커, 인사이드-레프트 |
신체조건 | 160cm / 80kg |
등번호 | -[3] |
소속팀 | CA 인데펜디엔테 (1921-1923) 클루브 엘 포르베니르 (1923-1924) CA 인데펜디엔테 (1924) 클루브 엘 포르베니르 (1925) CA 인데펜디엔테 (1926-1933) |
국가대표 | 20경기 / 14골 (1921-1929) |
감독 | 아르헨티나 (1934-1937)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펠리페 파스쿠치 (1934) | → | 마누엘 세오아네 (1934~1937) | → | 앙헬 페르난데스 로카 (1937~1939) |
1 생애
1.1 클럽
마누엘 세오아네의 아버지는 스페인 출신의 이민자였고 주조 공장에서 일을 했다 한다.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세오아네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유리그릇 공장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세오아네는 어린 시절 아베야네다 근처의 오아코 늪에서 축구를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4] 그리고 그는 15살의 나이에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인데펜디엔테에서 근무하던 레오폴도 산티아고 가르시아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로 그를 관찰하였고 1920년에 그를 팀에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유스와의 친선경기였던 데뷔전에서는 해트 트릭을 터뜨리며 가능성을 보였다. 이로 인해 당시 회장이었던 카나베리는 세오아네를 크게 아끼게 되었고 이듬해 3월에 공식적인 데뷔 경기를 치르며 계약도 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는 1921 시즌의 두 번째 경기인 로스 로호스와의 경기에 데뷔하였고 다음 경기인 라누스 전에서 첫 골도 신고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첫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40경기에 출전 55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11월 11일, 심판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로 팀 동료 론소니, 로페스, 페로와 함께 퇴출당했고 1년간 리그 출장에 제동이 걸렸다. 팀은 그를 위해 엘 포르베니르 클럽에 보내 실전 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한편 군대 문제도 해결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그는 세사레오 온사리와 포워드 라인을 이루며 활약했고 이듬해에 돌아왔지만 그는 그 시즌에서는 단 한 경기밖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25년, CA 보카 주니어스의 유럽 투어에서 돌아온 세오아네는 라이문도 오르시,[5] 솔리오 카나베리, 알베르토 라린, 루이스 라바스치노 등과 함께 인데펜디엔테의 공격을 이끌었고 이 당시의 활약으로 호송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팬들은 당연히 그의 활약에 찬사를 보냈고 라이벌 팀의 팬들조차 그의 활약을 인정하였다.
1931년에 프로 출범한 아르헨티나 리그에서도 그는 여전히 강력했다. 세오아네의 활약 덕분에 1932년에 CA 리버 플레이트를 꺾고 우승할 수 있었다. 1933년 10월 8일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1934년에는 인데펜디엔테에서 그를 위해 자선 경기를 열었다. 그는 그 돈을 이용해 집을 사는데 썼다.
1.2 국가대표
세오아네는 20경기에 출전해 총 14골을 기록하였다.[6] 월드컵 이전에 은퇴하여 월드컵 기록은 없지만 코파 아메리카에는 총 4차례 출전하여 3번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세오아네는 코파 아메리카에 1924년 대회부터 참여하였고 이 대회에서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대회에서부터는 20년대 코파 아메리카 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날렸다.
1.3 은퇴 이후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한 세오아네는 193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그가 일했던 공장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한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세오아네는 키가 작았지만 헤딩 스킬이 좋았는데 그로 인해 키에 비해 헤딩골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또한 체형 때문에 다소 느린 스피드를 보완하기 위해 다음 플레이를 예측하는 지능적인 축구를 구사하였다. 그로 인해 공격진의 어느 포지션에서든 활동할 수 있었다. 기술이 빼어나기는 했지만 완벽하다는 평가까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좋은 패스 센스와 양발을 무기로 한 강력하고 정확한 슈팅을 갖고 있어서 상술한 예측력을 통한 골 감각이 좋은 스트라이커라는 평이 있다.
3 뒷 이야기
- 1922년에 세운 55골 기록은 아직도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이다.
- 1925년에는 CA 보카 주니어스 소속으로 유럽 투어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보카 팀 내 최다 득점자였다.
- 1931년 칠레에서의 투어에서 그는 더운 날씨와 먼지 구름으로 인해 경기 도중 실신하였다. 숙소에 돌아와서 바닥에 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오렌지 주스라 믿고 한 통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너였고 덕분에 이틀간 중태에 빠지기도 했다.
4 수상
4.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22, 1926(이상 CA 인데펜디엔테)
- 코파 콤페텐시아 우승 1회: 1926(CA 인데펜디엔테)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23, 1932(이상 CA 인데펜디엔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