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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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아흘리 SC 감독
마르턴 코르넬리스 욜
(Maarten Cornelis Jol)
생년월일1956년 1월 16일
국적네덜란드 (Netherland)
출신지헤이그
포지션미드필더
유소년 경력베르흐 IL
소속 클럽ADO 덴 하흐 (1973–1978)
바이에른 뮌헨 (1978–1979)
트벤테 (1979–1982)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1982-1984)
코벤트리 시티 (1984-1985)
ADO 덴 하흐 (1984-1985)
국가 대표: 네덜란드
(1980-1981)
3경기 1골
스태프ADO 덴 하흐 아마추어 계약 (1991-1995)
세퍼닝언 아마추어 계약 (1995-1996)
로다 JC 감독 (1996-1998)
RKC 발베이크 (1998–2004)
토트넘 핫스퍼 (2004-2007)
함부르크 SV (2008-2009)
아약스 (2009–2010)
풀럼 FC (2011–2013)
알 아흘리 (2016-)
토트넘 핫스퍼 역대 감독
자크 상티니
(2004)
마틴 욜
(2004~2007)
후안데 라모스
(2007~2008)

1 소개

능력은 출중했지만 '좋은 감독'을 넘어 '명장'이 되지 못한 인물

한국과 인연이 많은 감독

마틴 욜은 네덜란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대단한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감독으로서는 네덜란드에서 성공을 거두고 토트넘에 부임한 후 팀을 잘 꾸려나가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좋은 감독'이란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 팀이 리그를 제패할 만큼 위력을 발휘하게 할 만한 지도력은 부족했고 상황에 따른 빠른 대처 또한 부족하여 결국 진정한 명장으로 거듭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토트넘, 아약스, 풀럼에서 모두 경질당해 가는 곳마다 경질당하는 감독이라는 오명을 썼다.(...)

한편 마틴 욜은 한국과 참 인연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토트넘 시절 이영표를 영입하여 비교적 중용했고 함부르크 시절 손흥민을 잘 키웠으며 아약스에서는 석현준을 발굴했다. 이쯤되면 대표적인 지한파 감독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그래서인지 몇 차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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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 하흐 시절 마틴 욜

욜은 1956년 1월 16일 한국에서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유명한 도시인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시절에 아마추어 팀인 베르흐 IL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 프로로 전향하여 ADO 덴 하흐로 이적했다. 그는 1975년 FC 트렌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네덜란드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욜은 1978년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9경기를 뛰었고 1979년엔 트벤테로 이적하여 3년간 활동하며 71경기 9골을 기록했으며 1980년엔 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까지 3경기 출전했다.

욜은 1982년 잉글랜드의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으로 이적하여 1984년까지 2년간 63경기 4골을 기록했고 뒤이어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하여 15경기 출장했다. 욜은 1985년 덴 하흐로 복귀하였고 얼마 후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욜은 덴 하흐에서 1989년까지 135경기 6골을 기록한 후 은퇴했다. 이렇듯 욜은 선수 시절 대단한 활약을 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3 감독 경력

3.1 네덜란드 시절

욜은 1991년 덴 하흐에서 아마추어 계약을 체결하고 팀을 아마추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순위로 끌어올렸다. 이후 욜은 1995년 세퍼닝언으로 이적하여 1년간 감독직을 수행하며 논 리그 챔피언쉽 우승을 차지했다. 욜은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96년 로다 JC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년간 감독 직을 수행했고 1997년 네덜란드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8년과 2004년 사이, 욜은 RKC 발베이크 감독직을 수행했다. 발베이크에서의 감독 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그는 처음 감독을 맡은 후 11월까지 겨우 승점 3점만 확보하며 리그 꼴지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을 독려하여 성적을 끌어올렸고 첫 시즌 강등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욜은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전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여 팀을 대륙 대회 진출권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공으로 욜은 2001년 선수들이 뽑은 네덜란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2년에도 올해의 감독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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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베이크 클럽은 자신들을 훌륭한 팀으로 육성시켜 준 마틴 욜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관중석에 그의 모습을 본딴 동상을 세웠다.

3.2 토트넘 핫스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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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은 2004년 11월 8일 토트넘 핫스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욜은 당시 하위권에 처져있던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비진을 강화시키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고 2004년 12월 5경기를 모두 이기는 션세이션을 일으켜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이달의 감독상을 수여받았다. 아약스에서 이렇듯 좋은 활약을 선보이는 욜을 신임 감독으로 데려오려 한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욜은 토트넘을 일찍 떠날 생각이 없다며 이를 부인했다. 욜은 팀을 이끌고 한때는 유로파 대회 진출권까지 올리기도 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블랙번을 상대로 비기는 바람에 9위에 그쳐 유로파 대회 진출을 실패했다. 그래도 욜은 성적이 엉망이던 토트넘을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공적을 인정받아 2005년 8월 3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토트넘은 2005-06 시즌을 대비하기 위한 프리시즌에서 매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들은 피스컵에서 PSV 아인트호벤, 올랭피크 리옹, 보카 주니어스를 모두 격파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토트넘은 프리 시즌에서의 경기력을 리그에서도 이어가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4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이제 웨스트햄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최소한 비기기라도 한다면, 토트넘은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경기가 있는 날인 2006년 5월 7일 이른 아침, 토트넘 선수들이 집단 식중독에 걸리고 만 것이다. 식중독 증상을 보인 선수는 로비 킨, 마이클 도슨, 마이클 캐릭, 에드가 다비즈, 라덱 커니, 카럼 다벤포트, 티무 타이니오, 아론 레넌, 리 바나드, 톰 허들스톤 등 총 10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에 참가했지만 허들스톤은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라덱 커니 역시 벤치를 지켜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토트넘은 당연히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웨스트 햄에게 2:1로 패하고 말았다. 그 사이 아스날이 위건을 4:2로 꺾고 4위를 기록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했고 토트넘은 5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사실 욜은 선수 10명이 식중독에 걸린 상황이니 경기를 다른 날로 연기해주거나 최소한 4시간은 더 미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웨스트햄이 이날 경기를 치르고 며칠 뒤 FA컵 결승전까지 치르는 상황에서 토트넘의 입장만 우선하여 웨스트햄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며 2시간 연기하는 것만 허용했다. 욜은 경기 후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경기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필드에서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 감사한다. 다만 웨스트햄과의 경기에서 패함으로써 슬픔과 아픔으로 마지막 경기를 장식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아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토트넘 측은 경기 후 선수들이 묵었던 매리어트 호텔을 고소했고 FA에 재경기를 요청했지만 FA는 "토트넘은 30명 이상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경기가 벌어진 장소도 언제든 선수를 수급할 수 있는 런던이었다. 록 주전 선수들의 식중독으로 몸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경기가 성사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재경기를 받아들인다면 비슷한 사례가 계속 나올 수 있으니 기각한다."라고 발표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토트넘의 라이벌인 아스날이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몰아세웠으나 욜은 그저 호사가들의 허풍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2006-07 시즌, 토트넘은 이번에도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들은 비록 리그 컵에서 아스날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리그에서는 12경기에서 단 1패만 거두고 승점 27점을 획득하며 5위로 치고 올랐다. 그들은 시즌 끝까지 5위를 지켜내는 데 성공하고 유로파 대회에 다시 한번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토트너은 유로파 대회에서 4강에 들었고 FA컵에서도 4강에 들었다.

이렇듯 토트넘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인 그였지만 그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엔 실패했는데, 이는 그의 전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틴 욜 시절, 토트넘은 베르바토프를 중심으로 한 공격력은 리그 탑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강력했다. 하지만 수비진은 욜이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을 만큼 좋지 않았다. 이는 욜이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고 지극히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토트넘은 득점이 많았지만 실점도 많았고 수비진이 자꾸 정신줄을 놓아버리니 예능경기도 많아(...) 5위권에서 언제나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이때 토트넘이 정말 재미있어서 팬이 된 이들이 많다 카더라

2007년 여름, 욜은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이적료를 사용하며 수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맨유에서 베르바토프를 영입하려 한다는 루머가 파다하자, 그는 베르바토프를 파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결사 반대하여 결국 팀에 잔류시켰다. 이렇듯 핵심 공격수인 베르바토프를 지켜내고 수많은 선수들(그 중 상당수는 윙백이었다...)을 영입했으니 이제 토트넘이 4위 안에 들 확률은 높아 보였다. 그러나 토트넘이 리그가 개막한 이래 첫 두 경기에서 패한 뒤, 클럽 보드진은 당시 세비아 FC의 감독이었던 후안 데 라모스와 스페인 호텔에서 접촉햇고 이 장면이 기자들에게 찍혀 언론에 공개되었다. 토트넘 회장 다니엘 레비는 라모스를 데려올 것이라는 루머를 부인했지만 이러한 소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후에도 토트넘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급기야 2007년 10월 25일 유로파 컵 대회에서 헤타페에게 2:1로 패한 직후 경질되고 말았다.

욜이 경질당한 데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성적이 부진했다. 토트넘은 지난 시즌과는 달리 공격력이 강력하지 못했고 수비진은 축구 포털 사이트인 싸커넷이 "'가미가제(자살특공대)' 수비진"이라고 혹평했을 정도로 안 좋았다. 10경기에서 21실점을 기록했을 정도니... 결국 토트넘은 10경기 1승 4무 5패를 기록하며 강등권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선수들과 불화를 겪은 것이 컸다. 리그 10라운드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마틴 욜 감독은 벤치에 앉아있던 베르바토프에게 몸을 풀라고 지시했으나, 베르바토프가 이를 듣지 않았다. 베르바토프가 벤치에 앉힌 마틴 욜 감독에게 자신을 맨유로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결국 토트넘은 이 경기에서 3:1로 패하고 말았다. 또한 저메인 데포는 욜이 경질되어야 재계약을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1600만 파운드를 주고 데려온 대런 벤트는 고작 한 골(...)만 기록하는 주제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짜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또한 영입 정책도 문제였다. 前 토트넘 선수였던 팀 셔우드는 저메인 제나스와 톰 허들스톤 같은 유망주들을 기용하지 않고 거금을 들여 검증된 선수들만 샀던 것이 실수라고 지적했다. 그는 "파스칼 심봉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뛸 뿐이지 팀을 위해 뛰지 않는다. 마이클 도슨은 레들리 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카불은 수비하기 귀찮아 하는 수비수다."라며 이적 선수들이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래도 토트넘 시절 한국 팬들에겐 이영표를 중용한 것 때문에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일부 언론과 팬들은 욜이 이영표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고 로테이션용으로 쓴다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영표는 수비력은 확실히 준수했지만 빠른 크로스가 좋지 않고 항상 공을 멈춘 뒤에 크로스를 올려야 해서 그리 위협적이지 못해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하는 마틴 욜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욜은 암울한 수비진 때문인지 이영표를 자주 기용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토트넘 감독으로 부임한 후안 데 라모스는 이영표를 아예 잉여자원으로 여기고 경기에 쓰지 않아 한국 팬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욜은 "그래도 이영표를 자주 기용해준 좋은 사람"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3.3 함부르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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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은 2007년 11월 버밍엄 시티로부터 감독 직을 제안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고 1년간 휴식을 취한 뒤 2008년 함부르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2008-09 시즌 함부르크를 이끌고 분데스리가와 UEFA 컵, DFB 포칼에서 모두 호성적을 거두며 트레블을 도전했지만[1], 세 개 대회 모두 북독일 라이벌 베르더 브레멘에 덜미를 잡혀 UEFA컵[2]과 DFB 포칼[3]은 준결승에서 좌절하였고, 우승을 노렸던 분데스리가에선 브레멘에게 진 후 우승이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함부르크는 시즌 최종전 프랑크푸르트 원정에서 종료 직전 나온 트로초프스키의 골로 도르트문트를 힘겹게 제치고 리그 5위를 기록하며 유로파 리그에 겨우 진출했다. 그래도 이는 함부르크 구단 역사상 1980년대 이후 최초로 두 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이었다. 이때 손흥민은 함부르크 유스팀에서 활동했는데 욜은 그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엄청난 재능을 소유했다고 극찬하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3.4 아약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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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6일, 욜은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욜은 2009-10 시즌 개막 후 2경기를 모두 이기며 기분좋게 출발했다. 그러나 아약스는 이후 PSV 원정에서 패했고 스파르타 로테르담과의 홈경기를 비겨 7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아약스는 이 시즌 토비 알더베이럴트얀 베르통헨 등 강력한 수비진과 루이스 수아레스가 이끌던 리그 탑급의 공격진을 발판으로 득실점이 +86이라는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였다. 욜은 1월 이후 14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러나 초반에 부진한 것이 발목을 잡고 말았고 스티브 맥클라렌이 이끄는 트벤테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10년 여름, 욜은 풀럼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려고 했지만 아약스 보드진이 이를 막았다. 이후 욜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아약스를 이끌었지만 성적은 저조했고 리그에서도 17경기를 치뤄서 4위라는 불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2010년 12월 6일 NEC 네이메겐과의 경기에서 1:1로 비긴 후 경질이나 다름없는 권고사직을 받고 구단에서 물러났다.

한편 마틴 욜은 2010년 1월 석현준을 찾아내 아약스로 입단시켰다. 석현준은 그의 지도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았다. 비록 그는 아약스에서는 주전이 되지 못해 포르투갈로 가야 했지만 포르투갈에서 성공하여 빅리그 급이 되었으니 욜의 눈썰미가 정확했다고 봐도 좋을 듯.

3.5 풀럼 FC 시절

2011년 6월 7일, 욜은 풀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욜은 팀을 이끌고 2011-12 시즌 승점 52점을 기록하며 9위를 거두었다. 이때 풀럼은 강팀 발목 잡는 복병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예를 들어 아스날, 뉴캐슬, 리버풀[4]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고 맨시티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첼시와도 홈원정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다. 욜은 다음 시즌에는 팀을 12위에 안착시켰고 시즌이 끝난 뒤 2014년 6월 30일까지 계약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13-14 시즌, 풀럼은 너무 많은 핵심 선수들이 이적하는 바람에 전력에 구멍이 생겨버렸고 결국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결국 욜은 2013년 12월 1일 웨스트햄에게 3:0으로 패하며 리그 6연패를 기록한 직후 경질되고 말았다.

3.6 알 아흘리 시절

2016년 2월 24일 이집트 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알 아흘리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8월달 자신이 신변에 위헙을 부른다고 해서 자진 사임을 하게 되었다.

4 수상

4.1 선수 시절

KNVB 컵 : 1975년

올해의 선수 : 1985년

4.2 감독 시절

1. 로다 JC

KNVB 컵 : 1997년


2. 아약스

KNVB 컵 : 2010년
  1. 반면 자신의 토트넘 후임 감독이었던 후안데 라모스는 초반 프리미어리그 2무6패 꼴찌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역사를 쓴 뒤 경질되었다. 그런데 2달 뒤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하는데
  2. 1차전 브레멘 원정에서 1-0으로 이겼으나 2차전 1-3으로 패하며 합계 2-3으로 탈락
  3. 홈에서 1-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패배
  4.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리버풀에 홈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안필드에서 구단 역사상 첫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