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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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마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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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푸체인들이 쓰는 깃발

Mapuche

"Folil aliwen taiñ namun, Müpü üñüm rupalelu niey taiñ Piwke."
우리 발은 나무 뿌리고, 지나가는 새 날개엔 우리 심장이 깃들어 있다.
- 파파이[1] 마리을

칠레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원주민 민족. 마푸는 땅, 체는 사람 또는 사람들을 뜻하므로 마푸체란 땅의 민족 쯤 되겠다. 칠레에는 아라우카니아 주에, 아르헨티나에는 네우켄 주에 많이 살고 있다. 물론 도시에 사는 마푸체도 많다. 아라우코족이라고도 한다. 이는 점토(라우)물(코), 즉 라우코(점토 물)란 지명에서 나온 말이다. 경멸하여 아우카(Auca, Awqa)라 하기도 했는데 아우카는 잉카 지배층의 언어, 즉 루나시미(케추아어)로 '야만인'바바리안을 뜻한다.

에스파냐인들이 남아메리카에 당도하기 전부터 은근히 전투종족스러운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주변 부족들을 모조리 제압하며 팽창 중이던 잉카 제국의 확장을 중지시킨 민족이기도 했다. 15세기 말 경 잉카 제국과 마푸체족은 접촉을 시작하여 충돌했고, 마울레 강 근방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여기서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잉카인들의 세력 확장을 저지한 것은 물론, 처음으로 맞닥뜨린 강대한 적에 놀란 마푸체인들이 느슨한 부족 단위의 세력 구조에서 벗어나 단일화된 민족으로서 뭉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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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마푸체 민족은 남아메리카다른 여러 원주민과 달리 에스파냐 제국과 에스파냐 제국에서 독립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19세기 후반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에스파냐 왕조차 하는 수 없이 마푸체 민족의 영토를 인정했다. 이에 마푸체 일부는 시몬 볼리바르나 산 마르틴 같은 이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남아메리카 최초로 독립을 이룬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과 마푸체인들의 전쟁은 실로 격렬하여, 당시 스페인 왕실에서는 칠레를 두고 "신세계의 네덜란드 전역(Flandes de Indias)"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몇 몇의 주요 정착민 도시만 점거하고 나머지 광활한 숲과 고원은 마푸체인들이 여전히 지배하며 간간히 정착민 도시들을 폭풍 같이 휩쓸어 버리는 꼴을 어찌 하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한 게릴라전에 인력과 자원만 낭비하고 있었으니 딱 아메리카 전선에서 벌어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페루에서 얻는 수익금의 상당 부분을 마푸체를 상대하는 정규군에게 Real Situado란 이름으로 꾸준히 투자하기도 했다. 중간에 운반책이 때 먹은 게 정작 군인들이 받은 돈보다 더 많단 소리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16세기 후반에 마푸체족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비오비오 강 이남의 모든 스페인군 거점이 파괴되자, 네덜란드 해군이 마푸체족에게 무기를 대주는 등 실제로 네덜란드-마푸체 반스페인 연합전선이 형성 되었다! 대륙과 인종을 초월하는 치열한 스페인 까기 물론 나중에 스페인과의 평화협정 때 네덜란드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오히려 마푸체족은 유럽인들이 도래한 이후 한동안 세력을 더 뻗어 나갔다. 안데스 산맥의 페웬체와 팜파의 테우엘체가 마푸체 문화를 받아들이고 친족 관계를 맺으면서 점점 마푸체가 되어 갔다. 마푸체들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가축들을 받아들여 목축하는 동물 종류를 바꾸었고 농사에 유럽 작물도 도입했다. 그리고 말을 입수하여 기병을 양성하고 여러 기동전술과 차륜전 전술을 개발하여 유럽인들과 맞섰다. 병력 동원도 한번에 3~4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뛰어났다. 마푸체족의 세력 확장을 아라우카니사시온(Araucanización)이라고 한다. 이 마푸체의 세력 확장 전쟁으로 칠레에서만 스페인인이 4만명과 그들을 따르는 원주민 6만명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스페인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마푸체의 피해도 엄청났는데 무려 10만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스페인은 마푸체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잔혹하게 보복하여 마푸체인들이 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마푸체 측도 계속된 세력 확장을 할수가 없어 아라우카니사시온을 중단하고 스페인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물론 평화 협정을 맺고도 스페인과의 대립과 갈등은 여전했기에 틈만나면 스페인 식민지와 접한 국경선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면 자신들도 피해가 심하며 좋을게 없다는것을 알고 최대한 스페인과의 충돌을 피하고 영토유지에만 힘썻다.

마푸체 민족은 국가를 이룬 적은 없고,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여 마푸체 민족의 여러 가문들이 연합한 부타마푸 같은 것이 가장 큰 정치조직이었다. 의사결정은 트라운이나 카윈 같은 모임에서 여러 집안들이 만나 합의를 이루었다. 복잡한 친족망으로 수많은 부족이 이어져 있었지만 명확한 정치체계랑 행정체계가 없다보니 적대하는 집안들끼리 많이, 피터지게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이 수많은 집안들이 모두 존중하는 관습법인 앗마푸(Ad mapu)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이 장가회되면서 단결력이 중요해지자 마푸체의 정치조직인 부타마푸가 이전의 유동적인 모습을 벗어나 일종의 정부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부타마푸의 지도자 직책인 토키의 권한도 강해져 마푸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심지어 토키가 세습되기까지 했다.

마푸체가 쓰는 말(마푸체어)은 마푸둥군(땅의 언어) 또는 체둥군(사람들의 언어)이라 한다. 여러 학자들은 이 말을 교착어로 분류한다. 한국말처럼 주로 어미에 여러 문법 요소를 붙여서 말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도 뭘 모르는 칠레 사람들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사투리"(dialecto)라고 불러버린다. 에스파냐 말과 같은 접속 구조가 없어 복잡한 문장을 만들지 못 하니 마푸둥군을 쓰는 사람들은 생각도 단순하고 하등하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에스파냐와 평화 협정이 맺어진 이후 마푸체인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에스파냐와의 교역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푸체는 소금, 소, 말, 폰초(판초)를, 에스파냐령 칠레는 설탕, 옷, 술을 팔아서 교역했다. 교역은 마푸체인들에게도 큰 이득이 되었기에 마푸체 부족들은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아 충돌을 피하며 에스파냐를 자극하지 않았다. 심지어 칠레가 독립할 때 마푸체 대부분은 에스파냐 왕당파 편을 들어 독립군을 공격하고 왕당파를 여러 면에서 지원했다. 여기에 일부 칠레인들은 "자기 압제자들을 돕는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까지만, 사실상 독립군도 마푸체가 보기에는 왕당파와 똑같은 "윙카(에스파냐 혈통 또는 에스파냐 문화에 물든 자, 도둑놈이란 뜻도 있다)"인데다, 왕당파의 수장인 왕은, 독립 운동파에 참여한 수많은 국경지대 군인들과 달리, 직접 마푸체들 앞에서 포악질을 해 댄 적도 없고, 오히려 평화협정의 대표자로 이름이 나올 때가 많았으니 마푸체들 쪽에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독립운동파는 에스파냐와 마푸체들이 맺은 비오비오 강을 국경선으로 인정한다는 조약을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포악한 깡패 행동대원이 가끔 온정적인 모습도 보이는 깡패 두목한테서 독립해서 새 조직을 세우려 할 때, 그 깡패 행동대원한테 시달림 받아온 지역 상인이 이 둘 중 한 쪽 편을 들어야 한다면 누구 손을 들까를 생각하면 마푸체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칠레 독립파는 이런 마푸체들의 행동을 '무지에서 나온 짓' 내지는 '배신'으로까지 취급했다. 크리오요 독립운동가들은 마푸체의 에스파냐에 맞선 저항을 "칠레 독립 운동 1기"로 포장하려 했는데 그게 먹히지 않은 것이다.

19세기 중반 쯤에 니돌 롱코(대 지도자) 마닌과 다른 롱코들이 프랑스 사람을 왕으로 받들어 근대국가 설립을 시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마푸체 민족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칠레 정부가 이 계획을 알아채고 그 프랑스 사람인 오르리 앙투안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추방하면서 실패했다. 칠레 역사는 흔히 이 일을 '우스꽝스러운 사건', 앙투안을 프랑스 제국주의의 대리인 또는 정신병자로 취급한다.[2] 현재도 프랑스에는 앙투안의 계승자가 남아 있어 마푸체족의 상황을 알리는 일을 하고 마푸체 일부도 이 왕가를 존중하다.자기네 땅 뺏으려는 왕가를 존중하다니 참으로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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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군과 마푸체의 전투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맨처음엔 힘이 약해서 마푸체인들과의 전쟁을 하지않고 그들의 영토를 보장해주며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국력이 마푸체를 넘어서자 노선을 바꾸어 마푸체인들을 족치기로 작정하여 조직적인 공격을 하였다. 칠레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30년에 걸쳐서, 아르헨티나에서는 1880년쯤부터 마푸체 민족의 영토를 본격적으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특히 칠레는 1852년에 마푸체의 땅 아라우카니아에 아라우코 주(Provincia de Arauco)를 설치한다고 공포하여 마푸체를 도발했다. 당연히 마푸체는 가만있지 않았고 1859년에 칠레인들이 내전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대규모 군사공격을 하여 비오비오 강 남쪽 칠레인 정착촌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 빡친 칠레는 대규모 병력을 양성해 보복에 나섰다. 마푸체와 칠레와의 전쟁은 굉장히 치열했으나 국력에서 칠레가 압도적이라서 마푸체는 당해낼수가 없었다. 1881년, 칠레 군대는 마푸체 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에서 승리하여 마푸체 족을 완벽하게 개발살내고 굴복시킨다. 아르헨티나 역시 마푸체를 철저하게 박살내었다. 물론 마푸체의 저항이 워낙 심했기에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완벽하게 아작내는데는 수십년이나 걸렸다. 이 와중에 독이 오른 칠레와 아르헨티나에게 많은 마푸체인들이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레둑시온(Reducción)이라는 좁은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결국 마푸체 민족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게 차지하던 영토의 95%를 빼앗기고 5% 남짓하는 땅에 떠밀려 들어갔으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인종주의를 따르는 정부와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겼고 2등 시민, 열등한 인종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마푸체를 잡아 가축한테 하듯이 귀 한쪽을 자르거나 동물 소유권 표시마냥 낙인을 찍는 일까지 당했다. 마푸체 민족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그곳에 유럽 이주민을 데려오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인종정화' 정책으로 수많은 마푸체가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생존자 중 여자들은 백인 이주민이랑 강제 혼혈을 시켰으며 순혈 마푸체는 멸종했다는 개드립을 쳐대며 마푸체 민족을 부정했다. 원주민과 '백인 정복자의 첫 만남'도 아니고 수세기가 지났는데 전염병으로 죽은 2만 명이 당시 전체 마푸체 인구의 20%일 정도로 추산되니 말 다 했다. 결국 이 조직적인 학살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마푸체들이 사망하여 이는 마푸체의 인구를 급격하게 감소시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마푸체는 칠레 70만, 아르헨티나 10만의 80만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게다가 마푸체인 대부분이 심한 차별을 받으며 가난에 시달린다. 그리고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마푸체 몰살 전쟁을 지휘한 로카 장군이나 원주민 말살을 주장한 사르미엔토를 영웅으로 숭배한다. 칠레 역시 마푸체를 족친 사람들을 영웅으로 숭배한다. 칠레 역사가들은 칠레의 마푸체 공격을 La Pacificación de Araucanía라 하여 ‘아라우카니아 평화롭게 하기’라는 뜻으로 부르며 이 사건으로 아라우카니아가 평화로워졌다고 주장했다. 물론 자기 땅을 빼앗기고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 마푸체인들은 이 말만 듣으면 개소리한다며 치를 떨지만.

정복 이후 마푸체 민족과 지주, 정부 사이의 싸움은 1970년에 선거로 들어선 아옌데 대통령의 좌파연합 정권이 토지개혁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마푸체 단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옛날에 빼앗긴 땅에 쳐들어가 눌러앉은 다음, 정부에 그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전 정부와 달리 가난한 농민층에 경찰력을 동원하길 꺼렸던 좌파 정부는 그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푸체 민족은 수많은 땅을 되찾았으나 1973년 쿠데타로 앞서 말한 좌파 정부를 뒤엎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모든 땅을 이른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물론 군사 정부도 마푸체를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다 죽은 마푸체도 많았다.

'민주화' 이후, 민간정부는 마푸체 민족의 문제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러한 '화해'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아서 피노체트의 군정 때 빼앗긴 토지를 돌려받는 일도 소유주들의 반발로 얼마 가지 않아 어렵게 되었다. 특히 댐 건설이나 도로 건설에 마푸체 거주지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옮겨 가길 거부하는 마푸체를 경찰력으로 밀어버리는 일이 일어나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목재 산업을 위해 수입해서 심은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농장에서 뿌리는 농약으로 마푸체 민족의 땅이 오염되고, 고유종이 아닌 이 두 나무가 빨아들이는 수분 때문에 땅이 말라붙어 마푸체 전통의약에 쓰이는 약초가 줄어들고 있어 이것 때문에 마푸체인들이 반발하여 분쟁이 심각하다. 거기다 마푸체 민족을 상대하는 경찰과 법원 조직에서 피노체트 때 활동했던 사람들이 활동하다 보니, 피노체트 때 만든 '반 테러법'을 아직까지도 적용하고 있어 저항하는 마푸체인들에게 장기수감 같은 중형을 먹인다. 그래서 일부 마푸체 사이에선 '피노체트 때와 다른 게 뭐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부패 없는 '좋은 경찰'이라고 선전하는 칠레 경찰 카라비네로스는 마푸체 집 안에 최루탄을 발사하고 온 집을 뒤엎어 놓으며 여성과 아이들까지 고문하거나 강간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도 마푸체를 무자비하게 대하는건 마찬가지. 특히 마푸체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반발한 마푸체들이 시위와 납세 거부까지 해 탄압당한다.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안고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실 칠레 카라비네로스의 기원이 된 집단의 전설적 영웅 에르난 트리사노부터가 '칠레의 버팔로 빌'이란 소릴 들은 사람이었다.

사실 이것은 정부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보통 칠레 사람들과 대화하면 마푸체는 게으르고 주정뱅이이며 땅을 돌려준다 해도 제대로 쓰지도 않고 팔아버리기나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그것을 칠레인들한테 뒤집어 씌운다는 이야기까지 한다. '좋은 마푸체'도 있지만 그런 마푸체는 다 불만없이 행복하게 산다고 주장한다. 무슨 일이있으면 그건 다 극히 일부 마푸체 불만분자와 "외국인 선동가" 때문이다. 거기다 마푸체가 19세기 후반까지도 독립을 유지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려는 사람이 많으며 그 인식은 거의 알제리프랑스라고 주장하는 일부 프랑스인의 그것에 맞먹는다.

마푸체족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농담들이 있다. 농담이라고는 하나, 유럽인 및 유럽계 식민자들의 남아메리카 침략사, 아니 비단 남아메리카뿐 아니라 유럽 열강과 그 계보를 잇는 독립국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행하였던 만행들을 단편적으로, 그러나 핵심을 지적하는 뼈있는 농담이기에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자들이 처음 왔을 때 그 자들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다.

그 자들이 말했다.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눈을 떴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었다. 그 자들에게는 땅이 있었다.[3]

백인이 우리 조상 무덤을 파헤치면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우리가 백인 조상 무덤을 파헤치면 쇠고랑을 찬다.
다만 종교에 한해서 이제는 과거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중남미 대부분이 그렇듯 마푸체인들 중에서 개신교, 특히 오순절파와 감리교 신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 사실 같은 기독교라도 가톨릭만 침략자들이 강요한 종교로 보고, 개신교는 자신들이 좋아서 스스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1. 이름이 아니라 마푸체 말로 경애하는 나이 많은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
  2. 마푸체들은 몰랐거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앙투안을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이 사람의 계획 자체도 심각한 식민주의 성격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앙투안 또한 프랑스에 보낸 편지에서 마푸체의 '남는 땅'을 프랑스인 이민자들한테 나눠주고 마푸체에겐 쥐꼬리만한 땅만 남길 생각을 밝히고 있었다.
  3. 이 이야기는 남아공이라든지 아프리카 인종차별 및 식민지 상황을 비꼬는 말로 나온 말이다. 데즈먼드 투투 주교도 이런 말을 하며 유럽 백인들을 깠다. 케냐의 국부라 불리는 조모 케냐타도 매우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