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라이문도 비비아니 오르시 (Raimundo Bibiani Orsi) |
생년월일 | 1901년 12월 2일 |
사망년월일 | 1986년 4월 6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이탈리아 |
출신지 | 아베야네다[1]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스트라이커 |
신체조건 | 168cm / 68kg |
등번호 | -[2] |
소속팀[3] | CA 인데펜디엔테(1920~1928) 유벤투스 FC(1928~1935) CA 인데펜디엔테(1935) 보카 후니오르스(1936) CA 플라텐세(1937~1938) 클럽 알마그로(1939~1940) CR 플라멩구(1940) CA 페냐롤(1941~1942) |
국가대표 | 12경기 / 3골(아르헨티나 / 1924~1928) 35경기 / 13골(이탈리아 / 1929~1935) 1경기 / 0골(아르헨티나 / 1936) |
1 개략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기적의 주인공. 별명은 무모(Mumo 또는 Mummo)
2 초기 선수생활
오르시의 첫 클럽은 아르헨티나의 CA 인데펜디엔테였다. 인디펜디엔테에서의 오르시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에도 인디펜디엔테는 소속 리그의 우승을 3회 차지하는 강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오르시 역시 알비셀레스테[4]의 일원이 되면서 그의 기술적이고 빠른 면모를 발휘했다.
1927년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출전해 조국에 우승을 안긴 그는 뒤이어 열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도 출전했지만 여기서는 우루과이에게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올림픽에서의 활약에 꽂힌 클럽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유벤투스 FC. 유벤투스는 1926년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한 이후 새로운 선수들을 끌어모으고 있었고, 오르시를 포함하여 같은 해에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도 데려옴으로써 전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오르시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었지만 아르헨티나에 흔한 오리운디[5]였고 이탈리아에서 뛰는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던 관계로 유럽에 가는데만 2주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그로 인해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자리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3 유벤투스 FC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오르시에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1년의 시간을 날려먹었다. 다음해인 1929년 시즌에서야 제대로 이탈리아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그의 기술은 어디가지 않았다. 곧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선발되었고, 자신의 제대로 된 첫 시즌에서 큰 활약을 펼쳐 소속팀을 3위에 올려놓았다.
유벤투스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의 도살자 루이스 몬티까지 데려왔고 막 창설된 세리에 A에서 5연패라는 성적을 거두어 맹주로 군림하게된다.
1930~31 시즌에는 33경기에서 20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유벤투스의 팀 내 득점왕이 되었다.
4 1934년 월드컵
1930년에는 이탈리아가 월드컵에 나가지 않았고, 이탈리아에 있던 그 역시 아르헨티나에까지 가서 월드컵에 참가할 형편이 아니었던지라 1930년 월드컵의 소식을 멀리서 듣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게다가 다음 월드컵에는 36세가 되는 오르시의 나이를 감안해서라도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는 오르시의 각오는 남달랐다. 하지만 1933년에 당한 다리의 골절로 인해 오르시는 월드컵 출전을 말아먹을 뻔했지만 결국 재활에 성공하여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오르시도 포초 감독의 지도 아래 5경기에 모두 출전한 5명의 선수였지만 그의 가장 큰 활약은 단연 결승전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면서 이탈리아는 팀의 핵심인 주세페 메아차가 부상을 입은데다가 푸치에게 후반 26분에 선제골을 얻어맞고 끌려가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물론이고, 흥분한 이탈리아 관중들은 선수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무솔리니에게서 무슨 일이 직접 일어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흥분한 이탈리아 관중들에 의해 선수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시의 왼발이 이탈리아를 구했다.
구아이타의 크로스를 받은 오르시는 골대를 등진 채로 오른발로 공을 받았고 골대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로 왼발로 터닝슈팅을 날렸다. 오르시의 발을 떠난 공은 절묘하게 왼쪽으로 휘어들어갔고 당대 최고의 골키퍼였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골키퍼 프란티세크 플라니츠카는 급히 왼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공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면서 그대로 동점골이 되었다.[6]
이후 이탈리아는 메아차의 어시스트를 받은 스키아비오의 연장전 결승골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고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5 이후
1935년까지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오르시는 다시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친정팀 인디펜디엔테에서 다시 뛰다 이후에는 브라질의 CR 플라멩구, 우루과이의 CA 페냐롤 등에서도 뛰다 42세에 칠레의 산티아고 나시오날에서 은퇴했다.
6 수상
6.1 클럽
리그 우승 9회: 1922, 1924, 1925(이상 인디펜디엔테-아르헨티나 아마테우르스 리그[7]), 1930~31, 1931~32, 1932~33, 1933~34, 1934~35(이상 유벤투스-세리에 A), 1939(플라멩구-히우 주 챔피언쉽)
6.2 국가대표
월드컵 우승 1회: 1934
올림픽 준우승 1회: 1928- ↑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의 항구도시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유벤투스 이후의 소속팀은 기록이 엇갈린다. 이 기록은 영어 위키피디아를 참조했다.
- ↑ 알비(흰색)+셀레스테(하늘색). 아르헨티나의 국기에서 나온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별명.
- ↑ 이탈리아, 스페인 혈통의 이민자를 뜻하는 말. 같은 대표팀의 루이스 몬티, 우루과이의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등도 해당되고, 현시대에는 티아고 모타, 주세페 로시-미국 출신, 시모네 페로타-잉글랜드 출신 등이 이에 해당된다.
- ↑ 오르시는 이후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때 터진 동점골을 재현하기 위해 20회 정도 재시도를 했지만 다시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래서 기적이 맞다.
- ↑ 초기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아르헨티나 협회와 아마테우르스(영어로는 아마추어) 협회의 두 리그로 운영되었다. 루이스 몬티 등이 속해있던 우라칸은 아르헨티나 협회, 오르시가 속해있던 인디펜디엔테와 리베르 플라테 등은 아마테우르스 협회쪽이었다. 이 둘은 1931년에 통합된다. 이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한 1부 리그이고, 2부 리그와 3부 리그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